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Tied up tight
(109/120)
109화. Tied up t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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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Tied up tight
2022.07.16.
“뭐, 뭐야?!”
화들짝 놀란 기장수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뭘 놀라고 그러세요. 아직 놀라시려면 이른데.”
구멍이란 구멍은 전부 동그랗게 만든 기장수를 보는 세나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 너! 방금 그거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말 그대로예요. 제가 변호사 일을 하는데, 그게 꼭 K 로펌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기장수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턱 끝을 파르르 떨었다.
갑작스레 떨어진 인사에 대해 불만을 표하러 득달같이 달려오는 거까지는 예상 적중이었다.
그럼 화가 난 제 딸을 어르고 달래 계약 파기 조건으로 다른 원하는 건 없는지 물은 후, 다 들어줄 테니 류강현은 안 된다고. 그냥 전처럼 좋은 선후배 사이나 파트너로 지내라 설득할 계획이었다.
“이, 이게…… 네 답이라는 거냐?”
너무 기가 차서 혈압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기장수는 뻐근하게 당기는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단 한 번도 제 딸이 K 로펌을 떠날 거란 가설을 세워본 적이 없었다.
그는 세상이 순리대로 흐르듯 세나가 자신이 설립하고 키운 로펌의 명맥을 이어나가리라 여겼다.
세나 역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협상이라는 게 자신이 가진 패 중에서 상대가 필요할 만한 것을 내주고 이득을 취하는 거잖아요?”
“네 말 잘 알아들었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지금 저에겐 파트너 변호사라는 자리보다 류강현 그 사람의 존재가 더 가치가 있어요.”
어려서부터 고집도 워낙 쇠심줄인 세나라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는 이상 쉽게 포기하지도 않았다.
원하는 게 생기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몇 날 며칠, 길게는 몇 달을 노력해 그것을 꼭 갖고야 말았다.
지금 딱 그런 얼굴이었다.
곡소리가 절로 나와 머리가 어질했다.
“하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놈한테 그렇게 폭 빠졌으면 앞으로 어쩌려고 그러는 게야?”
기장수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런 딸의 성정에 학을 뗀 적이 여러 번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번 일 역시 제 딸이 먼저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걸.
“그 사람 자체가 싫으신 게 아니시잖아요. 아빠가 보자마자 인정할 정도로 괜찮은 남자예요.”
“그래. 나도 안다. 그런데. 난 그 집안 내력이 거슬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고아였다면 이렇게 반대하지도 않았을 거야.”
“아빠. 그 사람은 그날 아빠에게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전하고, 스스로 상처를 받았을 거예요. 그런데 제겐 일언반구도 없었어요. 왜인 줄 아세요?”
“…….”
“자기 때문에 제가 가족과 틀어질까 봐. 그걸 제일 먼저 걱정한 거예요. 가족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런데도 계속 반대하실 거예요?”
그 일이 있고 난 뒤 강현과 복도에서 몇 번 마주쳤지만, 데면데면하게 군 것은 기장수, 저 혼자였다.
그간 로펌 내부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일주일마다 점심을 겸해 해 오던 대면 보고도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렸다.
강현은 기장수가 자신을 못마땅히 여기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태도를 달리하지 않았다.
그의 무례함에도 언제나 그렇듯 예의 바르고 깍듯하게 그를 대했다.
“흠…….”
기장수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침음을 흘렸다.
할 말을 마친 세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기장수는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건 제가 지켜본 류강현식 스타일의 협상인데요. 아, 음. 그 사람은 협상보다는 협박하는 타입이긴 하죠.”
“안 그래도 심란한데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폼을 잡는 게야?”
기장수는 제 딸의 입에서 또 무슨 폭탄선언이 떨어질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기 대표님, 제가 류강현 변호사랑 K 로펌을 나가 다른 로펌을 차리면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문을 향해 걸어가는 세나의 하이힐이 또각또각, 기장수의 귀에 써늘하게 꽂혔다.
대표실을 나서기 전 돌아보는 그녀는, 둥글게 말린 입술과는 다르게 눈으로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파트너 변호사보다 대표 변호사라는 직함이 더 있어 보이지 않아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쿵-’ 하고 닫히는 문소리와 동시에 기장수의 심장도 철렁, 내려앉았다.
소식을 전해 들은 황유라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퍽, 내동댕이쳤다. 곧이어 신경질 가득한 비명이 전무실을 날카롭게 울렸다.
“아아악!!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인간이 없어! 왜!”
그런 제 동생을 보던 황유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친놈한테 제대로 물렸구나. 내 동생.”
“걘 뭔데 나한테 이 지랄인 거지? 검사도 아니고 변호사 주제에!”
“그래도 이만하면 경고는 먹혔겠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은 없으니까.”
“하-. 올해 들어 재수가 옴 붙었나……. 되는 일이 없어.”
“유라야. 이 오빠가 전에도 말했지?”
놀 땐 놀더라도 제 손바닥 위에 올려 둘 수 있는 것들을 데리고 놀라고.
“화려한 꽃들일수록 독을 품고 있다고 했잖아.”
“아! 몰라! 둘째 새끼 표정 봤어? 아주 신이 났던데. 그 새끼가 뒤에서 수습 방해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래봐야 첩 자식이고, 기어올라 봐야 우리 발아래야.”
시근거리던 콧김을 길게 내뱉은 황유라가 조금 진정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쪽에선 뭐래? 어떻게 안 된대? 부장검사라며? 나, 이대로 못 넘어가. 감히 나에게 엿을 먹인 새끼를 어떻게 그냥 둬?”
황유라가 말하는 그쪽은 황유찬 전무와 스폰 관계에 있는 검사 인사였다.
“그 류강현이란 놈이 그쪽에서도 골칫덩이였나 보던데, 고 부장이 뭔가 수를 쓸 테니까 얌전히 기다려. 괜히 들쑤시다 탈 나지 말고.”
“나 그 새끼가 내 앞에 무릎 꿇고 비는 꼴을 꼭 봐야겠어.”
엿을 먹인 것보다는 제게 모욕감을 준 놈의 낯짝이 떠올라 또다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뭐, 매력이 없어? 끌리지 않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려 황유라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떻게 하면 그놈의 높은 콧대를 꺾고 제 발아래 둘 수 있을까.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나저나 채 팀장은 요즘 뭐 하고 있어? 통 보이질 않던데.”
“바빠. 기자들 만나고, 그 배우 놈 뒷수습한다고.”
“그만둔다 했다며?”
“아! 오빠! 안 그래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오빠까지 그 얘기야?”
황유라가 하루가 멀다고 사고를 치고 다니니,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들 만도 했다.
“그래도 주인을 무는 개가 되면 안 되지.”
황유찬이 혀를 끌끌 차자 황유라가 눈을 표독스럽게 치켜뜨며 짜증을 부렸다.
“요새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옛날에는 안 그러더니, 무슨 바람이 들었나. 돈이라면 환장하던 놈이 돈도 싫다 하고.”
채성민이 아예 제 일에서 손을 뗀 것은 아니지만, 하는 꼴이 영 시원찮아 보여 안 그래도 답답하던 차였다.
“오빠, 차라리 걔 부모한테 뭐를 하나 쥐여줄까 봐.”
“부모랑 완전 연을 끊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아예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지는 않더라.”
“뭐가 됐든 잘 구슬려서 목줄 꽉 잡고 있어. 여러모로 쓸모 있는 놈이니까.”
황유라에게도, 황유찬에게도, 채성민만큼 자신들의 뒤처리를 깔끔하게 해주는 놈이 없었다.
머리도 좋고, 눈치도 빠르다. 더군다나 호감형으로 생겨 어디든 데리고 다니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래서 되도록 오래오래 옆에 두고 부려 먹을 생각이었다.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대답하자, 문틈 사이로 하얀 얼굴이 쏙 모습을 드러냈다.
“퇴근 안 해요?”
“아-. 벌써 퇴근 시간인가?”
강현이 안경을 벗어 보고 있던 서류 위로 툭 내려놓았다.
검지로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마사지를 해봤지만, 피곤한 기색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그런 강현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세나가 쭐레쭐레 걸어들어와 그의 옆에 우뚝 섰다.
“선배, 잠깐만요.”
그녀는 강현이 앉은 소파의 어깨 부분을 잡아 빙그르 제 쪽을 보게 만들었다.
앉은 상태로 그녀를 올려다본 강현의 눈동자에 의아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세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싱긋 웃었다. 그리고 강현의 허벅지 위에 옆으로 앉았다.
두 팔을 그의 목에 두르고 쇄골에 머리를 기댔다.
“피곤해 보여서, 안아주려고요.”
“귀엽게 구네.”
“언제는 안아달라면서요.”
강현은 피식, 바람이 새는 웃음을 흘리며 한쪽 팔로 든든히 그녀의 허리를 받쳤다.
앉은 자세가 불편할까, 다리를 조금 넓게 벌려 추어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많이 피곤해요?”
“오늘따라 더 피곤하네. 비가 와서 그런가.”
무게만큼 뒤로 넘어간 리클라이너 의자에 몸을 깊게 묻은 강현이 세나를 더욱 품으로 끌어당겼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서늘한 방 안, 안온한 온기가 피부로 스며들었다.
단단한 가슴이 부풀었다 꺼졌다. 그 리듬에 맞춰 고른 숨을 쉬던 세나가 노곤하게 풀어진 목소리를 냈다.
“나는 비 오는 날 좋더라.”
“왜?”
“몰라요. 물방울이 맺힌 창밖을 구경하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더라고요. 우리 언제 제주도 가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비자림 숲에서 산책하게.”
헤드에 고개를 젖히고 있던 강현이 몸을 살짝 일으켜 그녀를 보았다.
발긋하게 물오른 뺨을 하고 생각만으로도 즐겁다는 듯 세나가 생글생글 웃었다.
“언제?”
“응?”
“내일 갈까?”
“내일 어떻게 가요.”
“제주도면 비행기 타고 금방이잖아?”
“말이 되는 소릴 해요. 주말도 아니고. 저거 봐, 스케줄러만 봐도 숨 막힐 정도로 빡빡하면서.”
세나가 테이블 한쪽에 놓인 달력을 가리켰다.
빼곡하게 들어찬 깨알 같은 글자와 시간 단위로 나뉜 숫자들. 형광펜으로 체크돼 있는 것도 여러 개고, 중요한 미팅엔 별까지 처져있었다.
“네가 가고 싶다면 가야지.”
“저 많은 스케줄을 다 때려치우고 제주도를 가겠다고요? 농담이지만, 상상만으로 소름이네요. 장 실장님한테 무슨 소릴 들으려고요?”
“저 스케줄 다 소화하면 올해 안엔 제주도는커녕 휴가도 못 가.”
“여름휴가 못 가요? 나 선배랑 휴가 같이 가려고 날짜 상의하려고 했는데?”
“없애버리면 돼. 휴가 언제 갈까?”
질문에는 답을 않고 강현을 빤히 쳐다보던 세나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풋……!”
“왜 웃어? 나름 진지한데.”
“갑자기 너무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녀의 생각을 알 길이 없는 강현은 눈썹만 들썩였다.
세나는 또 그걸 보며 깔깔 웃었다.
“옛날에 선배만 보면 뒷걸음질 치고, 움츠러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 그때 왜 그랬지? 이렇게 귀여운데.”
“귀엽다고? 내가?”
“어이없죠? 선배가 귀엽다고 느끼게 될 줄이야.”
“…….”
“언제나 멋있는 사람인데. 근데 가끔 난 이런 모습 좋아, 귀여운 거.”
“네가 좋다고 하니 넘어가겠는데, 별로 와닿진 않는군.”
“까칠하고, 냉정하고, 매사에 계획적으로 사는 남자가 나 때문에 일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같이 놀자고 눈을 반짝이는데, 그게 어떻게 안 귀여워요? 귀엽지.”
“그러다 진짜 다 그만두고 집에 눌러앉아 매일 놀아달라 하는 수가 있어.”
“난 그것도 좋아. 돈은 내가 벌면 되니까. 그럼 선배는 집에서 살림할래요? 요리도 잘하고, 정리 정돈도 잘하니까.”
곤히 자고 있는 그녀를 깨워 아침밥을 먹이고, 출근길을 배웅하며, 저녁에 함께 식탁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하루 일과를 공유하는 일상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삶.
그게 기세나라면 더더욱.
“용돈은 줄 거지?”
“그럼요. 원하는 만큼 드려야죠. 몸값 비싼 남자를 집에 들어 앉히는데.”
강현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다며 픽, 웃었다.
“아, 맞다!”
그녀에겐 퇴근길, 강현의 집무실을 찾아온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