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신데렐라 구하기
(10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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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신데렐라 구하기
2022.06.21.
안내받은 자리는 정희란 부사장과 한 테이블이 떨어진 자리였다.
세나는 상대 테이블에 놓인 꽃다발을 보고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
“응?”
“선배가 봤을 때 저 테이블 분위기 어때요?”
“확실히 이혼이라는 말이 오가는 사이 같지는 않아 보이네.”
“제가 볼 땐 결혼기념일을 축하는 듯 보이는데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뿐만 아니라, 마주 보며 다정히 웃는 모습과 샴페인 잔을 정답게 부딪치는 모습까지.
확실히 그들 사이에는 여느 다정한 부부처럼 서로를 향한 애정이 가득해 보였다.
“돔페리뇽이라니. 저 술 제가 진짜 좋아하는 술이거든요.”
“보통은 술보다 저 상자를 먼저 보지 않나?”
강현의 말에 시선을 다시 테이블 위로 떨구자, 꽃다발 옆에 놓인 하늘색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명품 주얼리로 유명한 브랜드의 로고가 박혀있었다. 크기로 보면 반지보다는 목걸이에 가까웠다.
“이혼할 사이에 주고받을 선물은 아니네요.”
“이혼이라는 게 본인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가족의 등쌀에 못 이겨서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지? 특히 저들의 스토리를 빗대어 본다면 말이야.”
집안의 반대를 이겨내고 남자 판 신데렐라라는 소리를 들으며 치러진 세기의 결혼.
이렇다 할 문제 없이 갑자기 시작된 이혼 소송.
친권과 양육권에 대한 합의는 진작에 끝이 났는데, 재산 분할에서만큼은 진전이 없는 상태.
왜일까.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까지 자꾸만 일을 늦추는 이유가.
이로써 맞지 않았던 퍼즐이 얼추 맞춰졌다.
“저 다녀올게요.”
머릿속을 떠돌던 생각을 한데 모아 정리를 마친 세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정희란 부사장님. 여기서 다 뵙네요. 해외 장기 출장 중이시다고 비서실에서 전해 들었는데.”
“기 변호사님?!”
자신의 테이블로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세나를 올려다본 여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실례 좀 해도 될까요?”
그녀가 상냥한 눈웃음을 걸치고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정희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할 얘기가 참 많아 보이는 상황이네요.”
조곤조곤한 말투와는 별개로 당돌한 기세에 할 말을 잃었던 두 사람의 고개가 목이 꺾인 꽃송이처럼 숙어졌다.
얘기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빈자리만 있을 뿐 강현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와인 셀러가 있는 곳에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선배 여기서 뭐 해요?”
“얘기는 잘 끝났어?”
“네. 차에 가서 이야기해요. 약속 시간이 너무 지체됐죠? 기다리시겠다.”
“기 대표님께 늦을 것 같다 미리 말씀드렸어.”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쪽에서 센스를 발휘한 강현에게 감탄을 하려는 찰나, 한 직원이 다가와 기다란 모양의 쇼핑백을 강현에게 건넸다.
“그건 뭐예요?”
“샴페인.”
“샴페인?? 선물이 그렇게 많은데 또 산 거예요?”
“이건 내 건데?”
“네?”
강현이 쇼핑백을 받아 들며 직원에게 인사를 한 후 세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누가 좋아한다고 하길래.”
“그럼 제 거예요?”
“내 거라니까.”
“그게 뭐야? 내가 좋아해서 샀다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강현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이걸로 명분을 만드는 거지. 기세나를 내 집으로 오게 할.”
씩, 입술 끝을 올려 만든 미소가 퍽 짓궂다.
세나는 강현에 대해 또 다른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남자는 틈만 나면 플러팅이다. 어디 학원이라도 다니나? 심장 아프게.
다닐 거면 유머가 뭔지 가르쳐주는 학원이나 다니지.
차에 올라타 다시 본가로 향하는 길.
세나는 조금 전 라운지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참나. 차라리 솔직하게 말을 했더라면, 어련히 알아서 대처했을 텐데.”
“그러게. 시간 낭비했군.”
“상대측 로펌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나 보더라고요. 하기야, 저희 쪽은 퀸즈에서 고용한 로펌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우린 무조건 의뢰인 편인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정희란 부사장은 남편과의 이혼을 원하지 않았다.
지금 이 이혼 소송은 그들에게 시간 연장을 위한 방법이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이다 보니, 그녀의 부모는 남편을 몹시도 탐탁지 않아 했다.
남편이 회사에서 두각을 보일수록, 교묘한 괴롭힘과 무시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하루가 멀다고 일어나는 장서갈등. 회사 내부를 떠도는 소문과 분열 등.
보다 못한 정희란은 불합리함이 가득한 세계에서 남편을 지키기 위해 이혼이라는 강수를 뒀다.
적어도 이혼이 진행되는 동안은 제 집안 쪽에서 남편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테니.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닌데, 이혼이 장난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게 안타깝기도 하면서, 뭐랄까. 두 사람이 정말 서로를 많이 사랑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마음이 좀 그러네요.”
“그래서? 어쩌기로 했어?”
“뭘 어째요. 우리 의뢰인이 원하는 게 이혼을 하는 ‘척’이라면 원하는 대로 해드려야죠.”
재벌가의 이혼 소송이야 일이 년 안에 끝낼 수 있는 케이스도 아니니, 최대한 더 오래 끌 수 있도록 계획을 전면 수정하기로 했다.
“너는 어떨 것 같아?”
“저요?”
“만약 부모님이 결혼할 상대를 반대한다면 말이야.”
“글쎄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
“사실 제 아버진 누굴 데려와도 좋다고 할 사람이거든요. 매번 결혼 좀 하라고 노랠 부르던 양반이라. 그러니까 그런 계약서를 들이밀었죠. 제가 선배에 대해 잘 모르던 때였는데.”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음…….”
눈을 굴리며 잠시간 생각을 하던 세나는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반대하라죠. 내가 택한 사람인데 어쩔 거야. 더군다나 저한테 결혼까지 할 마음이 들게 한 상대라면 보통 남자가 아닐 텐데, 부모님 반대로 놓칠 수 없죠.”
“지금까지 네 마음에 들었던 남자들을 생각해보면 신뢰도가 다소 의심스럽네.”
“뭐라고요?”
“너 같은 여자를 두고 바람난 놈이-.”
오점으로 남은 과거사에 당혹스러워진 세나가 그의 말문을 단칼에 잘랐다.
“아! 쉿!! 나 걔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거든요?! 타격 1도 없었다고요! 그냥 만난 거야! 그냥! 심심해서!”
“아아-. 기세나는 심심하면 남자를 만나는군.”
“아이참! 그게 아니라요, 그리고 얻다 비교해요?! 선배랑 걔랑은 완전 종이 다르죠! 천상계랑 저기 밑바닥을 굴러다니는 개체랑 비교 불가지!”
“종씩이나.”
그래도 세나의 대답이 싫지는 않은지 강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암튼. 선배도 그런 건 좀 잊어요.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야. 과거 없는 사람 어딨다고.”
세나가 입술을 댓 발로 내밀고 불만조로 툴툴대자 강현이 소리 내 웃었다.
듣기 좋은 음색의 웃음은 시원하게 뚫린 도로처럼 청량했다. 더는 화를 낼 수 없을 만큼.
“기세나.”
“왜요? 또 뭐로 놀리려고?”
“사랑해.”
“…….”
난데없는 사랑 고백에 세나의 호흡이 뚝 멎고 동공까지 흔들렸다.
강현의 시선은 처음부터 줄곧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가 ‘사랑해.’라는 말을 하면서 어떤 눈빛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가 절대 장난삼아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도.
“……미쳤나 봐.”
“예상치 못한 답변이네.”
제발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왔으면 좋겠다.
이 남자는 나를 죽일 작정인 게 분명하다. 분위기도, 상황도, 뭣도 없이 그런 말을 불쑥 내뱉다니.
더군다나 그런 말은 절대로. 쉽게 내뱉을 사람처럼 생기지도 않았는데.
“난 대답 안 해줄 거야.”
“이미 들었는걸?”
“…….”
세나는 열이 잔뜩 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창문을 반쯤 내렸다.
여름 바람이 차 안으로 흠뻑 밀려 들어와 긴 머리칼을 흔들었다.
그제야 두근거림으로 울렁대던 속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하……. 신이시여.
제가 살아생전 이 남자를 이겨보는 순간이 찾아오긴 할까요?
아무래도 다시 태어나는 게 더 빠르겠죠?
***
윤모연은 누구보다 먼저 강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머나. 반가워요. 정말 만나고 싶었는데.”
“처음 뵙겠습니다. 류강현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강현의 두 손으로도 부족해 세나의 손까지 빌린 선물 더미에 한번 놀라고, 소문으로만 듣던 강현의 외형에 한 번 더 놀랐다.
“오셨습니까, 형님.”
야간 자율학습도 빼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훈이 재빨리 강현의 손에서 선물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너 누나 손에 들린 바구니는 안 보이냐?”
강현에게 깍듯한 인사를 건네는 세훈을 보는 세나의 눈초리가 얄팍하게 좁아졌다.
“형님은 손님이잖아?”
“네 용돈은 내 주머니에서 나오지 않니?”
“누님. 이리 주십시오.”
“쟤는 선배를 딱 한 번 봐놓고 나보다 선배를 더 좋아한다니까요. 인생 멘토로 삼는다나 뭐라나.”
“그 용돈 이제부터 내가 줘야겠네.”
환대받으며 집안으로 들어서자, 서재의 문이 열리고 기장수가 뒷짐을 진 채 걸어 나왔다.
“자네, 이제 왔는가.”
“좀 늦었습니다.”
“일은 잘 해결됐고?”
“양해해 주신 덕분에 잘 해결하고 왔습니다.”
세나는 강현의 뒤에서 그가 보이지 않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분명 초인종이 울리기 전까지 거실에서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을 아버지였다.
괜히 허세를 부리려 서재에서 일을 본 척, 뻔히 보이는 설정에 조금 창피해졌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지 뭐.
세나가 뭐 하는 거냐, 쳐다보자, 기장수는 큼큼, 목청을 가다듬으며 어색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식사부터 해요, 우리. 배고프겠다.”
윤모연은 거실에 서 있는 이들을 다이닝 룸으로 이끌었다.
“류 변호사님이 뭐를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단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차려봤는데,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뭐든 잘 먹으니 괜찮습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그럴까요? 근데 뭐라고 불러야 하나. 강현 씨, 괜찮아요?”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아 듣기 좋습니다.”
“목소리도 어쩜 이렇게 근사할까, 변호사가 아니라 배우 해도 되겠어요.”
“어머님도 듣던 것보다 훨씬 미인이십니다.”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강현은 윤모연의 장단에 맞춰 하하 호호 웃었다.
다이닝 룸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던 세나도 남은 가족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좋았다. 모든 게.
강현은 윤모연이 챙겨주는 음식들을 하나하나 맛보며 감탄했다.
그럴 때마다, 윤모연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의 표정만으로도 강현을 쏙 맘에 들어 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혼자 살면 밥을 해 먹기 귀찮을 텐데, 종종 이렇게 같이 먹어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초대만 해주신다면 언제라도 오도록 하겠습니다.”
“형님. 어떤 스포츠를 좋아하시나요? 키도 크시고 손도 크신 걸 보니, 학창 시절 때 농구 좀 하셨을 것 같은데.”
세훈은 평소와 달리 말수를 늘려 그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강현 역시 귀여운 동생 하나 생긴 듯 귀찮은 내색 없이 세훈의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오히려 묵묵하게 식사에만 집중한 사람은 세나와 기장수였다.
식사 자리가 얼추 마무리되자, 강현이 선물로 가져온 과일이 예쁜 접시에 담겼다.
“봄이 좋겠구만.”
식사하는 내내 별말을 하지 않았던 기장수가 과일을 집어 들다 말고 대뜸 계절을 얘기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말뜻을 혼자 눈치챈 윤모연이 손뼉을 마주치며 화사하게 웃었다.
“봄 좋죠. 그런데 겨울도 나쁘지 않아요.”
“겨울은 너무 이르지.”
“그런가요? 요즘 트렌드가 실내보단 야외던데. 그러려면 역시 봄이 좋을 것 같네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말을 하려는데 세나보다 강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전에 대표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화기애애했던 좀 전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그의 표정을 읽은 기장수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서재로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