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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기혼자의 믿음직한 조언 (105/120)


105화. 기혼자의 믿음직한 조언
2022.07.02.



 
전 법무부 장관은 아들의 죽음을 묵인한 대가로 청문회를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7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아들의 죽음에 개입한 다른 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까요?”

장철호의 질문에 강현이 다른 자료를 눈앞으로 당겨왔다.

뉴욕 경찰의 초동조서에는 목격자의 진술이 있었다.

두 사람은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신이 약에 취해 잠이 들기 직전까지 별거 아닌 일로 말다툼했다고 적혀있었다.

그러나 재판부에 제출한 뉴욕 검찰의 자료엔 목격자 진술 부분이 누락 돼 있었다. 이유는 목격자 신원이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명은 죽어서 입을 열 수 없고, 한 명은 기억이 없어 입을 못 열고, 한 명은 입을 다물고 숨어버렸으니…….”

재판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페이지를 넘기자, 그 당시 피의자로 수사를 받았던 남자의 현 상황이 담겨있었다.


“심신미약에 과실치사로 병원에 수감 됐다, 보석으로 가석방됐군요.”

“이거, 죽은 놈만 아깝게 됐네요. 쯧……!”

“일단 여기 뭐가 들었는지 확인부터 하죠.”

강현이 노트북에 조사원이 보내온 USB를 꽂아 폴더를 열었다.

폴더 안에는 911에 걸려 온 최초 신고 전화 녹음파일과 NYPD의 보디캠으로 찍은 듯 보이는 영상파일이 담겨있었다.


“911 신고 기록이야 그렇다지만, 보디캠 영상은 어떻게 구했대? 와, 돈값을 하긴 하는군요. 아! 잠시만요!”

영상을 보던 중 장철호가 스페이스 바를 눌러 재생을 멈췄다.


“이거…….”

장철호가 긴가민가하며 화면 속 모서리 부근을 가리켰다.

이동 중에 찍힌 건지 멈춰진 영상은 그 형체가 흔들리고 일그러져 있었다.

강현은 스페이스 바를 눌러 다시 영상을 재생시킨 뒤 자판의 좌우키를 눌러가며 장철호가 가리킨 곳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황유라와 채성민이군요.”

어깨에 커다란 배스 타월을 걸친 채 땅만 보고 걸어가는 황유라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걸어가는 앳된 얼굴의 채성민의 찰나가 찍혀 있었다. 톡, 톡, 톡.

회의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띄엄띄엄 울리고, 관자놀이를 짚은 강현의 눈동자가 흥미로운 빛을 발했다.


“잘하면, 손 안 대고 코 풀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게 무슨?”

“일단 우리 쪽에서 가지고 있는 정보 하나를 언론에 흘립시다. 모 그룹 이사가 누군지. 박영재 검사가 일하기 수월하도록.”

근거도 없는 ‘카더라’ 식의 기사가 아닌, 특종처럼 시선을 확 끌 수 있는 것으로.

대형 신문사가 아닌, 중소형의 신문사라면 모처럼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테니.


“황유라의 만행이야 전 국민이 알고 있다지만, 범죄와 연관이 있다면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분노를 쉽게 잠재우기 힘들 겁니다.”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회의 테이블에 깔려있던 자료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자물쇠가 달린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흠…….”

“왜 그러십니까?”

“조금 찝찝해서요.”

“뭐가 말입니까?”

“아닙니다. 가시죠.”

의자에 걸어둔 재킷을 손에 들고 강현이 브리프 케이스를 챙겼다.

법원으로 가기 위해 집무실을 나오는 길, 복도에서 마주 걸어오는 사람들을 먼저 발견한 장철호가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기장수 대표와 김정한 비서였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장 실장님, 잘 지냈습니까? 얼굴 뵙기가 힘듭니다.”

“류 변호사님이 일이 많아서 저도 덩달아 바쁘네요.”

“한 식구가 된 지 꽤 됐는데 제대로 된 식사 한 번 못했네요.”

장철호와 기장수 대표가 악수를 하며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뒤쪽에 서 있던 강현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강현과 눈을 마주친 기장수가 멈칫대며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이내 고개만 끄떡여 인사를 받아준 뒤 지나던 발걸음을 놀려 대표실로 향했다.


“…….”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장철호가 기장수의 뒷모습을 한번, 강현의 표정을 한 번 살피곤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지난주에 인사 간다고 하시더니, 뭐가 잘 안됐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대표님 표정이…… 뭔가 마뜩잖아 보이시던데……. 아, 혹시 뭐 이런 건가요? 자네 같은 놈에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딸은 못 주네!”

그런 정확하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태도로 보건대 그런 듯 보였다.


“하긴. 류 변호사님은 겉으로 봤을 때 무뚝뚝-해서 좋은 남편감은 아니지요. 만 날 천 날 사무실에 처박혀서 일만 하는데, 대표일 때야 좋지, 딸의 남편이라고 생각하면 아버지로서는 조금 더 가정적인 남자가 좋겠지요.”

기장수 대표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는 어투로 그가 강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고는 계단을 앞서 내려가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제 앞에서처럼 기 변호사님이랑 꽁냥대는 거 보시면 그런 마음이 싹 사라지실 텐데.”

강현이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올려세웠다. 그게 무슨 뜻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두 분이 하는 거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아주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져서 제가 변호사 사무실이 아니라 양봉장에서 일하는 줄 착각할 뻔했잖습니까.”

설마 그 정도일까 싶어 강현이 눈썹 머리를 검지로 긁적이며 피식 웃었다.


“뭐 그래도 너무 기죽지는 마시죠. 원래 딸자식 가진 아버지의 마음이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사윗감으로 누가 와도 마음에 들 턱이 있나? 저도 만약 우리 ‘호빵이’가 딸이라면,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놈이 찾아와도 일단은 무조건 쌍심지 켜고 반대부터 할 거 같으니까.”

“근데 왜 태명이 ‘호빵’입니까?”

“아내가 갑자기 새벽에 벌떡 일어나더니 때아닌 호빵이 먹고 싶다 난리를 치는 바람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됐거든요. 태명은 촌스러울수록 아이가 건강하다는 거 아시죠?”

“그런가요?”

“기 변호사님이랑 결혼하시면 아이 낳으실 건가요?”

“글쎄요. 그런 쪽으로는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우스갯소리로 혼인신고부터 하자, 장난을 쳤지만, 강현은 기장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나와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사람 일이란 어찌 될지도 모르고. 혹시나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가족이 없는 저야 아무래도 좋다지만, 그녀에겐 기댈 수 있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살면서 꼭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암튼 두 분이 결혼을 한다는 가정 아래 선배로서 조언을 하자면.”

장철호는 대단한 비법을 알려주는 요리사처럼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해서 아내가 가장 서운할 때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 편인 줄 알았던 남편이 남의 편일 때. 또 하나는 임신했는데 남편이 무심할 때. 딱 요 두 개는 지금부터라도 마음속에 새겨두는 게 미래를 위해서 좋으실 겁니다.”

“유념하도록 하죠.”

장철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양쪽으로 문이 열렸다.

안에 타고 있던 인원이 내릴 수 있게 옆으로 잠시 물러서던 강현의 눈에 이효원과 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세나가 들어왔다.

강현은 본인 스스로가 의식할 새도 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이 잡혀 몸이 돌려 세워진 세나의 놀란 눈이 강현을 발견하자마자 스르륵, 고운 눈웃음으로 바뀌었다.


“…….”

“선배?”

흔한 인사말도 없이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는 강현이 이상해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살짝 짚어보았다.


“꼭 넋을 잃은 사람처럼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열은 없는데…….”

“어디 갔다 와?”

“가정 법원요. 아침부터 재판이 있었거든요.”

“어떻게 됐어?”

“말해 뭐해. 당연히 제가 이겼죠. 선배는요?”

“난 지금부터 시작. 첫 공판이야.”

“그럼, 제 기운을 넘겨줄게요.”

세나가 방긋 웃으며 강현의 이마에 올렸던 손을 활짝 펴 내밀었다.


“하이 파이브.”

강현은 옅은 웃음을 흘리며 세나의 손에 찰싹, 소리가 나도록 가볍게 맞부딪혔다.

손바닥에 피어오른 잠깐의 열기가 사라지기 전, 바지춤 안으로 얼른 찔러 넣었다.


“아쉽네. 점심 같이 못 먹어서.”

“이따 저녁 같이 먹으면 되죠.”

“그래.”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강현은 문이 닫힐 때까지 세나를 바라보았다. 문 너머의 그녀도 한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했다.

점심을 같이 못 먹어서 아쉬운 게 아니었다. 그건 그저 핑계였다.

주변에 사람들만 없었다면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제 품에 가두었을 텐데.

그리고 저 앙증맞은 입술을 맛보며 조금 있을 공판의 승리를 장담할 텐데.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머릿속을 맴돌아 강현은 주머니 속 손을 꾹 말아쥐었다.


“그렇게 좋습니까?”

엘리베이터 안에 둘만 남게 되자, 장철호가 강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능글맞은 눈초리를 날렸다.


“다들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제가 유별난 건지 확실하진 않지만, 좋네요.”

“원래 뭐든 처음이 다 유별난 거 아니겠습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네요.”

“기 대표님이 지금 류 변호사님 표정을 보셨어야 하는데……. CCTV 녹화본이라도 떼어다 드려야겠어요. 그럼 당장 결혼을 허락해 주실 텐데.”

“호빵이가 형수님을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제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가십니까?”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강현이 ‘네.’ 하고 짧게 대꾸했다.

동그란 눈이 초승달처럼 어여쁘게 휘어지고, 일 자를 그리던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릴 때.

강현은 첫눈에 반한 것처럼 심장이 아찔하게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만약 우리가 결혼해 아이가 생긴다면, 그녀를 닮은 딸이 좋겠다.

이 아찔한 설렘이 두 배가 되도록.


 

***

강현 쪽에서 흘린 사진 한 장으로 한물간 배우의 약물 사건은 각종 SNS에서 먼저 퍼지기 시작했다.

젊은 층을 기점으로 시작된 논란의 불씨가 힘을 받자, 모 그룹 이사에 대한 추측성 게시물들이 연이어 올라왔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의 침묵은 무의미했다.

그동안 각종 포털을 장식했던 황유라의 행각들이 다시 한번 상기되며, 잠잠하던 언론을 향한 비난이 장맛비처럼 거세게 쏟아졌다.

그리고 오늘. 박영재 검사로부터 참고인 신분이었던 황유라가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황유라를 기소할 수 있을까요?”

함께 뉴스를 시청하던 세나가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소는 하겠지. 보는 눈이 많아졌으니까. 다만, 여론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기소 유예가 떨어질지도 모르고.”

“마약 범죄는 구속 수사가 원칙 아니었어요?”

“불구속 수사를 조건으로 조사에 임한다고 하더군.”

“재수 없어. 재벌이건 자시건 범죄자 주제에 자기가 뭐라고.”

모 그룹 이사가 황유라인 것이 밝혀지자마자 대호 그룹의 주가가 요동쳤다.

모르쇠로 일관하던 대호 그룹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의식, 만약 범죄 혐의가 입증되면 대호 그룹 내 황유라의 이사 지위를 박탈하고, 제대로 죗값을 치르겠다는 둥 입장문을 발표했다.

퍽이나.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공수표나 다름없다.


“지금이야 여론의 눈치를 보며 성실히 검찰 조사에 임하겠다, 급한 불을 끄는 시늉을 하는 거겠지. 막상 조사에 들어가면 진술 거부권을 쓸 게 뻔해.”

“변호인단에 채성민 선배도 있을까요?”

“아마도. 왜?”

“그냥요……. 조금 마음이 쓰여서…….”

세나의 대답에 강현의 잘생긴 얼굴이 단박에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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