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인향만리(人香萬里) (108/120)


108화. 인향만리(人香萬里)
2022.07.12.


경찰서의 계단을 내려가는 길, 강현이 세나 옆에 나란히 섰다.


“여긴 어떻게 왔어?”

“장 실장님이 알려주셨어요.”

“그랬군.”

“왜 저한테 먼저 전화 안 했어요? 제가 선배의 대리인이잖아요.”

사실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가 저를 데리러 올 줄은.

강현이 검지로 눈썹을 들추며 이맛살을 긁적였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어. 어차피 구속영장이 나오지 않을 테니, 이 기회에 머리 좀 식혀볼까 싶었지.”

“시간 낭비를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이 여기까지 순순히 따라온 거예요?”

“내가 언제 범죄자 취급을 받아보겠어? 극진히 모시던데? 양쪽에 보디가드도 배치해주고.”

아, 수갑도 채워줄 줄 알았는데……. 하며 짓궂은 표정으로 웃기까지 했다.

세나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큰 한숨을 토했다.


“선배는 알면 알수록 궁금해지네요. 경찰서에 붙잡혀 갔다는 소리 듣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줄 알았는데……. 손이 다 달달 떨렸다니까요.”

“그런 것치곤 잘하던데? 멋있었어. 새삼 다시 반할 만큼.”

“치. 말로만.”

“일은 어쩌고 왔어?”

“미뤘어요. 선배가 먼저라서. 어차피 선배 여기다 두고 일이 손에 잡혔겠어요?”

차가 오가는 주차장 한복판만 아니라면 힘껏 안아 줄 텐데. 보는 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래서 지금은 그저 그녀의 작은 머리통을 가볍게 쓰다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세나.”

“왜요?”

삐쭉 입술을 내밀고 있으면서도 싫지는 않은지 기분이 좋은 표정이었다.


“사랑해.”

웃는 게 예뻐서.

툴툴거리는 게 예뻐서.

열 일 제쳐두고 날 데리러 와준 게 너무 예뻐서.

뭐 하나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어서.

이 말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가슴이 갑갑해졌다.

참 마법 같은 단어였다. 지금 제가 느끼고 있는 기분을 표현할 수 있으면서, 받아들이는 상대의 마음까지 단박에 느낄 수 있는.


“헐…….”

처음 건네는 말도 아닌데, 늘 언제나 처음 듣는 말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얼음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10초도 걸리지 않아 사르륵, 녹아내린 그녀의 얼굴은 새빨간 사과처럼 어여쁜 색으로 물들어버렸다.


“영혼도 없이 아무 때나 그런 말 하지 마요!”

“누가 영혼이 없대?”

바지춤에 찔러 넣은 손끝이 간질거렸다. 톡 하면 터질 것 같은 세나의 뺨을 찔러보고 싶었다.

그러나 강현은 몸을 돌려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사랑스러운 그녀는 한번 건들면 쉽게 손을 뗄 수 없으니까.


“그게 그렇게 쉽게 막 내뱉고 그럴 말이 아니잖아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외침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몇 걸음 멀어진 강현이 다시 몸을 돌렸다. 세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서 있었다.

강현이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가 내리며 입매를 길게 늘어트렸다.


“이 말 말고는 표현할 말이 없어서 그래. 수십 번, 수백 번 생각하고 뱉는 거야.”

“그럼 나는 수천 번, 수만 번 생각하고 뱉을 거예요!”

“그래. 기다릴게. 언젠가 대답해줘.”

“류강현 진짜 짜증 나!”

아스팔트 바닥에 발을 콱, 찍듯이 구른 세나가 도도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차 문을 열었다.


“언제까지 여유롭게 굴 수 있을 거라 자만하지 마요.”

운전석에 올라타기 전 앞서 수사관을 제압했던 목소리로 나직하게 경고하자,


“누구 변호사님의 말씀인데, 명심할게.”

강현이 고개까지 까닥이며 겸손의 자세를 취했다.

차에 올라탄 세나가 시트벨트를 매며 센터패시아의 시간을 확인했다.


“두부 먹으러 갈래요?”

“검찰청 근처에 두부전골 잘하는 집 있어.”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는데, 강현이 씩 웃으며 그녀의 장난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강현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장철호가 인사 대신 우스갯소리를 건넸다.


“아까 심은 콩에 싹도 안 텄는데, 벌써 나오셨어요?”

아침부터 사무실이 아닌 경찰서로 출근한 강현을 일 원 반 푼어치도 걱정하지 않는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 콩으로 뭐 하려고요?”

강현은 방 안으로 걸어들어와 집무실 테이블에 브리프 케이스를 올려두며 물었다.


“잘 키워서 두부나 만들려고 했죠. 류 변호사님 출소하면 한 모 건네게.”

“장 실장님이 손수 만든 두부를 먹지 못해 아쉽네요.”

강현 또한 일 원 반 푼어치 아쉬워하지 않았다.

장철호는 골무를 낀 엄지를 부지런히 놀리며 껄껄 웃었다.


“오전 중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케이스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회의용 테이블에 앉은 장철호는 강현이 돌아오면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정리 중이었다.

켜켜이 쌓인 문서 탑 속에서 몇 건의 파일들을 척척 골라내는 모양새가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오전 일정은 오후로 미뤘습니다. 보자, 두 시간 정도 여유 있겠네요. 일단 이것부터 확인하시고, N 기업 특허권 침해 소송은 내일 재판 갔다 오는 대로 미팅하는 걸로 스케줄 다시 잡아놨습니다.”

자칫 이틀 내리 경찰서에 붙들려 있었으면 어쩔 뻔했냐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사건 수임 의뢰가 들어왔는데, 류 변호사님이 직접 맡을 필요가 없는 일이라, 다른 변호사님께 연계해드릴까 하는데.”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강현은 어떤 사건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장철호가 주인 없는 강현의 집무실에 유일하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인만큼 일 처리 면에서 무한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철호가 뽑아둔 파일을 빠르게 훑은 강현이 공란에 서명한 뒤 그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아,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강현이 중요한 서류들을 모아두는 금고로 저벅저벅 걸어가 안에서 두툼한 회색 봉투를 꺼내 들었다.


“이거. 전 법무부 장관께 발송해주세요. 퀵으로.”

봉투 안에 든 내용물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장철호가 쥐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오늘 일로 열 제대로 받으셨나 봅니다?”

“공연히 시간 끌 거 뭐 있습니까. 때릴 수 있을 때 세게 때려야지.”

황유라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여론이 술렁이고 있는 이때가 적기였다.

강현은 불난 집에 어설픈 부채질 말고, 활활 타오를 수 있을 기름을 뿌려줄 심산이었다.

***

같은 시각.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던 세나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가 다 식어가는 동안 조금도 줄지 않았다.


“하아……. 진짜 이럴 거야…….”

혼잣말을 중얼중얼, 오전에 날아든 전보를 이제야 확인한 세나의 속이 시끌시끌했다.

인사팀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들은 가사전담팀 팀원들은 축하의 말을 건넸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겨울이나 내년 초쯤을 기약했던 파트너 변호사 후보 자리에, 세나의 이름이 떡 하니 올라간 것은 순전히 기장수 대표의 변심 때문이었다.


“그렇게 원하던 파트너 변호사였는데……. 이렇게 달갑지 않을 수 있다니, 나도 참 콩깍지가 단단히 쓰였네.”

그리고 이걸 받고 강현과의 관계를 정리하라는 무언의 압박.


“인사드린 지 얼마나 됐다고……. 성격 한번 불같네.”

그러나 기장수 대표가 하나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기장수와 기세나는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다.


“그러게, 달라고 할 때 줬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잖아? 수가 뻔히 보이게 뭐 하는 거야. 모양 빠지게.”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세나는 들고 있던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했다.


“립스틱 색 좋고, 표정 좋고. 내 마음도 확실하고.”

그러고는 허공에 콧방귀를 흥, 갈긴 뒤 세나가 대표실을 찾았다.

대표실 앞, 데스크엔 언제나 그렇듯 김정한 비서가 있었다.


“안에 계시죠?”

“…….”

김정한은 대답 대신 세나를 빤히 응시했다. 마치 그녀의 기분을 살피듯.

안경 너머 예리한 레이더가 얼마 지나지 않아 결괏값을 도출했다.


‘기운이 몹시도 사나우니 피할 수 있다면 피하라.’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 세나가 먼저 운을 떼었다.


“왜요? 제가 찾아오면 무조건 방문 거절하라고 하셨어요?”

“원하는 대답을 가져올 때까지 만남에 응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만-.”

김정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요즘 통 기운이 없어, 기 변호사님을 막을 힘이 없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는 주먹을 가볍게 말아 입가를 가리고 콜록콜록, 마른기침했다. 그러나 멀끔한 얼굴은 전혀 아픈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방 주인은 알려나 모르겠네요. 자기 최고의 적이 바로 김 비서님이라는 거.”

세나가 못 말린다며 콧잔등을 찡긋거리자, 김정한이 슬쩍 한쪽 눈을 감았다 떴다.


“차는 당연히 필요 없겠죠?”

“두말하면 입 아프죠. 김 비서님은 저 대신 제 방 소파에서 편안하게 티 타임을 가지시면 될 것 같네요. 얼마 전 향 좋은 홍차를 사뒀거든요.”

“저를 생각해주시는 사람은 역시 기세나 변호사님밖에 없네요.”

“이 정도쯤이야. 김 비서님이랑 저랑 지내 온 세월이 얼만데.”

“그럼 저는 지금부터 딱 30분 정도 자리를 비울 예정입니다.”

그가 능청스럽게 대꾸한 뒤 대표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에서 방문을 허락하는 대답이 들려오자 김정한 비서는 비스듬하게 올라선 입매를 갈무리하며 돌아섰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확인한 기장수의 낯빛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딸의 태도로 보아 쉽지 않은 언쟁이 오가리란 직감이 들었다.


“앉거라.”

기장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의 상석 자리로 가 앉았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세나가 대표실 방 안을 쓱 한번 둘러보았다.

오래된 법전부터 국내 시중에 나와 있는 법과 관련된 많은 책이 꽉꽉 들어찬 책장을 지나, 장식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감사패와 공로상 트로피들.

국내 10대 로펌이 될 때까지 K 법무법인의 지나온 과정들이 모두 녹아있었다.

세나는 돈만을 쫓지 않고 사회적 사업에도 기여도가 높은 K 로펌에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제가 K 로펌에 둥지를 튼 지 7년이 넘었네요. 그동안 산전수전 공중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일이 있었는데,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화부터 버럭 낼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세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동안의 고충을 토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들도 많았고, 보람도 느꼈어요. 저는 제가 변호사가 된 걸 후회하지 않아요.”

수많은 사례를 접하며, 그들을 대변하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

이혼을 원하는 의뢰인들이 저를 찾아와 하소연하면서 울었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며 웃었다.

이 일이 좋았다.

남에게 인정받고픈 욕구가 높은 세나에겐 이 일만큼 제격인 일이 또 없었다.


“일 욕심도 있고,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도 크죠. 그건 아빠가 누구보다 잘 아실 거로 생각해요. 그러니 파트너 자리로 절 회유하려 하셨겠죠.”

“크흠. 회유가 아니라 네게 원래 주려고 했던 자리였다. 조금 이른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어영부영 주는 자리가 아니야.”

“알아요. 누구보다 그 자리에 제가 잘 어울린다는 거. 저만큼 K 로펌을 위하는 변호사가 어디 있는 줄 아세요?”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냐는 그녀의 반응에 기장수는 “어휴, 그럼 그렇지.” 하고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런데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던 세나의 시선이 기장수에게로 향했다.

자신이 K 로펌에서 지내 온 시간을 되뇌는 것을 멈춘 세나의 표정이 무척이나 초연해졌다.


“그게 꼭 K 로펌일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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