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 (107/120)


107화.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
2022.07.09.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벽을 둘러보던 강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피의자 심문할 때나 들어와 봤지, 취조를 당하려고 들어와 본 건 처음이네.”

짧은 소감을 읊조린 강현이 딱딱한 철제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내가 너도 똑같이 만들어 줄게.”

 
흰자위를 희번덕 치켜뜨고 길길이 날뛰던 황유라가 떠올랐다.


“머리를 쓰긴 썼는데, 잘못 썼네.”

강현은 서로 오는 길, 장철호 실장에게 전화로 간략하게 사유를 설명하며 당일에 잡혀 있던 회의와 미팅을 취소시켰다.

이다음으로 돌아갈 상황이 뻔히 눈앞에 그려졌다.

긴급체포 후, 48시간 안에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한다.

긴급체포의 사유도 불분명한데, 구속영장이 나올 리가 없었다.


“시간 낭비 한번 제대로 시켜주네.”

강현이 굳게 닫힌 철문을 일별한 뒤 눈을 감았다. 꼿꼿하게 세운 자세는 풀지 않았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바로 취조실로 직행, 들어온 지 삼십 분이나 지났는데도 그를 조사하겠다는 인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조사는 아주 천천히 진행될 것이다.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못할 시에는 피의자를 즉시 석방해야 하니까.


‘쇼하고 싶으면 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을 데려와 쇼를 하든가……. 피차 서로 피곤하게 기 싸움이나 하고 앉아있을 텐데. 쯧.’

시간이 얼마간 흐르고, 기다림이 지루해져 갈 무렵 철문이 삐걱 열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긴급체포서를 작성하느라.”

수사관은 노트북 하나 덜렁 들고 와 강현의 앞자리에 앉았다.

깔끔한 차림의 강현과는 분위기가 대조적이었다.

며칠은 꼬박 경찰서에서 지낸 것처럼 꼬질꼬질한 몰골로 보건대, 그나마 짬밥이 되는 모양인지 강현을 힐끔대는 시선이 시큰둥했다.


“한때 검찰이었던 양반이 약물에 손을 댔다, 라.”

“…….”

“팽당해서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나 봅니다?”

“…….”

“검찰이나 경찰이나 다 거기서 거기지. 폐쇄적이고, 권위적이고. 그 마음 이해가 안 가는 거 아닌데, 그래도 그렇지. 이 바닥에서 약쟁이들 말로를 수두룩하게 봤을 거 같은데……. 하필 불법 약물이라니, 급 떨어지게.”

수사관은 혀를 끌끌 차며 타닥타닥, 취조실이 크게 울리도록 힘을 줘 키패드를 두드렸다.


“그날 거긴 왜 간 겁니까?”

그날. 거기.

강현은 날짜도, 장소도,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두루뭉술 질문을 던진 상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풍기는 뉘앙스로 육하원칙에 딱 부합하는 한 여자가 있었다.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가요? 아니면 그날 우연히 만난 겁니까?”

“…….”

“그것도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갔나? 같이 하자고 분위기를 조장했습니까?”

강현이 어디 더 해보라는 태도로 눈만 느리게 감았다 떴다.


“류강현 씨. 그렇게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어 봐야 소용없습니다. 이미 증거가 나왔어요. 판매책 장부에 떡 하니 당신 이름이 적혀있었단 말입니다.”

“판매책 장부라…….”

사본 적도, 해본 적도 없는 약물인데 장부에 자신의 이름이 있을 리가.

강현은 실소를 머금었다.


“당신이 약물을 투약하는 걸 봤다는 증인도 있습니다!”

장부도, 증인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일이었다.


“서로 힘 빼지 말고 말씀하세요. 그럼, 정상참작으로 단순 투약 혐의만 적용될 수 있으니까.”

강현은 등받이에 등을 바로 세움과 동시에 팔짱을 풀었다. 곧이어 차가운 철제책상 표면 위를 팔뚝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의 상체가 기울어진 만큼 수사관과 한 뼘 가까워졌다.

어두컴컴한 방 안, 서로를 노려보는 견제의 시선이 불꽃을 튀겼다.

머리맡에 달린 노란 전등이 스포트라이트처럼 책상을 비추었다.

소리도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피의자에게 압박감을 주기 위해 조성된 취조실의 분위기가 본래의 목적지를 잃고 다른 이를 향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툭, 하고 끊어지기 직전, 수사관이 먼저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큼큼…….”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은 압박감을 떨치려 수사관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강현은 책상에 기댄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수사관과 피의자의 입장이 뒤바뀐 모양새였다.


“…….”

조서를 쓰기 위해 열어둔 파일엔 단어가 되지 못한 모음과 자음들이 찍혔다.


“뭘 그렇게 열심히 쓰십니까?”

상대를 향한 첫마디였다. 수사관의 어깨가 움찔 떨렸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취조실의 공기보다 더 차가운 코웃음이 강현의 코끝에서 터졌다.


“물어본 것에 대답해준 것도 없는데. 거기 적어 넣을 말이 뭐가 있다고.”

“…….”

“하긴. 검사실로 올라온 조서들 보면 기가 찰 내용들이 많던데. 개연성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내용부터 범행동기 파악하는 수준들이 막장 드라마 저리 가라던데.”

강현의 속을 긁으려 지껄여대던 조롱이 본인에게 되돌아오자, 남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색을 달리했다.


“시나리오라도 한 편 쓸 요량인가?”

“이봐요! 류강현 씨!”

책상을 ‘쾅!’ 내려찍는 주먹에도 강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당신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아직도 본인이 검사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피의자 신분으로 긴급체포돼서 여기 있는 겁니다! 그래도 사회적인 체면을 생각해 대우 좀 해줬더니, 사태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사태 파악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 해야지. 지금도 그럴싸한 작품 만들려고 짱구를 굴리시나 본데, 하나만 묻죠.”

아무런 표정이 없어 섬뜩하기까지 한 강현의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나를 긴급체포해 수사하라 지시한 게 중앙지검입니까?”

 

 
수사관은 표정을 읽히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맹수와도 같은 강현의 시선은 상대의 심리를 간단히도 읽어냈다.

확신에 찬 그의 어조에 수사관이 입을 턱, 다물었다.


“김일영 경감.”

이름을 불린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다 제 목에 걸린 공무원증을 확인하고 낮게 탄식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강현이 제일 먼저 파악한 것이 김일영이라는 상대의 이름이었다.

수사의 기본 중의 기본.

체포된 피의자에게 가장 먼저 밝혀야 하는 것이 본인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영은 어물쩍 넘어갔다.

이 뒤가 구린 일의 배후에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뭔가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취조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젊은 나이에 경감 자리에 올랐으면 경찰대학 출신이겠군요. 팀장? 반장?”

물음표를 따라 말꼬리가 올라갔지만, 대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었다.


“충고 하나 하겠는데, 이 판에 끼어봤자 좋은 꼴 못 볼 겁니다.”

“…….”

“마음에도 없는 정의 구현을 실현해볼까, 막 결심을 굳혔거든. 내가.”

때마침 문이 벌컥 열리며 바깥의 소란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들어오려는 자와 그를 막는 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실랑이였다.

강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 너머에 닿았다.


“제가 류강현 씨 변호산데, 지금 변호사 없이 심문하시는 거 불법인 거 몰라요?! 아실 만한 사람들이 왜들 이래요?”

이곳에서 듣기 생소한, 그러나 퍽 반가운 목소리였다.


“요즘 경찰은 법 공부 안 하나? 사람만 잡아두면 다예요?!”

문 앞을 막아선 경찰관을 향해 고양이처럼 치켜뜬 눈으로 엄포를 놓는 기세가 자못 등등했다.

그녀를 막을 명분이 없는 치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일제히 시선을 피했다.

그들을 보며 콧방귀로 응수한 기세나는 갈색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류강현 씨 법정대리인입니다. 지금부터 변호사 동의 없이 어떤 질문도 직접 하지 못할 테니 그런 줄 아세요.”

상황은 전혀 달랐지만, 느낌만큼은 실점을 이어가던 경기에 역전승을 노리고 등장한 구원 투수 같았다.

물론 득점을 내고 있는 쪽은 처음부터 류강현이었지만.

강현은 조금 전까지 살벌하게 뿜어내던 기운을 누그러트렸다.

모처럼 구원 투수가 등판하셨는데, 마운드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줘야지.


“누가 취조실에 아무나 들이래?!”

김일영이 밖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안 그래도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변호사라는 여자 때문에 기분이 확 더러워졌다.

세나는 백지나 다름없는 조서 화면을 일별한 뒤 김일영에게 제 명함을 내밀었다.


“K 법무법인의 기세나 변호사입니다. 경찰서로 오는 길 저희 법무법인 파. 트. 너. 변호사 류강현 씨를 긴급체포한 사유에 대해 간략하게 들었는데, 불법 약물 투약 혐의요?”

“오늘 새벽 본 서로 수사 명령이 떨어졌고, 투약 혐의 관련 증거가 명확해 긴급 체포했습니다.”

“그 명확한 증거가 뭔가요?”

“판매책의 거래장부에서 류강현 씨의 이름이 나왔고-.”

“불법 약물을 거래하는데, 실명으로 거래하는 머저리도 있어요? 더군다나 검사 출신인 변호사인데?”

묵직한 송구에 김일영이 낭패감을 지우며 다른 증거를 입에 올렸다.


“다수의 증인이 피의자가 약물을 투약하는 상황을 목격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아- 그러니까, 나름 사회적 지위가 있는 K 법무법인을 대표하는 류강현 변호사님께서,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천지 분간 못 하고 막 약물을 복용했다고 말씀하고 계신 거죠?”

이번에는 변화구였다. 그의 말을 인정하는 듯 보이다가도 타격을 때리려고 보니 바닥으로 쑥 꺼지는 변화구.

강현은 그런 세나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 정도로 사리 분별력이 없어지려면, 아마 지금도 약물 중독 증상을 보여야 맞는 말이겠죠?”

세나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김일영의 말을 조목조목 따져 물었다.


“증거라고 제시한 것들이 하나같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인데, 고작 그딴 걸로 긴급체포?? 어이가 없네.”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싶어 김일영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럼 간이 시약 검사는 했나요?”

“투약한 약물이 시약 검사 반응으로는 나오지 않는 약물인 레드-.”

너 말 한번 잘했다, 어디 본때를 보여주마.

그녀의 표정이 한층 까칠한 각을 세웠다.


“그래서 제가 가져왔어요.”

세나는 제 옆구리에 끼고 있던 케이스에서 하얀 종이 두 장을 꺼내 책상에 탁, 탁, 힘주어 내려놓았다.


“이게…….”

“한 장은 NFS에서 발급받은 류강현 씨 체내에 있는 약물 반응 검사 결과지고, 하나는 동부지검에서 이 서류를 인정한다는 증명서예요.”

김일영은 제 앞에 떡 하니 놓인 공식기관 증명서류를 망연자실한 얼굴로 읽어 내려갔다.


“공익제보자라 신분 노출을 꺼렸더니, 나라에서 이딴 대접을 하고 있네요. 직권남용으로 고소 고발당해볼래요?”

마지막 문장을 내뱉을 땐 어쩐지 기세나의 표정이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지간해서 직권남용죄를 묻기 어렵다지만, K 법무법인에서 마음먹고 김일영 경감님을 고발한다면 못 할 것도 없겠죠.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승진은커녕 경찰직 사수하기도 힘들겠네요.”

뻣뻣하게 목에 힘을 주고 있던 상대의 고개가 잘 익은 벼처럼 수그러졌다.

기세나의 무실점 완봉승이자, 김일영의 완벽한 패배였다.

세나가 콧대를 세우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강현을 보았다.

강현은 그런 그녀에게 엄지를 슬쩍 들어 보였다.

역시. 제 눈이 맞았다.

확실히 그녀는 이혼보다는 형사법률 대리인 쪽이 어울린다.


“그럼 류 변호사님, 이만 가실까요?”

더는 강현을 붙들고 있을 구실이 없어진 경찰은 그들이 나가는 길을 막지 않았다.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강현이 앉아있는 동안 태가 죽은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검, 경의 수사권 조정이 이뤄진 지가 언젠데, 이런 막무가내식 수사 관행에선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강현은 앞서 나가는 제 변호사의 뒷모습을 따라나서다 말고 다시 취조실 안으로 돌아왔다.

이대로 가면 서운할까, 실의에 빠진 김일영의 어깨 한쪽을 움켜잡았다.


“일선에 투입된 지 얼마 안 된 초짜도 아닌데, 서로 시간 낭비 그만하고. 위에 가서 내가 하는 말 토씨 하나 빼먹지 말고 전하세요.”

고개를 내린 강현은 김일영에게만 들리도록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만간 큰 선물 하나 보내드리겠다고.”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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