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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눈물 없는 신파 (103/120)


103화. 눈물 없는 신파
2022.06.25.



 
기장수를 따라 서재로 들어가는 강현의 모습이 조심스러워 보였다.

뭐 아는 것이 있냐는 윤모연의 물음에 들은 바가 없는 세나가 고개를 저었다.

삼십 분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서재의 문이 다시 열렸다.

거실에서 방문만 보고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문 너머로 향했다.

강현과 함께 나올 줄 알았던 기장수는 그가 먼저 나오고 난 뒤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강현이 소리가 나지 않게 서재 문을 닫자, 세나가 어리둥절한 눈을 하고 다가왔다.


“아버지는요? 안에서 무슨 얘길 나눈 거예요?”

“생각하실 게 있으시겠지.”

“무슨 생각요? 심각한 얘기였어요? 로펌 문제예요?”

강현이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는 대답을 대신했다.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강현은 거실로 걸어가 소파 등받이에 놓인 재킷을 한쪽 팔에 걸쳤다. 그러고는 윤모연을 향해 허리를 살짝 숙였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급변한 상황에 어리둥절한 건 세나만이 아니었다. 영문을 알 길이 없는 윤모연도 기세훈도 심상치 않은 반응에 표정을 굳혔다.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는 게-.”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때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거절하는 어투는 정중했으나, 말이 조금 이상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이라니.

세나는 강현을 따라 가방을 챙겨 들었다.


“같이 가요. 어차피 차도 한 차로 왔고.”

아버지랑 무슨 이야기를 나눴길래 서둘러 돌아가는 것인지, 차에 가서 들어 볼 심산이었다.


“세나, 너는 남거라.”

“아빠?”

“여보……!”

언제 나왔는지도 모르게 다가온 기장수가 세나를 불러세웠다.

강현이 나가던 몸을 돌려 기장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기장수는 난감한 기색을 억누르며 인사를 받아주었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에 숨이 막혔다. 꼭 잔칫집이 초상집이 된 것 같았다.


“이 분위기 뭐야, 진짜. 아빠, 내일 회사에서 이야기해요. 저도 가볼게요.”

“남으라고 했다.”

“왜요? 뭔데 이래요?”

“오늘은 대표님 말씀을 듣는 게 좋겠다. 내일 사무실에서 보자.”

“선배까지 왜 그래요?”

“갈게.”

강현은 세나의 어깨를 살며시 힘주어 잡으며 별거 아니라는 식의 미소를 보였다.

현관 앞까지 배웅을 나가는 윤모연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선 그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뭐야, 정말……. 이렇게 그냥 간다고?”

닫힌 현관문을 보던 세나가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여태껏 백년손님처럼 사위 대접을 해놓고 180도 돌변한 기장수의 태도가 몹시도 야박하게 느껴졌다.


“이럴 거면 집에 인사시키라는 말 왜 했어요? 그냥 밖에서 봤으면 됐잖아요.”

“…….”

기장수 또한 오늘 일이 이렇게 마무리가 될 줄 몰랐던 건 마찬가지였다.


“집에 인사 온다고 백화점까지 가서 이것저것 사 온 정성은 안 보여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눴길래 그렇게 야박하게 내쫓아요?!”

“내가 쫓은 거 아니고 류 변호사가 제 발로 나간 거지.”

“간다는 사람한테 조심해서 가라든가, 오늘 와줘서 고맙다거나, 그런 말도 못 해요?”

세나의 뾰족한 반응에 기장수는 발걸음을 돌리며 장탄식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세나, 너 잠깐 이리 들어와. 할 얘기가 있으니.”

기장수는 문을 열어둔 채 먼저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윤모연이 세나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도대체 갑자기 무슨 일이라니?”

만약에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강현의 물음이 떠올랐다.

설마.


“어머니. 어머니는 제가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제 편이 되어주셔야 해요.”

“그래. 언제나 그럴 거야. 아버지 기다리시겠다, 얼른 들어가 봐.”

서재로 들어온 세나의 모습은 꽤 비장했다. 그러나 기장수 또한 비장했다.

서로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한참을 입을 열지 않았다.

유전자를 나눠 가진 아빠와 딸의 기 싸움은 용호상박 저리가라였다.

허공에서 불꽃이 튈 정도로 서로를 탐색하다, 기장수가 먼저 운을 뗐다.


“넌 알고 있었어?”

“뭘요?”

“류강현 변호사 일 말이야.”

“그러니까 무슨 일이요?”

세나가 모르쇠로 일관하자 기장수가 소파의 팔걸이를 쿵, 내려쳤다.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는 말!”

기장수의 호통에 세나의 표정에 미세한 금이 갔다. 기장수는 제 딸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어미가 병환도 아니고, 스스로, 그렇게 떠났다는 것까지 정말 다 알고 있었어?!”

“그래서요?”

“그래서요? 왜 진작 말 안 했어?!”

저 사실만으로도 벙찌게 만드는데, 딸의 모습이 너무 태연자약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결국, 꾹꾹 삼켰던 화가 입 밖으로 터졌다.


“아비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그게 강현 선배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선배와 선배의 어머니는 엄연히 피해자예요. 그걸로 선배한테 뭐라 할 수 없어요.”

맞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제 딸이 저렇게 따박따박 맞는 말만 했다고.


“됐다. 긴말 안 할 테니, 없던 일로 해.”

“뭘 없던 일로 하자는 거예요?”

“계약서고 뭐고, 안 지켜도 되니까 없던 일로 하란 말이다.”

“아빠!!”

“가사전담팀도 그대로 유지하고, 네 자리도 그대로 유지해. 내년에 이사진들 설득해서 파트너 변호사로 올려 줄 테니 류강현 변호사랑은 헤어져라.”

세나의 표정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고개를 위로 젖혀 허탈함이 가득 담긴 숨을 뱉었다.


“와…….”

외마디 간투사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녀가 복잡한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내렸을 때, 그녀의 눈동자엔 아버지를 향한 실망만이 남아있었다.


“사람 그렇게 잘 본다는 기장수 대표님. 그것도 모르고 저한테 남편감이니, 차기 로펌 대표감이니 류강현 변호사 칭찬을 마르고 닳도록 하셨던 거 기억 안 나세요?”

“…….”

“그땐 강현 선배의 집안 내력에 대해서 몰랐었나 보죠?”

“부모가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니란 거 모르겠니? 그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느냐가 문제지.”

“그래서 류강현 변호사가 달라 보이세요?”

세나의 직언에 기장수가 낮게 침음했다.

류강현이 달라 보이냐는 딸의 물음에 확실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로펌의 수장으로서 류강현의 집안 내력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일 처리 방법이나, 주변을 통솔하는 능력이나 뭐 하나 흠잡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딸의 남편감으로서 묻는다면 말이 달라진다.


“어릴 적부터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어요. 엇나가도 수백 번 더 엇나갈 수 있었다고요.”

“…….”

“그런데 지금 보세요. 아버지 지원이며, 새어머니의 관심을 듬뿍 받고 자란 저보다 훨씬 단단한 사람이 됐어요.”

기장수는 세나의 항변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한 일 자로 입을 꾹 다물었다.

다물린 턱 끝이 파르르 떨렸다.


“씨도둑은 무시 못 한다는 말이 두려우세요?”

세나가 코웃음을 치며 조소를 흘렸다. 다소 격앙되었던 목소리가 써늘할 만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럼 저는요? 허구한 날 젊은 남자랑 바람피우다, 자기 딸이 죽든 말든 나 몰라라 했던 이연화 씨의 배에서 태어난 저는 어떻게 보이세요?”

“그건 경우가 달라!”

“뭐가 달라요? 아빠. 아빠는 강현 선배에게만 상처를 준 게 아니라, 제게도 상처를 준 거예요.”

세나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서재를 나가버렸다.

기장수는 이맛살을 구기며 침통에 젖은 신음을 나직이 흘려야 했다. 가슴에 꽂힌 비수에서 죄책감이 미어져 나왔다.

큰소리가 오가는 서재 앞에서 전전긍긍하던 윤모연은 문을 박차고 나와 거실을 가로지르는 세나의 뒤를 따라 종종걸음을 했다.


“이렇게 가려고? 아버지는 단지 네가 걱정돼서 그러신 거야.”

“어머니.”

“응?”

“어머니가 봤을 때도 강현 선배가 어딘가 부족해 보이세요?”

윤모연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가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나보다 훨씬 멋진 사람이란걸.”

“그래. 그럴 만한 사람이더라.”

“지금 아버지 가슴에 대못 하나 박혔을 거예요. 어머니가 잘 다독여주세요.”

세나는 씁쓸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선배는 어떤 심정으로 그 얘기를 아빠에게 했을까…….’

제 걱정에 그런 말을 한 아버지에게 못된 말을 뱉어버렸지만, 그 죄책감보다는 솔직히 강현이 더 신경 쓰였다.

행여나 제 아버지가 저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그에게 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앞섰다.

세나는 정원의 돌계단을 빠르게 내려와 대문을 열었다. 일단 강현에게 전화부터 걸 생각이었는데…….


“말 참 안 듣지. 기세나.”

이미 떠나고 없을 줄 알았던 강현이 자신의 차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었다.


“선배!”

세나는 어떤 말로 그를 위로해야 할지, 고민할 시간도 없이 그대로 달려가 강현의 품에 안겼다.

강현은 제 품에 와락 안겨드는 무게에도 흔들림 없이 마주 안아주었다.


“왜 아직 안 가고 여기 있었어요. 나 기다린 거예요?”

“왠지 네가 금방 나올 것 같아서.”

“안 나왔으면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다 집에 갔겠지.”

그가 고개를 내려 세나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제 허리에 감긴 두 팔이 가냘픈 모양새를 하고 있음에도 퍽 안정감이 들었다.


“이제 어떡할까?”

“확, 혼인신고부터 해버릴까 보다. 빼도 박도 못하게.”

“대책 없는 건 여전하네.”

“왜요? 나랑 결혼하기 싫어요?”

“우리 연애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알고 지낸 지는 십 년인데? 강산도 변한다는.”

“그렇게 따지고 드니 할 말이 없긴 하네.”

가볍게 주고받는 농담 속에도 진심이 있었기에, 애써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지금은 서로가 주고받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다, 여기며.

강현이 품에서 세나를 슬며시 떼어내며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의 검지가 세나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안 울었네.”

“울어야 했어요?”

“아니.”

강현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울지 않은 그녀가 더 그녀다워 기특했다.


“선배는요?”

세나가 강현을 따라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선배는 울었어요?”

“아니. 울 일은 아니지. 생각 없이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도 아니고.”

“그럼 됐네.”

“그래.”

강현이 제 뺨을 감싼 손을 끌어다 입을 맞췄다.

저를 바라보는 갈색 눈동자가 당당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표지판처럼 선명해 일말의 불안조차 가라앉는다.


“기세나.”

“네.”

“날 얼마큼 믿어?”

“선배가 날 믿는 만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요.”

“최고의 대답이네.”

세나가 뿌듯한 듯 활짝 웃었다. 컴컴한 밤에도 눈이 부실 만큼 어여쁜 미소였다.

강현은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기 전, 손을 뻗어 목덜미를 감쌌다.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내려 세나의 말캉한 입술을 머금었다.

교차하는 숨결에서 번지는 향은 날 선 기분을 단박에 가라앉힐 만큼 몽롱하고 아뜩했다.

입술을 떼어낸 후에도 잔향처럼 입안에 머물렀다.


“너랑 키스할 때면 술 한잔 마시지 않고서도 취하는 기분이 들어.”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강현은 세나의 아랫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럼 우리 오늘 저 샴페인 마셔버릴까요?”

“뭘 기념할 건데?”

“부모님의 반대로 불타올라버린 연인?”

“슬로건이 몹시 신파적이네.”

“별로?”

“그럴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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