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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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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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
2022.06.04.
“난 이제 성별이 여자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아.”
연수원 동기다 보니 편하게 말을 놓는 사이가 됐지만, 박영재는 세나보다 두 살이 많았다.
게다가 그는 연수원 시절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래로 아직까지 싱글이었다.
선은 종종 보는 것 같은데, 일에 치여, 시간에 치여 결과는 번번이 실패였다.
기대에 찬 눈빛을 마주한 세나는 은근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네가 좋아할 사람이긴 해.”
“뭐?! 정말? 왜지? 기세 변이 나에게 그럴 사람이 아닌데? 변호사? 법무사? 아님, 세무사? 같은 검사만 아니면 좋겠네.”
“……변호사.”
“오. 지난번에 다짜고짜 전화해서 류강현 검사에 대해 물어본 게 미안해서 그래?”
‘류강현’이라는 이름에 뜨끔한 세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 미리 말 좀 하지.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는 건데. 어디야? 몇 호실? 사실 나 이런 서프라이즈 별로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터덜터덜했던 걸음이 한결 가벼운 것 같았다.
그러나 미닫이문 앞에 도착해 돌계단 위에 놓인 신발을 보자마자 들떴던 어깨가 단박에 축 늘어졌다.
“……남자네.”
“응.”
“게다가 둘씩이나.”
“어. 뭐. 예쁘진 않지만, 잘생겼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세나를 휙, 돌아보는 박영재의 눈가에 실망한 기색이 자글자글했다.
두 사람이 밖에서 인기척을 내는 사이 미닫이문이 한쪽으로 스르륵 열렸다.
신발을 벗다 말고 고개를 든 박영재의 눈동자가 열린 문 너머로 향하다 홉뜨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영재 검사님. 류강현입니다.”
“어, 어…… 어어?!!”
툭 벌어진 입에서 얼빠진 소리를 내던 박영재가 비틀대며 양말만 신은 발로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디뎠다.
“앗, 차가.”
“괜찮으십니까?”
강현이 뒷걸음질 치는 박영재를 향해 손을 불쑥 내밀었다. 박영재는 그의 손을 잡지도 못하고 상대를 쳐다만 보았다.
안 그래도 키가 커 상대를 내려다보는 남자가 돌계단 두 개쯤 위에 서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으니 그 위압감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세나가 힐을 신은 발로 대리석 바닥을 톡톡 두드려 소리를 내자, 정신을 차린 박영재가 강현의 손을 맞잡았다.
“류강현 검사님?!”
“이제 검사 아니고 변호사입니다.”
“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들어와서 이야기 나누시죠.”
강현이 살짝 힘을 주어 마주 잡은 손을 당기자 뒤로 한껏 넘어갔던 박영재의 허리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가 예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문을 열어 둔 채 안으로 들어갔다.
강현의 모습을 멍하니 보던 박영재가 홱 고개를 돌렸다.
“왜 말 안 했어?”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조용하지만, 힘이 들어간 목소리엔 복잡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대외비니까?”
세나가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가 내려놓았다.
‘당했다.’ 하는 표정의 박영재를 뒤로하고 세나는 먼저 돌계단을 밟았다.
서로 안면이 있는 사람은 오랜만의 안부를, 처음 만남을 가진 사람은 명함을 주고받으며 간단한 인사를 끝냈다.
“일단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배고프실 텐데.”
정갈한 계절 반찬들이 여러 개 놓이고, 메인 음식까지 나오며 테이블이 채워졌다.
세나의 앞엔 곱게 채가 썰린 배와 영롱한 빛깔의 노른자가 동동 떠 있는 육회 한 접시가 놓였다.
아무래도 강현이 따로 주문한 듯 보였다.
세나가 감격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난번 왔을 때 잘 먹길래.”
“이 집 육회 맛있었었어요.”
박영재와의 만남 장소는 바이오제약 김택주 대표 상담 때 왔던 한정식집이었다.
“많이 먹어. 모자라면 더 시켜줄 테니까.”
강현은 세나의 빈 잔에 물을 채워주며 다정하게 어투로 말했다.
“선배는 배랑 달걀이랑 비비는 게 좋아요? 따로따로 먹는 게 좋아요?”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해. 난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전 다 섞어서 먹는 게 좋더라구요.”
“섞어줘?”
“제가 할게요.”
세나가 접시에 담긴 재료들을 한곳에 모아 쓱쓱 비볐고, 맛을 보더니 빙긋 미소를 지었다.
강현은 그런 세나를 바라보다 그제야 젓가락을 들었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장철호는 이젠 적응하기로 했는지, 그들의 애정행각을 못 본 척 불고기를 움푹 퍼 곧장 입속으로 가져갔다.
오직 박영재 검사만이 숟가락을 든 채로 굳어있었다.
‘예전에 지검에서 봤을 때랑 너무 다른 거 아니야?’
박영재는 작년, 일이 있어 중앙지검을 방문한 날을 떠올렸다.
그 당시 검찰청 로비에서 스치듯 마주쳤던 류강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박영재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연상된 그림이 있었다.
‘삼국을 통일한 어느 장수의 어마어마한 무기 같은 남자네.’
류강현의 첫인상이었다.
냉철한 눈빛, 차가운 표정,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주변을 장악하는 포스가 남달랐다.
그는 넓은 보폭으로 앞서 걸으며 뒤따라오는 누군가에게 뭔갈 지시하고 있었는데,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핵심만 짚어 말하는 솜씨를 보고 저도 모르게 감탄을 했었다.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른다던데…….’
박영재는 딜레마에 빠졌다.
‘아……. 선배님으로 대해야 하는 거야, 아니면 그냥 변호사로 대해야 하는 거야. 애매하네.’
선배 검사였을 때는 한 번쯤 같이 일을 해보고 싶은 사람이었으나, 변호사가 된 이상 서로 말을 조심해야 할 상대였다.
‘로펌 변호사로 대해야겠지? 지금 마주 보고 밥을 먹고 있어도, 언제 어디서 적수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일이고.’
아니지.
‘검찰청 전설이었던 사람이었는데, 딱딱하게 굴긴 뭣하지. 잘만 친해지면 나중에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때마침 시선을 느낀 강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박영재가 뜨끔하며, 허공에 숟가락질했다.
의아한 얼굴로 박영재를 쳐다보던 강현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입맛에 맞지 않은 음식이라도.”
강현의 고저 없는 목소리는 세나를 대할 때와는 달리 선이라도 그은 것처럼 사무적이었다.
“아, 아닙니다. 한식 좋아합니다. 요즘 집밥을 제대로 먹질 못해서 뭐부터 먹어야 하나 고민 중이었습니다.”
“이 집 요리는 깔끔해서 어지간한 건 전부 먹을 만할 겁니다.”
분명 가볍게 권하는 것 같은데, 그 속에선 이상하게 힘이 느껴졌다.
류강현의 소문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는 박영재의 귀에는 그 소리가 마치, ‘당장 이 중에 뭐든 입에 넣지 않으면, 네 입을 억지로 벌려서라도 쑤셔 넣겠다.’라는 협박처럼 들렸다.
박영재는 갈 길을 잃은 수저로 자신의 가장 가까이에 놓인 국 한술을 떠 맛을 보았다.
“와-.”
쉽게 먹을 수 있는 콩나물국이었는데, 감칠맛과 시원함이 일품이었다.
박영재는 방금까지 그를 어색해했단 사실도 잊은 채 부지런히 수저와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들이 치워지고, 상 위로 간단한 다과가 차려졌다.
단 것을 좋아하는 세나와 장철호는 알록달록한 양갱으로 입가심을 했고, 강현은 따뜻하게 데운 메밀차를 마셨다.
박영재는 저를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지켜만 보는 이 분위기가 답답해 좌불안석이었다.
메밀차가 식어가는 것을 멀뚱멀뚱 지켜보던 박영재가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뗐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만난 이유가 뭔가요?”
식사하는 동안에 조곤조곤한 대화가 오갔지만, 현재 이슈되고 있는 법안이나 뉴스, 기삿거리들이 전부였다.
“그냥 밥이나 먹자고 불러내신 건 아닌 것 같고.”
식사가 끝나면 말을 할까 기다려봤지만, 후식을 맛보는 지금까지 별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저를 떠보려고 하시는 거라면 이미 충분하니, 말씀해 주시죠. 류강현 변호사님이라면 저에 대한 뒷조사를 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그 조사는 제가 했지요. 일 처리가 깔끔하시던데요?”
박영재의 옆에 앉은 장철호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강현도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재작년 일한 건설 자료 잘 받았습니다. 덕분에 사건도 수월하게 해결했고요. 늦었지만, 이제야 감사를 전합니다.”
“아. 네. 저야말로……. 선배님이 앞서 터트려주신 덕분에 기소까지 할 수 있어서 체면치레했습니다.”
정색한 것이 무색하게 강현이 먼저 지난 일에 대한 감사를 전하자 머쓱해진 박영재가 어깨에 힘을 풀었다.
“기세나 변호사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불러낸 점, 사과드립니다.”
“아유, 아닙니다. 그나저나 류 변호사님. 저보다 기수도 높으신데 말씀 편하게 하시죠.”
“아뇨. 이제 검사도 아니니 함부로 그럴 순 없죠.”
“제가 불편해서 그럽니다. 제 나름 선배님을 존경하기도 했고, 이렇게 뵙게 된 것도 영광인지라.”
박영재의 머릿속에서 변호사와 검사 사이를 오가던 애매한 관계가 ‘선배님’으로 결정 났다.
‘그럼.’ 하고 강현도 일부러 팽팽하게 만들어 놓았던 분위기를 슬쩍 풀었다.
“요즘 일이 많지 않습니까?”
박영재가 소속된 검찰 강력부는 주요 인지수사의 부서 중 하나였다.
주로 강력 사건과 더불어 조직폭력배, 마약 수사 등 일반 경찰이 담당하기 힘든 사건이 주를 이루었다.
개중에 박영재는 마약 수사 담당이었다.
“아시잖습니까. 요즘 젊은 친구들 무서운 줄도 모르고 쉽게 약물에 손을 대니 하루에도 수십 건의 파일이 책상에 쌓이네요.”
옛날엔 조직폭력배들이나 손을 대던 범죄였는데,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진 지금 시대엔 오히려 평범한 일반인들이 저지르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다.
특히 해외 유학생들이 호기심에 접근했다 중독되는 사례들이 많았다. 그들이 암암리에 들여온 각종 약물은 너무 쉽게 다른 이들에게로 전파됐다.
이제 마약 청정국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해져 버린 실정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대한민국의 수사방식도 진화했다.
“‘레드 릴리’라고 들어봤습니까?”
“신종 약물인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 베이스가 뭔지, 어떻게 생겼는지 실체가 파악되지 않아 수사가 진행되지 않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실체가 있다면 수사 가능하겠습니까?”
“인지수사요?”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약 사건은 정황증거만으로도 수사가 가능하긴 한데…….”
박영재가 말꼬리를 흐렸다. 갑작스러운 만남은 그렇다고 해도, 변호사인 강현이 직접 수사를 의뢰한다는 게 여간 보통 일이 아닌 듯싶었다.
“짜라잔-.”
“……이게.”
“이 정도면 정황증거가 아니라, 직접증거죠.”
장철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상 위로 두 개의 지퍼백을 올려놓았다.
하나에는 삼각형 빨간 알약이 담겨있고, 또 다른 하나엔 단발로 보이는 머리카락이 담겨있는.
“아주 우연히 만나, 증거를 남겨 준 사람~.”
“그게 누굽니까?”
옛 노래를 개사해 리듬 타며 말하는 장철호를 박영재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쳐다보았다.
“대호 그룹의 희대의 망나니 황유라라고, 박 검사님도 아시죠?”
그는 아주 고마우신 분이라고, 뒷말을 덧붙였다.
“이걸, 어떻게.”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죠! 증거에 신빙성이 있는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수사를 진행할 때 기본이잖습니까?”
박영재의 말에 턱을 매끄럽게 쓸어내리던 강현이 세나를 힐끔 본 뒤 말을 이었다.
“증거 신빙성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황유라에게서 빼냈으니까.”
“변호사님이 직접이요??”
“선배가요??”
이번에는 박영재뿐만이 아니라 세나의 눈도 화등잔만큼 커졌다.
그가 진행하려 하는 계획에 대해서는 대충 설명을 들어 알고 있었으나, 류강현이 직접 황유라를 만났을 줄은 모르고 있던 터였다.
“강탈입니까? 아님, 협박?”
박영재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만약 협박으로 채집한 증거라면, 증거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상대측에서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약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도 있었고, 약물 자체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며 범행을 부인해버리는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박 검사님 머릿속엔 류강현 변호사님은 그런 이미지군요. 존경한다, 어쩐다는 빈말이겠네요.”
옆에서 지켜보던 장철호가 박영재의 어깨를 두툼한 손으로 토닥거렸다.
“그, 그게, 아니라.”
당황한 박영재가 허공에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지만, 장철호는 다 이해한다는 듯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상 너머 강현의 얼굴 언저리를 받쳤다.
“박 검사님. 류강현 변호사님 얼굴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