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차라리 같이
(100/120)
100화. 차라리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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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차라리 같이
2022.06.14.
채성민은 그길로 오후 업무도 내팽개치고 집으로 돌아와 처박혔다.
왼쪽 이마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퉁퉁 부었다. 아픔도 수치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젠 그만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일주일이 싫다면, 열흘을 줄 테니, 제대로 쉬고 와.”
황 회장은 더는 말하기 싫으니 그만 나가보라 손을 휘저었다.
그게 다였다. 사과는 당연히 없었다.
골프공에 눈이 맞아 한쪽이 실명됐다면, 코가 맞아 코뼈가 부러졌다면, 사과라는 걸 했을까.
“망상도 그런 망상이 없지. 그 치들에게 사과란 죽어서도 뱉지 않을 말이겠지.”
채성민은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열흘이라는 시간이 생겼는데,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언제부터 줄곧 이런 상태였던 걸까.
케케묵은 시간을 돌이켜 봐도 딱히 언제부터였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가진 게 많아지고, 높은 곳에 올라가면 세상을 내려다볼 줄 알았는데, 도리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해변의 모래를 한 움큼 쥔 것 같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게 예뻐서 손을 댔는데, 손바닥에 남은 것은 잘 떨어지지도 않는 시커먼 찌꺼기뿐이었다.
“다 뒤져버렸으면 딱 좋겠네…….”
핸드폰 화면이 잠잠해지자, 이번에 초인종 소리가 고요했던 집 안을 뒤흔들었다.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귓속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 날카로웠다.
고작, 삼 일이었다.
삼일을 못 버텨서 보잘것없는 휴식마저 방해한다.
채성민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인터폰 앞에 섰다. 코드 선 자체를 뽑아버리기 위해서.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은 황유라였다.
모니터 작은 화면에 황유라의 얼굴이 잡혔다. 일그러진 표정엔 짜증이 가득했다.
-“야! 문 열어! 너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그녀가 있는 힘껏 발로 ‘쾅!’ 문을 차며 소리를 지르자, 그 소란스러움이 고스란히 집 안으로 흘러들었다.
채성민은 조용히 화면 너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불과 몇 개월 전. 사고 친 황유라를 찾아 서울 일대의 호텔을 죄다 뒤졌던 날이 떠올랐다.
호텔 방문을 두드리며 당장 문을 열라 시끄럽게 굴었던 제 모습이 황유라의 모습에 덧씌워졌다.
‘우습네. 이런 모습조차 닮아있는 너와 내 꼴이.’
황유라. 나는 이제 네가 역겹다.
-“문 열라니까?! 너 문 안 열면 사람 불러서 따고 들어갈 거야. 내가 못 할 줄 알아?”
“…….”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황유라가 곧장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채덕호 씨? 나 황유란데, 당신 아들 어딨는지 알려줄까? 요즘도 찾아다닌다며?”
채성민이 제 부모를 인생의 불행 중 하나로 여긴다는 걸 잘 아는 황유라는 이때다 싶어 그의 부모를 두고 간을 보았다.
뻔히 보이는 얕은 수작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더 혹을 달고 싶지는 않았다.
굳게 닫혀있던 현관문이 열렸다.
문이 열린 것을 확인한 황유라는 상대가 말하고 있는 도중인데도,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필요 없다는 듯, 예의 따위는 애초부터 없어 말아먹을 것도 없었다.
“집에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전화는 왜 안 받고, 문은 또 왜 이렇게 늦게 열어?!”
그녀가 문을 활짝 젖히고 들어와 채성민의 어깨를 팍, 밀쳤다.
현관을 지나쳐 거실로. 하이힐을 신은 발이 또각또각, 대리석 타일 위에 검은 자국을 만들었다.
채성민의 시선이 바닥에 찍히는 하이힐 자국을 따라 이동했다.
더는 화도 나지 않았다.
몇 년간 힘겹게 가꿨던, 자존심과도 같은 성지가 짓밟혀도, 분노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하고픈 말이 있으면 빨리 지껄이고 꺼져줬으면 할 뿐이었다.
“소리를 하도 질렀더니 목이 다 칼칼하네. 마실 거 없어?”
“…….”
“없으면 나가서 사 오든가.”
거실을 휙 둘러본 황유라는 조금 전까지 채성민이 누워있던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날 때부터 갑으로 태어나, 다짜고짜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도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채성민은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돌아왔다. 그리고 황유라에게 던지다시피 건네주었다.
“뭐야? 컵은? 손님 대접이 뭐 이따위야?”
“손님이면 손님답게 신발이나 벗고 말해.”
“네 집 바닥에 깔린 것보다 비싼 건데?”
보란 듯이 다리를 까딱이던 황유라는 제 비싼 신발을 신은 발을 유리 테이블 위로 턱, 올렸다.
지겨워. 저 꼴을 보지 않으려면 빨리 떠야 할 텐데.
황 회장이 뭐라고 회유를 하든 간에, 대호 그룹을 떠나겠다는 결정에 번복은 없을 거였다.
“여긴 왜 왔어?”
“집 좋다. 이거 다 내가 해준 거 아냐?”
“네가 사고 쳐서 그거 수습하다 보니 부가적으로 따라온 것들이지.”
“그 말이 그 말 아냐?”
“말꼬리 늘이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하고 빨리 가.”
채성민이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서자, 황유라가 그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었다.
전부터 들었던 위화감이 확실히 진해져 있었다.
더군다나 황 회장 비서 실장을 통해서 이미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채성민이 사직서를 제출했고, 회유가 통하지 않자, 황 회장이 그에게 골프공을 던졌다는 소식이었다.
황유라는 소파 등받이를 손톱으로 톡톡 긁으며 딴청을 부리더니 무심함을 가장한 척 입을 열었다.
“사람 하나만 빼줘.”
집까지 쳐들어와서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숨길 새도 없이 웃음이 먼저 터졌다.
“너 하나로 모자라 또 누구 뒤치다꺼리를 하라고? 소식 못 들었어?”
“채성민. 정신 차려. 너 여기 그만두면 어디서 뭐 하려고?”
“네가 뭔 상관이야?”
“왜 상관이 없어? 너처럼 욕심 많은 새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 있긴 하니?”
그러게. 그 욕심 때문에 너를 만났지.
“그때 그 여자? 똑똑하게 생겼던데, 네 그 시커먼 속을 알면 도망가겠지. 아, 그전에 고작 그딴 여자가 네 욕심을 채워줄 수는 있고?”
이제 와 후회해도 소용없는 짓거리라는 걸 알기에 채성민은 입을 다물었다.
후회란 선택의 기로 앞에서 망설였을 때나 하는 것이다.
채성민은 만약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황유라가 썩은 동아줄이라는 걸 알았다 해도, 기어이 그 썩은 동아줄을 잡았을 것이다.
‘나란 놈은 그런 새끼니까. 당장에 죽게 생겼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겠지…….’
자조가 발끝에서부터 차올라 입꼬리에 맺혔다.
“이번 건만 조용히 해결해주면, 한동안 네 말대로 할게. 미국? 독일? 어디든 괜찮으니까 한 1~2년 나갔다 오자.”
“황유라.”
“왜?”
“너는 왜 그렇게 나에게 집착하는 거지?”
“뭐??”
“돈만 주면 네 뒤치다꺼리 해줄 인간들이 이 바닥에 널렸을 텐데. 왜 하필 나야?”
이상했다. 보고만 있어도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서로를 증오하는데.
채성민은 이따금 황유라의 입을 찢어버리거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정도로 그녀가 버거웠다.
그래서 더욱 벗어나고 싶었다. 이러다 정말 황유라를 죽이고 저 또한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황유라는 도대체 왜 제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것일까.
“그때 그 일이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나도 잘한 건 없으니 어디 가서 입 털고 다닐 일 없으니까 그만 나 좀 놔-.”
“개소리하지 마.”
“뭐?”
“네가 더러운 시궁창에서 빌빌거릴 때 찾아내 준 사람이 누구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황유라는 뾰족하게 치켜든 눈알을 부라렸다.
“내가 찾아냈고! 내가 길들였어! 누가 선택한 게 아니라 내가 선택했어! 오직 나만이 널 똑바로 봐준 거야! 채성민! 넌 절대 나 못 벗어나!”
그녀의 번들번들한 눈에 떠오른 기색은 광기에 가까웠다.
“네가 뭐라고 지껄이든 말든, 난 너 놓아줄 마음 없어.”
단순한 집착을 떠나, 채성민이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같이 죽을까?”
무심결에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뭐??”
“그렇게 놓아주기 싫다면, 차라리 같이 죽으면 되겠네. 난 네가 죽기보다 싫으니까.”
적개심으로 가득했던 황유라의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제자리를 되찾았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비틀리고 냉소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왜? 죽을 거면 혼자 죽어. 그래. 죽으면 그때는 날 벗어날 수 있겠네.”
“…….”
“내가 틀린 말 했니? 너만 포기하면 다 편해지는데 왜 그렇게 아락바락 하는 거야? 네가 갖고 싶은 거 다 주겠다잖아? 자존심만 내려놓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그만 가라.”
“잘 생각해. 채성민. 나 말고는 아무도 없어. 너 받아 줄 사람. 네가 포기하면 나도 한 번 생각해 볼게. 이해심 넓은 주인으로서 말이야.”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현관을 향했다.
채성민은 거실에 멍하니 서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비서 실장한테 현재 상황 전달받아서 해결해.”
발아래 딛고 선 곳이 어떤 바닥인지.
“그럼 나머지 휴가 동안은 건들지 않을게.”
“…….”
“아까 한 말 빈말 아니야. 이번 일 해결되면 같이 떠나자. 네가 가고픈 곳으로. 아버지한텐 내가 말해 둘 테니까. 거기선 좀 얌전히 굴어줄게.”
채성민은 대꾸하지 않았다.
분명 뭔가를 딛고 서 있는 것 같은데, 금방이라도 무너져 끝을 알 수 없는 시커먼 수렁으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
박영재 검사로부터 성분 검사 결과지를 받은 강현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환각제보다는 각성제에 가까웠다. 거기에 처방이 필요한 마약성 진통제 함유량도 꽤 높았다.
일반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불법 약물이라기보다는 제약회사를 통해 만든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성분 조합이 이상적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외압이 들어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는 통화였기에 전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사건을 이관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던데.”
“동부 지검장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직까진 별말씀을 안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눈치를 보아하니 은근히 싫은 눈치셨습니다. 생각보다 큰 건이라.”
“말이 나온 곳은 당연히 중앙지검이겠군요.”
-“네.”
“이유는?”
-“말로는 자기네들 쪽에서 오래전부터 내사하고 있던 사건이다, 취합하겠다고는 하는데.”
“그럴 리가. 관할 이전을 받자마자 불기소처분을 내리려는 속셈이겠죠.”
마른 웃음을 피식, 흘린 강현이 귀와 어깨 사이에 걸쳐둔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세요. 황유라를 소환할 때까지. 이럴 때 써먹으라고 검찰청에 기자들을 출입시키는 거 아닙니까?”
-“판을 키우자는 말씀이시죠?”
“마침 좋은 먹잇감이 있으니 배고픈 하이에나들에게 떡밥 한 번 뿌리시죠.”
항간에 마약 사건으로 오르내리던 연예인이 또다시 같은 범죄로 구속 수사를 받는다. 그런데 그 뒤에 재벌 2세가 연루돼 있더라. 그래서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
“기자실 앞을 지나가면서 은근슬쩍 흘리면 알아서 달려들 겁니다.”
검찰에게 기자들은 딱 두 가지였다. 숨기고 싶은 것들이 있을 때는 귀찮은 날파리 떼. 여론의 힘이 필요할 때는 팅커벨.
“일단 황유라만 참고인 조사차 수면 위로 끌어올리면, 분위기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겁니다.”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현재 남자 연예인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고 했지만, 압수 수색 결과 다량의 ‘레드 릴리’를 확보했고, 은어로 작성된 거래 장부도 확보한 상태였다.
-“장부에서 발견된 H라는 알파벳이 ‘황유라’라는 것만 확인되면 수사가 급물살을 탈 것 같은데, 제 딴에는 그것이 마지막 방어선이라고 생각하는지 입을 딱 다무네요.”
“상관없습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쪽에서 더 압박감을 느낄 거니까. 시간만 잘 끌어주세요.”
박영재와 통화를 끝내고 잠시 뒤, 강현의 집무실 문을 리듬감 있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강현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올라섰다.
그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그 틈 사이로 세나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선배. 오늘 알죠?”
강현이 당연히 알고 있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그럼 이따 퇴근할 때 봐요.”
“기세나.”
“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