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특별한 당신 (99/120)


99화. 특별한 당신
2022.06.11.


세나는 화장 솜에 아이 리무버를 적시다 말고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엔 욕실 문틀에 기대어 저를 응시하고 있는 한 남자가 비쳤다.

16582856007051.jpg

“왜요?”

16582856007057.jpg

“여자들은 귀찮겠다 싶어서.”

16582856007051.jpg

“근데 화장 안 지우고 자면 다음 날 트러블이 나기도 하니까. 피부에도 안 좋고.”

16582856007057.jpg

“그 귀여운 것도 해야 하고?”

그가 말한 귀여운 것이란, 세나의 둥근 이마 위로 머리칼이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해주는 헤어 밴드였다. 토끼 귀를 쭝긋 세우고 있는 하얀색 밴드였다.

16582856007051.jpg

“화장품 사면 이런 사은품 하나씩은 꼭 끼워주거든요.”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세운 강현이 셔츠 소매를 팔뚝 위로 말아 접으며 다가왔다.

16582856007057.jpg

“다음엔 고양이로 달라고 해.”

16582856007051.jpg

“네?”

16582856007057.jpg

“그게 더 잘 어울릴 테니까.”

그는 화장 솜을 눈가로 가져가는 세나의 손목을 슬쩍 잡아끌더니 그녀를 욕조 평평한 부근에 앉혔다.

그러고는 화장 솜을 가져가 세나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16582856007057.jpg

“아파?”

16582856007051.jpg

“아뇨.”

16582856007057.jpg

“이 조그마한 거 한 장으로 얼굴 전체를 닦는 건 아니지?”

16582856007051.jpg

“저기. 선반에 놓인 하늘색 액체, 새 솜에 묻혀서.”

세나의 한쪽 눈을 깨끗이 닦아낸 강현은 선반에서 화장 솜 뭉텅이와 리무버를 가지고 돌아왔다.

커다란 손 위에 올려진 흰 화장 솜도 이질적이었지만, 그 솜 위로 톡톡, 병을 두드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어울리지도 않게 귀여웠다.

16582856007051.jpg

“풋.”

16582856007057.jpg

“왜 웃어?”

16582856007051.jpg

“아니에요. 꼼꼼하게 지워주세요.”

세나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곧이어 입술 부근에 강현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깝게 내려앉았다.

차가운 솜이 눈가를 어루만진다. 적당한 압력이 얼굴 곳곳에서 느껴졌다. 시원하다기보다는 간지러운 느낌이었지만, 세나는 군말하지 않고 강현에게 제 얼굴을 맡겼다.

16582856007057.jpg

“다 된 건가?”

16582856007051.jpg

“어디 보자.”

눈을 뜨고 거울을 보았다. 말간 얼굴이 된 세나가 ‘이 정도면 오케이.’하고 합격점을 주었다. 어차피 2차 세안을 할 거니까.

강현이 이번에는 칫솔을 들고 다시 세나 앞에 섰다.

그제야 바짓단 아래로 보이는 그의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16582856007051.jpg

‘처음부터 이러려고 욕실 앞에 서 있었구나……. 뭐야, 진짜. 엉뚱하긴.’

입가로 스멀스멀 미소가 번지는 그때, 큼직한 손바닥이 턱 아래를 슬며시 감쌌다.

16582856007057.jpg

“아- 해.”

16582856007051.jpg

“아-.”

어금니에서부터 시작된 칫솔질에 입안이 금세 거품으로 가득 찼다.

아랫니를 쓱싹이던 칫솔모가 윗니를 쓱싹거리다, 다시 아랫니로 돌아왔다.

16582856007057.jpg

“뱉을까?”

세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뒤쪽 욕조에 하얀 거품을 뱉었다. 그의 손이 다시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

16582856007057.jpg

“이-.”

16582856007051.jpg

“이-.”

치아가 맞물리자 위아래로 빠르게 칫솔질을 시작한다.

남에게 해주는 칫솔질이 익숙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행여나 상대가 다칠까, 너무 힘 조절을 한 탓에 영 시원찮았다.

그러나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가만히 있었다. 왠지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16582856007057.jpg

“다 된 것 같은데.”

더 필요한 곳이 있냐는 물음에 세나가 좌우로 고개를 젓자, 그가 턱을 놓아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나가 세면대에 거품을 마저 뱉고 입을 헹궜다.

마음 같아서는 강현의 손에 들린 칫솔을 뺏어 들고 박박, 다시 닦고 싶었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16582856007051.jpg

“선배도 해줄까요?”

16582856007057.jpg

“아니. 난 됐어.”

칫솔 통에서 자신의 칫솔을 꺼내 든 강현이 스스로 이를 닦기 시작했다.

확실히 동작이 저를 닦아줄 때와는 달랐다.

저 힘으로 칫솔질했으면 잇몸에서 피가 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나는 거울을 통해 강현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양치질은 어떻게 하는지, 이다음엔 뭘 할지.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강현의 눈가가 설핏 누그러지더니 그가 손을 뻗어왔다.

16582856007051.jpg

“왜요?”

그가 엄지로 세나의 입가에 남은 거품을 쓱- 닦아낸 뒤 다시 칫솔질을 시작했다.

거울 속엔 단추가 풀린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와 토끼 헤어 밴드를 하고 파자마를 입은 여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입에 칫솔을 물고 있었고, 한 사람은 손에 폼 클렌징 거품을 만들고 있었다.

일상을 끝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그날 하루치의 고단함을 씻어낸다.

특별한 거 없는 행위였다. 자기 전에 세수와 양치질은 누구나 다 하는 거니까.

16582856007051.jpg

‘그런데 왜 이렇게 특별하게 느껴질까?’

반복되는 생활 속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제 옆에 서 있는 특별한 누군가 때문이겠지.

입안의 거품을 헹궈내는 강현을 보며 세나가 입술을 팽팽하게 당겨 웃었다.

16582856007051.jpg

“선배, 나 봐봐요.”

16582856007057.jpg

“응?”

16582856007051.jpg

“히!”

손에 묻은 거품을 검지에 묻혀 강현의 콧등에 콕 찍었다. 하얀 뿔이 코뿔소처럼 볼록 솟았다.

16582856007051.jpg

“훨씬 잘생겨 보이네.”

16582856007057.jpg

“…….”

16582856007051.jpg

“잘생겨서 봐줬다. 오늘 자고 가요. 허락해줄게요.”

16582856007057.jpg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긴 한데.”

16582856007051.jpg

“감사 인사는 다 씻고 나가서-. 꺄악!”

현관에서와 마찬가지로 세나를 번쩍 들어 올린 강현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눈썹이 좌우로 뒤틀리고 입꼬리가 한쪽으로 치우친 게 짓궂은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이었다.

얼떨결에 몸이 들려 강현의 머리채를 잡게 돼버린 덕분에 그의 검은 머리칼이 폼 클랜징 범벅이 되었다.

16582856007051.jpg

“어떡해. 선배 샤워해야겠다. 미안. 그러게 왜 사람을 예고도 없이 번쩍번쩍-.”

그가 돌연 개처럼 머리를 탈탈 털며 머리칼에 묻은 거품을 사방으로 튕겨냈다. 덕분에 세나의 파자마와 턱, 목에까지 거품이 묻고 말았다.

16582856007051.jpg

“아……. 대체 무슨 짓을…….”

16582856007057.jpg

“어떡하지 기세나, 씻을 곳이 많아져 버렸네?”

16582856007051.jpg

“내가 못 살아. 한 번을 안 져 줘. 한 번을!”

16582856007057.jpg

“매일 매일 져주고 있는데 왜 모를까?”

강현이 세나를 안아 든 채로 샤워부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16582856007057.jpg

“벗겨 줘. 보다시피 손이 모자라서.”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를 따라 세나의 손끝이 움직였다.

툭툭, 단추가 열릴 때마다 벌어지는 앞섶 사이로 탄탄한 가슴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나의 엉덩이를 받친 팔을 교차해 가며 셔츠를 벗은 강현이 고개를 내려 파마자 앞섶에 달린 단추를 입안으로 삼켰다.

손으로 풀면 간단하게 풀릴 텐데, 품에 안은 세나를 내려주기가 싫었다.

그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세나가 강현에게 안긴 채로 제 파자마 상의를 훌렁 벗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서린 이채가 열기로 가득 차올랐다.

입술이 촉촉이 맞물린 것은 샤워부스의 유리문이 열리기 바로 직전이었다.

따뜻한 물줄기 아래서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겹쳐 안았다.

서로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숨결을 나누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은밀한 접촉은 상대를 향한 애정으로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작은 부스 안.

세나의 손길이 강현의 등을 쓸어내렸고, 강현의 손은 세나의 말랑말랑한 살결을 움켜쥐었다.

서로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조금씩 과감해지자, 아늑했던 공간이 전에 없이 아찔해졌다.

16582856072356.jpg

 

***

불도 켜지 않은 집 안은 초침 소리도 숨소리도 없이 적막했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폐장 시간 후의 모델 하우스 같은 느낌을 물씬 풍겼다.

그 적막함을 깨트린 것은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이었다.

진동도 소리도 없이 무음으로 설정해놓은 핸드폰 화면이 끊임없이 뻔쩍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번쩍임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

바로 채성민이었다.

그는 거실 소파에 누운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이 된 기분마저 들었다.

이틀 내내 한자리에 누워 답이 없는 질문들로 머릿속을 채웠다.

16582856072361.jpg

‘무엇이 그들 사이를 그토록 끈끈하게 만들어 주었을까.’

사람 마음만큼 간사한 게 없어서 제게 이득이 되지 않으면 금세 변하고 마는 것일 텐데.

균열을 만들고 그 틈새를 파고들면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질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강현과 세나의 사이는 제 생각보다 훨씬 견고했다.

기세나를 갖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16582856072361.jpg

“처음부터 이용 가치로만 판단했지, 사랑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채성민은 자조적인 어투로 혼잣말을 읊조렸다.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더 맛있어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류강현도 기세나를 갖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랬다면 지금 텅 빈 집에 홀로 누워 더러운 기분을 곱씹진 않았을 텐데.

16582856072361.jpg

“뭣 같네. 누구는 남의 뒤나 닦아주며 허덕이고, 누구는 사랑 놀음에 허덕이고.”

이래서야 시간과 공을 들인 노력에 비해 손해가 막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뭘 향해 이토록 달리고 있었는지,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냥 다 귀찮아졌다.

일 년에 한두 번. 연례행사로 서울 도심을 불바다로 만들겠다 협박하는 이웃 나라는 어째서 아직 깜깜무소식인지.

16582856072361.jpg

‘차라리 전쟁이라도 나서 너도나도 망해버리면 이렇게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을 텐데…….’

아니. 그래도 있는 놈들은 잘만 살아남겠지.

그게 가난한 사람과 있는 사람의 차이니까.

전쟁이 난다는 소식이 뉴스로 뜨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해외로 도피했거나, 방공호에 몸을 숨기고도 남을 것이다.

채성민은 사흘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실지언정 술조차 손을 대지 않았다.

그저 소파에 누워 말 같지도 않은 상상으로 시간이나 때웠다.

그런 자신이 한심했지만, 더는 쥐어짤 열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캄캄한 상황에서 오는 무기력.

허무하고 허탈했다.
 

16582856072361.jpg

“그만두겠습니다.”

 
사흘 전 한자로 ‘辭職書’라고 쓰인 흰 봉투를 황 회장에게 직접 내밀었다.

대호 그룹 법무팀에 입사 후 몇 개월 만에 작성된 그 사직서는 성민의 책상 첫 번째 서랍의 제일 윗줄에 지난 7년 내내 상시 놓여 있었다.

미친 황유라가 미친 짓거리를 할 때마다, 딸자식 간수 하나 제대로 못 한 황 회장의 면전에다 철썩, 던져주고 싶었다.

퇴사 후 받을 수 있는 퇴직금을 얼추 계산해보았다.

향후 몇 년은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만한 금액이었다.

집과 차를 팔고 퇴직금을 합쳐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자. 아무것도 없고 빈털터리였던 때와는 다르니.

제대로 사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떤 시궁창에 굴러도 여기보다는 나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황 회장은 눈앞에서 그 사직서를 가차 없이 반으로 찢었다.

이유는 단, 하나.

채성민의 능력을 높이 사, 그가 회사에 꼭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만두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황유라의 뒷감당을 할 인물이 없다, 가 이유였다.
 

16582856072381.jpg

“시집갈 때까지만 참아. 내가 채 팀장 고생 모르는 것도 아니고.”

 
황 회장의 말에 채성민은 무심코 튀어 오른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스캔들을 터트리고, 사고를 쳐대는 통에 돈이나 집안 보고 들어왔던 혼담은 심심하면 깨지기 일쑤였다. 그쯤 하면 일부러 그러는 걸지도.

어차피 서로 줄 수 있는 패 까고 나눠 먹을 거 계산 때려서 하는 게 재벌가 정략결혼인데, 일이 진행될 만하면 번번이 상대측에서 퇴짜를 놓았다.

그렇게 시집보내고 싶으면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듣지 못한 척, 인물이나 반반한 사내를 데려다 앉히면 될 터인데, 곧 죽어도 그건 싫은지 헛된 욕심을 부리는 황 회장이었다.
 

16582856072361.jpg

“지난번 혼담도 어그러졌는데, 도대체 어떤 집안이 황유라 상무랑 결혼하겠다고 나선답니까?”

16582856072381.jpg

“그러니까! 더 사고 못 치게 제대로 감시하란 말이잖아!”

16582856072361.jpg

“더는 못합니다.”

16582856072381.jpg

“채 팀장!!”

 
황유라나 황유찬이나. 그리고 나머지 황 씨라는 성을 달고 있는 배다른 씨들이나.

왜 제가 자식 농사 개판쳐놓고 엄한 사람한테 눈을 부라리며 책임 전가를 하는지.

저도 제대로 된 인간은 아니지만, 그들은 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다.
 

16582856072361.jpg

“한 달 내로 인수인계할 수 있게 사람 구해주시고, 사직 처리해주십시오.”

16582856072381.jpg

“어디 가서 일주일 푹 쉬다 와. 원한다면 강원도 별장 내어줄 테니까. 시끄러운 속 좀 정리하고 다시 와.”

16582856072361.jpg

“싫습니다.”

16582856072381.jpg

“채성민!!”

 
큼직한 주먹이 회장 집무실 책상 위를 ‘쾅!’ 하고 내려찍었다.
 

16582856072381.jpg

“너한테 법무팀 팀장 자리가 가당키나 해? 너한테 들어간 돈이 얼만데 인제 와서 못하겠다 만다야?! 유라가 부탁하길래 네놈의 비렁뱅이 같은 부모도 먹고 살 수 있게 해줬는데,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아?”

 
은혜라. 도대체 무슨 은혜를 말하는 걸까.

제 아버지를 경기도 인근 공장에 경비소장으로 꽂아준 걸 은혜라고 여겨야 하나?

하긴 그 근방 허름한 집 한 채도 내어줬으니, 키우는 개새끼를 낳아준 어미라고 아주 알뜰살뜰 챙겨줬네.

덕분에 채성민은 제 가족과의 연락을 완전히 끊어낼 수 있었다.
 

16582856072361.jpg

“은혜를 받은 만큼은 충분히 해드린 것 같습니다.”

 
말대꾸를 극히 싫어하는 황 회장이 분을 참지 못하고 책상 위에 놓인 것 중 하나를 집어던졌다.

‘빡!’ 소리와 함께 채성민의 이마를 가격한 것은 골프공이었다.

16582856088788.jpg

165828561046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