소설리스트

110화. 못다 핀 한 송이 (110/120)


110화. 못다 핀 한 송이
2022.07.19.



 


“선배, 나 부탁이 있어요.”

세나가 강현의 허벅지에서 내려와 애처로운 눈빛을 쏘았다.


“뭔데?”

원체 남에게 부탁할 일이 없는 그녀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말이 나오자 강현의 귀가 쫑긋했다.


“혹시 아빠가 선배 불러서 뭐라고 하면, 제 말이 맞다고 맞장구만 쳐줘요.”

“무슨 말이길래?”

“아니다. 차라리 아빠가 부르면 바쁘다고 해요.”

“기세나, 또 사고 쳤어?”

“‘또’라뇨? 내가 무슨 사고를 쳤다고!”

“뭔데. 말해 봐. 어지간한 거면 다 들어줄 테니까.”

자못 심각한 척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그의 입꼬리는 부드럽게 풀려있었다.


“……인사 소식 들었죠?”

기세나를 K 법무법인 파트너 변호사 후보로 내정한다는 인사였다.

강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이 뭔지는 더더욱, 선배가 더 잘 알겠죠.”

두말하면 입 아프지.

아직 3분기가 다 지나지 않았는데 인사 발표가 뜬 것도 의아한 일이지만, 확정이 아니라 후보였다.


“싫다고 했어요.”

“…….”

“선배 팔아서 그 자리에 올라 봤자 내 자리 같지도 않을 거고……. 또 선배를 이용한 건 한 번이면 충분하잖아요. 더는 그런 거 싫어. 자존심도 상하고, 야비해요.”

“아깝지 않아?”

“뭐가요?”

“파트너 변호사, 그거 하나만 보고 달려왔잖아.”

“올해 초까진 그랬죠.”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 기회일 수도 있으니.”

공문이 올라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바로바로 결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세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진짜 하나도 안 아까워.”

“그런 일일수록 신중하게 결정해야-.”

“나한텐 선배가 제일 중요해. 선배가 내 자존심이고, 내 목표예요.”

올곧은 자세로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강현은 더는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세나의 손목을 잡아 제 앞으로 가까이 당겼다.

벌어진 무릎 사이에 서게 된 그녀의 허리를 둘러 안고 얼굴을 묻었다.


“그래서 내가 무슨 말에 맞장구를 쳐줘야 하는데?”

세나가 강현의 뒷머리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자꾸 그런 식으로 치사하게 건드리면, 로펌 차려서 나간다고 했어요. 선배랑 같이.”

“기 대표님이 한 방 제대로 먹으셨겠네. 역시 화끈하다니까.”

딸을 가진 아비라고 하나, 대형 로펌의 수장이니만큼 공과 사 중에서는 공을 선택할 것이다.

류강현은 이것저것 실리를 따졌을 때 지금 K 로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다.

이미 그를 중심으로 팀이 꾸려졌고, 그가 가져온 사건들이 로펌 전체 사건의 30% 이상을 차지하는데, 대표라고 함부로 내쳤다간 이사들의 반발에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렇게 된다면 나랑 같이 갈래요?”

“스카우트하는 거야?”

“네.”

“조건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던진 말이 아니기에 깊게 생각해보진 않았다.

무턱대고 높은 연봉을 제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 이 집무실보다 더 좋은 곳을 주겠다, 장담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최악의 경우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가 솔깃할 만한 영입 조건이 뭐가 있을까…….


“지금 받는 연봉보다 더 줄 수 있다고는 못해요. 대신 대표 자리 줄게요. 물론 공동대표예요. 수임료 성과보수도 더 드릴 거고, 장 실장님도 더 챙겨드릴게요. 로펌 운영방식은 전적으로 선배 스타일에 따를 거고-.”

“기세나.”

“네?”

“난 하나만 주면 돼.”

강현이 픽 웃더니, 주저리주저리 이어가던 세나의 말을 단칼에 일축했다.


“그게 뭔데요?”

“너.”

“…….”

“나한테 기세나 너 하나 준다고 약속해주면. 갈게. 너랑.”

뒷덜미를 매만지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강현이 기대고 있던 얼굴을 들어 세나를 올려다보았다.

다채로운 표정으로 늘 설레게 했던 그녀인데, 어쩐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너무 어려운 조건인가?”

강현이 일어나 세나의 팔뚝을 느릿하게 쓸었다.

다소 고민이 깊어 보였기에 강현도 덩달아 경직됐다.

시야를 가리는 그림자에 멈춰있던 눈꺼풀을 깜빡깜빡거렸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너무 쉬워서 나 방금 부동산 갈 뻔했어요. 새로운 사무실 찾으러.”

세나가 제 대답을 초조하게 기다렸던 한 남자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토끼처럼 폴짝 뛰어 강현의 품에 쏙 안겼다.

그제야 강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아빠 어떡해요? 이제 진짜 큰일 났네.”

“알아서 하시겠지. 난 뭐든 네가 하자는 대로 할 거야. 나한테도 가장 중요한 건 기세나, 너니까.”

“선배가 내 남자라서 든든하네.”

‘내 남자’라는 호칭에 기분이 좋아진 강현이 품에 안긴 세나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차에서 내린 강현이 검은색 우산을 살짝 들추어 굳게 잠긴 대문을 바라보았다.

담장 너머로부터 뻗어 나온 조경수에 매달린 빗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웅덩이를 만들었다.

기다란 나뭇가지와 풍성한 이파리들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햇살이 맑은 날에 보았다면 운치 좋은 경관을 자랑하는 대궐집이었겠지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에 바라본 집은 어쩐지 을씨년스러웠다.


-“장관님께서 류강현 변호사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황유라의 자료를 받아 본 전직 법무부 장관의 비서가 다음 날 아침 강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강현이 대문 앞에 서자, 벨을 누르기도 전에 문이 먼저 열렸다.

담장 삐죽이 솟은 보안 카메라를 일별한 뒤 안으로 들어서던 강현은 계단을 내려오던 한 남자와 마주쳤다.


“류강현 변호사십니까?”

“네.”

남자가 강현의 우산을 받아 들며 다시 한번 제 소개를 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괜찮습니다.”

돌계단을 다 오르자, 잘 가꿔진 넓은 평수의 정원이 나왔다.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서울에서 이런 마당이 있는 집을 가지려면 재산이 얼마쯤 필요할까.

하긴 전직 장관에 국회의원을 3선이나 했는데, 이 정도쯤이야.

발코니에서 바로 보이는 장소에 우뚝하니 심어진 소나무만 보아도 그 값이 얼만지 가늠이 갔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이 강현에게 슬리퍼를 내려놓으며 깍듯이 인사했다.

비서는 자신의 안내는 여기까지라는 듯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까딱였다.


“앉아계시면 차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복도를 걸어 비서가 알려준 곳에 도착하자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응접실이 나왔다. 그리고 한 남자가 넓은 창밖을 내다보며 앉아있었다.


“앉지.”

창가 가까이 다가가자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강현을 일별하지도 않은 채 턱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소싯적 인권변호사로 명성을 얻어 국회의원에 당선, 지역구에서 차곡차곡 신임을 쌓아 3선까지 하더니, 법무부 장관의 자리에 올랐던 남자였다.

강현이 재킷의 단추를 풀며 자리에 앉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알아보니 검사 출신 변호사더군. 옷 벗고 나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고. 자네, 소문이 무성한 사람이더군. 특히 중앙지청 부장검사랑 척진 사이라는 말이 돌던데…….”

장관은 사람들을 아우르던 위치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인만큼 상대를 가늠하는 눈빛도 날카로웠다.


“무성한 소문만큼 진실과 먼 것도 없다는 거 장관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지검장 자리까지 오를 인물이랑 안 좋게 엮여서 좋은 것도 없었을 텐데. 지금의 행태를 보니 운신이 꽤 불손했나 보군.”

“썩은 물에 노니는 준치가 되느니,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가 낫지 않을까 했던 것뿐입니다.”

“하. 참. 말은 잘하는군. 결국엔 조직에서 버려진 것 아닌가?”

“좋으실 대로 생각하시지요.”

기선제압을 위해 내뱉은 말들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강현을 보며 장관이 입을 꾹 다물었다.

폭풍전야라는 말처럼 두 사람 사이에서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 사이를 파고든 것은 차를 준비해온 비서의 움직임이었다.

그마저 사라지자 적막이 흐르는 응접실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뿐이었다.

빗소리가 귀에 익숙해질 때쯤 장관이 협탁에 놓인 봉투를 집어 테이블 위로 탁, 던졌다.

강현이 장관에게 보냈던, 황유라에 대한 자료였다.


“이 자료는 재직 시절 때 조사했던 자료인가?”

“최근 들어 흥미가 생겨 얻게 된 자료입니다.”

강현의 말에 박힌 가시를 읽은 장관이 눈매가 급격히 좁혀들었다. 그러고는 무궁화 조각상이 박힌 소파 손잡이를 꾹 쥐며 강현을 응시했다.


“다 지난 일인데, 이제 와 들쑤시고 다니는 저의가 뭔가?”

“글쎄요.”

“이걸로 날 협박할 생각이라면 당장 돌아가게. 어차피 이미 가슴에 묻은 아이라 휘둘릴 생각 추호도 없단 걸 알려주려 만나자고 한 걸세.”

“아드님의 죽음을 묵인한 대가로 명예와 권력을 얻으셨으니, 할 말이 없으시겠죠.”

“말조심하게! 지금 누구 앞에서 그딴 막말을 지껄이는 건가?!”

버럭, 자신을 향해 날아든 노기에도 강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작 그런 씨도 안 먹힐 경고를 하시려 자택까지 불러들이신 건 아니실 테고.”

제 앞에 놓인 봉투를 다시 장관 쪽으로 옮겨 놓고, 찻잔을 들었다.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머금자, 입안에서 향긋한 국화 향이 퍼졌다.

금방이라도 펑, 터질 것 같은 기운이 감도는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게, 차 맛이 좋았다.

좋은 차를 대접받았으니, 그에 걸맞은 답을 해줘야 마땅했다.


“아드님이 사망했을 당시 나이가 22살. 한창 사고 치고 다닐 나이긴 했습니다만, 타국에서 어이없는 죽임을 당할 죄를 저지른 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농간질에 22살 청년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후회하며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볼 기회를 빼앗겼다.


“아무리 신임이 높고 인망이 두터운 사람이라도, 제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된다고……. 장관님께서는 아드님이 몹시 창피하셨나 봅니다.”

“!!”

정곡을 찔린 건지, 아니면 양심에 찔린 건지.

강현의 촌철살인과도 같은 언사에 장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게 아니라면, 이 문제의 해결책이 뭔지 모르실 리가 없을 텐데 말이죠.”

잔을 내려놓은 강현이 허리를 세우며 반듯한 자세로 장관을 바라보았다.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그날, 그런 선택을 하신 것에 대해.”

“나는……! 나는, 내 명예를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니네! 그저 나라를 위해-.”

“그럼 왜 법무부 장관 자리에 올랐을 때 따로 사건을 재조사하지 않으셨습니까?”

강현의 일침에 장관은 당시 자신을 지지하는 당과 청문회 분위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장관으로서의 명예는 지키셨을지 몰라도 아들에겐 그리 명예로운 아버지가 아닌 듯 보이네요.”

허무하게 아들을 떠나보내고 난 뒤 후회와 자조, 비통함에 물드는 날들은 이따금 예고도 없이 찾아와 새벽잠을 괴롭혔다.

그러나 이미 끝난 사건이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장관님께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묵인하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터트리면 그만이니까요.”

“…….”

“그러나 아드님의 죽음에 조금이나마 후회가 남아 있으시다면, 장관님이 직접 나서는 게 아드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하는데.”

가슴 깊이 묻어뒀어도 감출 수 없는 참담함이었다.

장관은 두툼한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회한에 젖은 숨을 토했다.


“이건 제가 장관님께 드리는 배려입니다.”

강현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봉투의 끄트머리를 한번 꾹 짚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어 둔 재킷의 단추를 잠그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그는 미련도 없이 돌아섰다.


“…….”

처음 왔을 때와 똑같이, 장관은 강현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밀릴 것 같지 않았던 당당한 모습은 사라지고, 비통함에 눈물짓는 자식을 잃은 아비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