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후안무치(厚顔無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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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후안무치(厚顔無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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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후안무치(厚顔無恥)
2022.06.28.
기다란 손가락이 좌우 위아래로 움직이며 태블릿PC 화면을 터치, 눈에 들어오는 기사가 많아질수록 강현의 입매가 비스듬히 올라섰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불법 약물 유통 및 투약 혐의, K 배우 검거. 또?]
[마약 혐의, K 배우의 주변인들 수사 시작]
[K 배우와 모 그룹 이사의 은밀한 거래?]
[신종약물 ‘레드 릴리’ K 배우가 ‘상선(마약 공급책)’인가?]
[검찰, 상선 거래장부 일부 확보, 다음은 누구?]
월요일 아침부터 K 배우의 마약 관련 기사가 삽시간에 포털을 장악했다.
개중에 모 그룹 관련 기사가 몇 건 올라왔지만, 실시간으로 삭제되고 있었다.
“일 잘하네. 채성민.”
공중파 방송이나 유명 매체의 경우 엠바고를 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요즘 세상에 인터넷 뉴스 매체가 한두 곳도 아니고.
특정인을 지목할 수 있는 기사가 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전화통을 붙들고 있다는 소리였다.
“일단 이걸로 시간은 좀 벌었네요.”
사건이 커지면 커질수록 실적과 연결되는 시스템이니, 대검이 아닌 이상 다른 지검에서 사건을 넘기라고 압박을 넣어도 동부지검에서 자체 수사팀이 꾸려지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변호사가 다녀간 이후로 그 배우 놈이 도로 입을 다물었답니다.”
“뻔한 거 아닙니까? 원하는 만큼 돈을 쥐여 줄 테니 혼자 뒤집어쓰든가, 아님, 협박을 했다거나.”
“그래봤자 아무 소용 없을 텐데 말이죠.”
장철호가 혀를 끌끌 찼다.
“검찰 쪽에서 정보를 흘려줬을 테니, 모 그룹 이사가 누구인지 밝혀지는 건 시간 문제고, 우리는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네요.”
“슬슬 누군가의 똥줄이 타겠네요.”
그가 말하는 누군가는 대호 그룹과 스폰 관계인 고상한이었다.
“박영재 검사가 배신하진 않겠죠?”
“글쎄요. 사람 속이란 알 수 없는 거니까요. 배신할 땐 하더라도 실검에 ‘황유라’라는 이름은 찍히게 만들고 배신했으면 좋겠네요.”
그때, 복도를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에 류강현과 장철호의 고개가 집무실 문을 향했다.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뭡니까? 여기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장철호가 얼른 문 앞으로 가 방문객의 출입을 저지했지만, 상대는 아랑곳없이 집무실 안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변호사라더니 진짜였네? 그것도 유명한 로펌의?”
불쾌한 언사의 방문객이 새까만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으로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끌어 올리자,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황유라 씨가 K 로펌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집무실 안을 휙 둘러본 황유라가 소파로 또각또각 걸어가 상석 자리에 턱, 앉았다.
기다란 다리를 꼬아 요란한 발걸음 소리를 내었던 하이힐을 까닥였다.
허락도 없이 쳐들어온 것도 모자라 오만방자한 행실에 장철호의 낯이 절로 확 찌푸려졌다.
소문으로만 들었지, 실제 저 꼴을 보고 있으려니 부아가 치밀었다.
“이봐요-.”
“장 실장님, 괜찮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죠. 이만 나가보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그럼 ‘30분 뒤’ 일정 확인차 다시 오겠습니다.”
장철호는 일부러 30분이란 시간을 강조해 말한 뒤 집무실을 나섰다.
집무실 문이 여닫히고, 창 너머로 복도를 걸어 나가는 장철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황유라도, 강현도 말이 없었다.
“류강현…….”
짧게 강현의 이름을 읊조린 그녀가 실소를 흘렸다.
“류강현, 류강현이라. 그러고 보니 그날 이름을 안 물어봤더라고. 물어봤더라면 시간 낭비 안 했을 텐데.”
“이름을 확인하러 여기까지 찾아왔습니까?”
“아니, 이름이 뭐가 중요해? 그리고 언제부터 존댓말 했다고. 어색하니까 집어치워.”
안 그래도 무뢰한에 대한 예의는 여기까지만 차리려고 했었다.
“그럼, 여기까진 왜 왔지?”
“우리 측에서 법무팀 팀장 자리를 제안했는데, 대차게 깠다며? 그 얘기 하러 왔어. 조건이 뭐야? 어떻게 하면 우리 회사에서 일할 건데?”
“그쪽 법무팀장 자리에 이미 누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것도 내가 아주 잘 아는.”
“맞다. 두 사람 친구 사이랬지?”
황유라는 뻔히 알고 찾아왔음에도 이제야 기억난 척 능청을 떨었다.
“요즘 어디 나사가 하나 빠졌나, 일 처리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바꿀 때가 됐지.”
“그만큼 일할 사람 구하기 힘들 텐데, 뭐 잘 찾아보면 어딘가엔 또 있겠지.”
“그게 싫으면 내 개인 변호사는 어때?”
개소리도 정성껏 하면 말이 된다고 배웠나.
이쯤 하니 황유라를 상대하고 있기 슬슬 지겨웠다.
“할 말이 그거였다면 이만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보다시피 시간이 없어서.”
“원하는 게 뭐야?”
“그쪽이 내가 원하는 걸 갖고 있을 리가 없지.”
강현의 입술 끝에서 새어 나온 비소에 황유라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발걸음이 강현이 앉아있는 집무실 테이블 쪽을 향했다.
“너지?”
“뭐가?”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은 그녀가 상체를 깊게 숙였다. V자로 깊게 팬 앞섶 사이로 육감적인 라인이 훤히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현의 시선은 줄곧 제 손에 들린 태블릿PC에 꽂혀있었다.
황유라는 독기가 가득한 눈동자로 강현을 노려보았다.
“네가 검찰에다 찌른 거잖아.”
황유라가 이 방에 들어 온 이래 처음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밖에 없어.”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데?”
“나한테 접근한 진짜 이유가 뭐야?”
“머리가 아예 안 돌아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더 생각해봐. 내가 뭘 원하는지.”
강현이 손에 들린 태블릿PC를 책상 위로 탁 내려놓으며 황유라를 찬찬히 훑어내렸다.
“전에도 말했을 텐데.”
“…….”
“그런 쪽으로 영 매력이 없다고.”
강현이 혀를 끌, 차며 불쾌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뭘 믿고 자꾸 들이대는지는 모르겠는데, 치워. 거슬리니까.”
그때의 모욕을 또다시 상기시키자, 한껏 치켜뜬 눈매가 바들바들 떨렸다.
“야이, 개자식아! 네까짓 게 도대체 뭐라고 감히-.”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태블릿PC가 황유라의 손에 들려 허공으로 휙, 솟았다.
중요한 파일들이 담긴 PC가 망가지기 전 강현이 의자에서 일어나 황유라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봐. 황유라 씨. 채성민한테 내가 어떤 새끼인지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찾아왔나 본데, 좋게 말할 때 그만 꺼져.”
“이거 안 놔?!”
황유라는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와의 힘 차이에도, 바둥댈지언정 절대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너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까부니?”
“그러는 넌 뭘 믿고 이렇게 설치고 다녀?”
강현이 다른 손으로 태블릿을 뺏은 뒤, 제 다른 손에 붙들린 황유라의 손목을 팽개쳤다.
“하……! 이거 순 또라이 새끼 아냐?”
제 분에 못 이긴 황유라가 기어이 테이블 위에 놓인 강현의 명패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크리스털로 만든 명패가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내가 너도 똑같이 만들어 줄게.”
“…….”
“그때 가서 제발 살려달라고 빌지나 마.”
귀신처럼 쭉 찢어진 입꼬리가 퍽 자신만만해 보였다.
강현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몸을 홱 돌려세운 황유라는 문으로 걸어가는 동안 한쪽 벽면에 위치한 책장에서 책을 한 권씩, 한 권씩, 뽑아내 바닥으로 툭, 툭, 툭, 떨구며 지나쳤다.
“다음에 또 봐.”
그녀는 황유라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마지막까지 패악스럽게 굴며 사라졌다.
황유라가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철호가 다시 류강현의 집무실을 찾았다.
“성질머리 고약한 여자네요. 이러니 망나니 소리를 달고 다니는가 봅니다.”
그가 혀를 끌끌 차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책들을 집어 들었다. 구겨진 곳이 없는지 살핀 뒤 하나하나 제자리에 꽂아 넣으며 짧게 욕지기를 뱉었다.
“이런 짓거리들이 대호를 들쑤셔 달라 간청하는 꼴이란 걸 그 여자는 알까요?”
“명분을 자꾸만 만들어 주니 재밌네요.”
장철호는 강현의 책상 아래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곤 험상궂은 얼굴을 더욱 구겼다.
“업무방해죄에 손해배상 청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럴 거까지야. 곧 큰일을 치러야 할 텐데.”
명패야 다시 제작하는 데 1주일이면 충분하지만, 망가진 기업 이미지는 회복하는 데 수년의 시간도 모자랄 테니까.
“그보다 손에 든 건 뭡니까?”
“아이쿠. 이것 때문에 올라와 놓고선. 좀 전에 조사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입니다.”
장철호가 손에 들린 봉투를 강현에게 건넸다. 밀봉된 봉투가 생각보다 두툼했다.
“생각했던 것보단 빨리 왔네요.”
“돈을 그 정도로 받아먹었으면, 빨리빨리 토해내야죠.”
“장 실장님.”
“예.”
“무슨 일 있습니까?”
“무슨 일요?”
“요즘 들어 돈돈돈 하시는 게, 혹시 무슨 일 있는 게 아닐까 해서요. 제가 드리는 돈이 부족하시다면 말씀하세요.”
“아니. 뭐. 공무원 때보다는 훨씬 많이 받기는 하는데…….”
장 실장이 그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리며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아이참. 이거 낯부끄러워서 원.”
“뭡니까?”
“그, 허, 참.”
도대체 뭔데 저렇게 겸연쩍어하는지 강현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아내가 임신 중이거든요. 하하하. 8주랍니다.”
“아……. 축하합니다.”
“네, 뭐. 마흔이 넘어서 늦둥이라니, 이거 원 말하기도 쑥스럽고. 그런데 기분은 또 좋고 그럽니다. 이번엔 딸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들만 둘인 장철호는 아내를 닮은 딸이 태어났으면 좋겠다며, 싱글벙글 웃었다.
“아이 키우는 데 아무래도 돈이 많이 드니까, 벌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벌어두려고 하는데, 늦둥이까지 생기는 바람에 자꾸 돈 욕심이 나나 봅니다.”
“제가 그 부분을 생각 못 했네요.”
강현은 미혼인데다 아이를 키워본 적도 없으니, 장철호의 속사정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주변에 관심이 없는 편이라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더 신경을 썼을 텐데.
“그래도 K 로펌은 복지가 좋아서 한시름 놓았죠. 아이들 학비는 걱정 없으니까.”
“제가 더 부지런히 실적을 쌓아야겠네요. 장 실장님 보너스 많이 받으시려면.”
“지금도 충분합니다. 입덧이 심해서 고생 중이었는데 덕분에 아내가 일도 쉴 수 있게 돼서.”
장 실장은 강현에게 더 신경 쓸 거 없다며, 정 신경이 쓰이면 아이가 태어나면 비싼 유모차나 사달라 농담을 던졌다.
강현은 그러겠노라 웃으며 대꾸한 뒤,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는 새끼손가락만 한 USB와 몇 건의 서류가 들어있었다.
스테이플러가 박힌 모서리에 빨간색으로 별 세 개가 그려진 서류부터 빠르게 훑었다.
“…….”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을 때쯤 강현의 잇새로 헛숨이 터졌다.
“왜 그러십니까? 자료가 뭔가 이상한가요?”
강현의 예사롭지 않은 반응에 장철호의 눈빛도 덩달아 날카로워졌다.
두 사람은 자료를 들고 회의용 테이블로 이동해 마주 보고 앉았다.
뉴욕타임스에 난 기사와 그날로부터 1주일 후의 한국 신문은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달랐다.
[마약 파티, 한인 유학생 1명 사망, 1명 혼수상태.]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짤막한 전문이 다였다.
하루가 멀다고 벌어진 마약 사건인 데다, 그 피해자가 한국인이기에 크게 주목받지 못한 듯 보였다.
그러나 한국의 신문에서는 조금 다른 기사를 다루고 있었다.
[뉴욕의 한 호텔에서 유학생 1명 사망, 괴한에게 찔려. 피의자 중태]
“A 모 씨는 호텔에 난입한 괴한에게 칼에 찔려 그 자리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이 그 자리에서 범인을 체포했으나, 현재 의식이 없는 상태, 자세한 경위를 파악 중…….”
장철호는 기사를 따라 읽으며 각기 다른 신문 기사를 대조했다.
“뉴욕에서,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일어나 사건이고, 피의자와 피해자가 모두 한인 유학생이 될 확률이 얼마일 것 같습니까? 더군다나 만약 이 두 사건이 같은 사건인데, 보도 내용이 교묘하게 다르다면?”
한국 신문에서는 A 모 씨의 정체를 짧게 특정하고 있었다.
“그 당시 후보자 청문회 중이었으니 더더욱 사건의 전말을 파헤칠 수 없었겠죠.”
“허. 이게 사실이라면…….”
“그날 황유라가 죽인 사람이 장관의 아들이었을 확률은, 99.9%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