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도대체 꼬리가 몇 개야? (101/120)


101화. 도대체 꼬리가 몇 개야?
2022.06.18.


세나가 문고리를 붙든 채 고개를 갸웃했다. 강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눈치였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서 마주 보고 근무하는데, 여기까지 온 게 뭔 대수라고.


“뭐 다른 할 말이 있-.”

다시 고개를 들고 강현을 찾았을 때, 창가 쪽 의자는 비어있었다.

한 박자 늦게 인기척이 들린 곳으로 눈을 돌리자, 그가 바로 문 옆에 서 있었다.


“아, 깜짝이야!”

“들어와. 문 앞에 있지 말고.”

“아니, 저 곧 상담이 있어서 용건만 간단히 하려고.”

“나도 용건만 간단히 할 테니까 들어와.”

그의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집무실 안으로 한 발을 밀어 넣었을 때였다.

문틈을 지나고 있던 몸이 홱 당겨지고, 등 뒤로 문이 쿵 닫혔다.


“!!”

깜짝 놀란 세나가 몸을 바짝 굳히자 그녀의 귓가로 옅은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단단한 팔뚝이 가느다란 허리를 둘러 안고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곧이어 어깨 위로 이마가 닿았다.


“피곤했는데……. 한결 낫네.”

강현이 크게 숨을 들이켜자 그의 넓은 등이 부풀었다 꺼졌다.

그때마다 물씬 풍기는 청량한 향에 세나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뭐해? 나도 안아줘야지.”

“적응할 시간도 안 주고 재촉은.”

“이런 건 그냥 본능이야. 좋아하는 사람이랑 언제라도 닿고 싶은.”

“그렇게 안 생겨서는 애교가 참 많아요.”

“그래서 싫어?”

“싫긴요. 좋아요. 좋아 죽겠네, 아주.”

세나가 두 팔로 듬직한 등을 토닥여주자, 강현이 그녀의 어깨에 뭉근히 이마를 비비며 쿡쿡 웃었다.


“다음엔 먼저 안아줘.”

“응. 그럴게요.”

그의 얼굴을 보느라 뒤로 꺾인 세나의 목덜미가 뻐근해져 올 때쯤에야 강현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



“이게 다 뭐예요?”

차에 올라탄 세나가 뒷좌석에 놓인 것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커다란 과일 바구니와 호텔 유명제과 브랜드를 달고 있는 케이크 상자가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빛깔이 고운 보자기에 싸인 커다란 상자도 있었다. 겉으로만 봐도 필시 명품한우임이 틀림없었다.


“마음에 들어 하실지 모르겠네.”

“누가요? 기 대표님이?”

“아니. 어머님 말이야.”

“아-.”

뒷좌석의 선물 더미에서 시선을 떼고 강현을 보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깔끔한 모습인데도 어딘가 긴장한 듯 불편해 보였다.

하얀 와이셔츠 깃 아래 자리한 세모난 매듭이 바짝 올라붙어 있었다.


“넥타이는 왜 그렇게 꽉 졸라맸어요? 숨 안 막혀요?”

“새로 산 건데 아직 길이 잘 안 들었나 봐.”

세나의 지적에 강현이 사이드미러에 제 모습을 비추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넥타이의 매듭을 비틀어 느슨하게 살짝만 풀었다.


“그냥 인사드리러 가는 건데 넥타이까지 새로 샀어요?”

“이 여사 말씀으로는 첫인상이 중요하대. 그래서 사다 보니 이것저것.”

“난 또 급하게 어딜 나갔다 오나 했더니. 백화점에 갔다 온 거였네.”

“넥타이는 어때? 괜찮아? 너무 딱딱해 보이진 않아?”

“…….”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는데.”

“누가요? 기 대표님요?”

강현이 ‘자꾸 그럴 거야?’ 하며 눈썹을 일그러트리자, 세나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눈가에 걸며 어깨를 으쓱였다.


“기 대표님이야 류강현 변호사님의 상반기 수임 실적 보시고 풍악을 울리셨을 테고, 어머니는 그냥 좋아하실 거예요.”

“왜?”

“저처럼 얼굴 보시거든요.”

강현이 의외라는 듯 이맛살을 위로 치켜올렸다가 입매를 길게 늘어트렸다.


“그냥 달고 다니는 건데 좋게 봐주실 거라니 다행이네.”

“그걸 또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어요?”

“누구 말인데 까먹겠어. 아예 뼛속까지 새겨뒀지.”

“이래서 잘생긴 남자들은 얼굴값을 한다니까.”

“값 좀 비싸게 치러줬으면 좋겠네. 사줄 사람이 딱 한 명이라.”

시트벨트를 매는 동안 둘이서 주고받은 티키타카는 그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풋, 하고 웃어버렸다.


“긴장은 좀 풀려요?”

“덕분에.”

“선배 긴장하는 거 처음 봐. 되게 신기하다.”

“첫 재판 때도 이렇게 긴장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좋아요?”

가볍게 웃어넘기라는 식의 장난이었는데, 강현의 눈빛이 돌연 진지해졌다.

시동을 건 차의 조용한 진동이 전신으로 번지며 세나의 가슴속까지 파고들었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 아래로 커다란 손이 파고들어 손가락 하나하나를 엮어 깍지를 꼈다.

강현이 세나의 손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정확히 그녀의 약지에 입술을 쪽, 대었다 떼어냈다.


“몇 번이고 말해줄 수 있어.”

“…….”

“좋아해.”

장난스럽게 물어봤는데, 이토록 진지하게 대꾸해주니 되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도 좋아한다고 대답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지금 괜히 입을 열었다가 목소리가 너무 떨려 삑사리가 날 것 같았다.

그저 그의 눈빛에서부터 시작된 짜릿함이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전신으로 타고 오르는 것을 느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키스하고 싶은 얼굴이네.”

“아, 아니거든요……!”

“너 말고 내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의 입술이 세나의 입술 위로 내려앉아 촉촉하게 훑고 떨어졌다.

세나가 강현의 가슴팍을 팍, 밀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놀란 눈으로 주차장 상황을 살폈다.

조금 떨어진 곳 다른 팀 소속의 변호사가 걸어가고 있었지만, 다행히 핸드폰을 보는 듯 고개가 바닥을 향해 있었다.


“미쳤어. 누가 보면 어쩌려고!”

“보라고 한 거야. 나랑은 다르게 혼자 비밀연애 중이야?”

“그건 아니지만,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진 않단 말이에요.”

“…….”

“어쩌다 알게 되는 건 괜찮은데, 사내 커플은 처음이고, 또 아무래도 아직 제가 선배보다는 한참 뒤처지니까…….”

“누가 그래 네가 나보다 한참 뒤처진다고?”

“제가요. 제가.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한참 멀었지. 선배 따라가려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에-.”

“알아요. 법 조항이나 외우고, 판례나 한 번 더 보라고 하려고 했죠?”

“그런 걸 왜 봐? 몇 번만 클릭하면 다 나오는데.”

“네?”

“그럴 시간에 내 생각 한 번이나 더 해. 그게 더 효율적이야.”

잘생긴 얼굴에 떠오른 근사한 미소는 어떤 판례보다 명쾌한 판결을 내리게 만들었다.

세나의 두 뺨이 수줍게 물들었고, 그녀의 표정에 만족하며 강현은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었다.

차가 도로에 합류해 속도를 더해가자, 창밖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세나가 차창에 비친 제 얼굴과 운전 중인 강현의 옆모습을 보았다.

살짝 상기된 제 얼굴과는 다르게 무표정하지만 묘하게 느긋한 그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던 세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선배는, ……중에서도 상급일 거예요.”

“응? 뭐라구?”

“아니에요. 혼잣말이에요.”

세나가 차장에 입김을 호 하고 불더니, 손자국 하나 없던 유리에 검지를 바르작거렸다.

‘여우’라고 쓰인 글자가 새겨졌다, 서리와 함께 사라졌다.


 


“응?”

본가가 있는 주택단지를 앞에 두고 세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효원 변호사가 무슨 일이지?”

오늘 친구의 생일파티가 있다며 한껏 신이 나서 퇴근한 이효원이 뜬금없이 웬 전화인지.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다 전화를 받았다.


-“변호사님!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요! 바쁘셨어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곧장 수화기 너머로 넘어왔다,


“효원 씨, 친구 생일파티 간다고 안 했어요?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심상치 않은 반응에 강현이 한 손을 뻗어 오디오 소리를 죽였다.


-“생파 왔죠. 여기 W 호텔인데요. 제가 지금 뭘 본 줄 아세요?”

W 호텔이면 서울에서 꽤 유명한 호텔이니 연예인이라도 본 걸까? 그렇다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닐 텐데…….

그보다 좋아서 떠는 호들갑하고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 바로 문자 보낼 테니까 사진 확인부터 해주세요.”

띠링, 메시지 수신음에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앱을 열었다.


“어…….”

-“맞죠?! 퀸즈 홀딩스의 정희란 부사장님.”

“옆엔 남편분이시네요.”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쳤어요. 분위기가 이상해서 따라갔는데, 두 분 멤버십 라운지로 함께 들어가셨어요.”

“두 분 아직 법적으론 부부이니 함께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죠.”

-“더 이상한 건 제 기억에 오늘이 정희란 부사장님 결혼기념일이라는 거예요. 최근 상대측에선 회신을 피하고, 정희란 부사장님은 해외 출장 중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근데 오늘 여기서 딱 마주친 거 있죠?”

일주일 전 가사 전담팀 미팅을 끝내고 세나는 곧바로 의뢰인 측에 연통을 넣었다. 그러나 비서 측에서는 부사장님이 장기 해외 출장 중이라 돌아오는 대로 연락을 하겠다는 답신만 돌아왔다.


-“이혼 조율 중인 부부가. 결혼기념일에 호텔 라운지에 와서 뭐를 할까요? 이상하죠?”

이혼을 위해 각각의 변호사를 선임한 부부가, 굳이 호텔까지 와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재산 분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할까? 그것도 결혼기념일에 맞춰?


“확실히 이상하네요. 라운지에 들어가서 확인해봤어요?”

-“라운지는 멤버십이라 제가 들어갈 수 없었어요.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든요.”

“아. 그렇겠네. 고마워요. 제가 한 번 가볼게요.”

W 호텔 회원권이라면 제가 가지고 있었다. 지난, 겨울 이혼을 도와준 의뢰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선배. 차 돌려요. 잠깐 들를 곳이 있어요.”

목적지를 몇백 미터 남겨두고, 우회전 대신 유턴을 했다.

W 호텔 라운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세나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필 오늘 같은 날. 미안해요, 저 때문에.”

“괜찮아. 조금 늦는 건데 뭐.”

“선배가 생각해도 이상하죠?”

“일반적이지는 않지.”

차 안이 워낙 조용했던 터라 핸드폰 너머 이효원의 목소리가 강현의 귀에도 들렸다.

굳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됐지만, 군말 없이 제 행동에 따라 준 강현의 배려에 내심 감동했다.

아, 이 남자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완벽하네. 아니, 유머 감각 딱 하나 빼고.

세나가 강현에게 팔짱을 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음번엔 여기 데이트하러 와요. 분위기가 좋더라고요. 특히 눈꽃이 흩날리는 풍경이 되게 예뻐요.”

아직 여름이었지만, 겨울은 또 금방 오니까.


“비 오는 날도 운치가 있어요. 빌딩 숲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도 진짜 아름답거든요.”

“네가 좋다면 뭐든.”

“선배는 좋아하는 곳이 없어요? 전에 ‘집.’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글쎄.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지금까지는 네 방 침대가 내겐 가장 좋은 곳이야.”

강현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세나가 입술을 삐쭉이며 눈을 흘겼다.


“농담이 아니라, 전 선배랑 여행도 같이 가고 싶고, 좋은 데 가서 좋은 것도 보고 좋은 것도 먹고, 함께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하나씩 하자, 같이. 너랑 하면 나도 좋을 것 같으니까.”

두 사람만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라운지 층에 도착하자 실로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왼쪽으로 돌자 카드키를 찍고 출입을 할 수 있는 유리문이 나왔다.

세나가 보안기기에 멤버십 카드를 가져대자, 스르륵 소리도 없이 양쪽으로 문이 열렸다.

유리문 하나를 통과하자, 단조로워 보이던 공간은 어디 가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찬란하게 빛을 발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기세나 회원님. 어서 오십시오.”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배인이 가장 먼저 두 사람을 반겼다.


“오랜만에 뵙네요. 지배인님.”

“늘 앉으시던 창가 쪽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지배인님. 오늘은-.”

세나가 목소리를 낮춰 지배인을 가까이 불렀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왔어요. 정희란 부사장님 여기 와 계시죠?”

“미리 약속하신 건가요?”

“아뇨. 잠시 볼일이 있어서, 근처 자리로 안내를 받았으면 합니다.”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던 지배인이 잠시 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