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이란투석(以卵投石)
(95/120)
95화. 이란투석(以卵投石)
(95/120)
95화. 이란투석(以卵投石)
2022.05.28.
늦은 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서정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젖어있었다.
밖에 비가 온 지도 몰랐던 터라 그녀의 몰골을 보고 강현은 적잖게 놀랐다.
“…….”
“다른 사람한테 말할 수도 없고, 말할 사람도 없어요. 류 검사님, 저 진짜 너무 수치스럽고, 무서워요.”
“…….”
“검사님이 들어주시면 안 돼요? 제 사수잖아요.”
젖은 옷이 달라붙어 몸의 실루엣이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그녀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추위 탓인지 두려움 탓인지 딱딱딱, 치아가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강현은 제 의자에 걸쳐둔 재킷을 집어 들고 서정연에게로 다가갔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어깨 위로 재킷을 둘러주며 참고인들을 조사할 때 쓰는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철제 의자에 서정연을 앉혀두고, 뜨거운 커피믹스 두 잔을 손에 들고 돌아왔을 때쯤에 문 너머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서정연은 한껏 몸을 웅크러뜨린 채 북받쳐 오른 설움을 참지 못하고 끅끅 오열하고 있었다.
강현은 이런 모습을 한 여자들을 아주 잘 알았다.
형사부에 있을 때 종종 마주한 적이 있었기에.
그리고 오랜 기억 속의 한 여인도.
회식 때 성추행을 당했다는 서정연의 이야기는, 퍽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 상대가 부부장 검사인 ‘고상한’이라는 점만 빼면.
고상한은 평검사들 사이에서도 꽤 젠틀한 이미지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검사장의 대학 동문으로 직속 라인이기도 했고.
‘이름하고는 따로 노는 양반이 햇병아리 신입 여 검사를 성추행했다라. 와이프가 고위급 장관의 둘째 딸이 아니었나?’
정략결혼이긴 해도 슬하에 자식이 둘이나 있으며, 또 금실이 좋기로 도 유명했다.
‘그런 사람이 대체 왜 같은 지검의 여 검사를 건드렸을까…….’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하긴.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새끼들에겐 하나같이 핑계가 있지. 술에 너무 취해서, 혹은 상대가 먼저 나를 유혹했다는 개 같은 소리. 그저 만만해서 건드린 거면서.’
오랜 시간 지켜본 적이 있었다. 성폭력 피해자의 삶을.
그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비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태어난 강현은 성과 관련한 범죄를 지독히도 혐오했다. 그래서 형사부 시절 악랄한 수사로 이름을 날렸다.
가해자를 쥐잡듯이 잡거나. 또는 먼지를 털듯 탈탈 털어내 아직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은 여죄를 찾아낸다거나.
아예 처음부터 기소할 때 온갖 죄명을 갖다 붙어 구형을 세게 때리거나.
어쩌면 일종의 보복이었을지도 모른다.
십오 년이란 세월을 불안에 시달려야 했던 날들과 열다섯에 혈혈단신이 되어야 했던 일에 대한.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실현 가능성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내게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고상한 부부장 검사를 고소라도 하겠다는 건가?”
“하겠다면, 도와주실 수는 있으세요?”
“하아…….”
강현이 헝클어진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같은 평검사도 아닌 부부장 검사. 게다가 그는 강현의 초임 검사 시절 사수였던 선임검사이기도 했었다.
워낙 살갑지 않은 강현이라 그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상사와 부하로서 큰 트러블도 없는 사이였다.
“곧 부장검사로 승진을 앞둔 사람인데…….”
“.......”
“상부의 재가 없이 검사장 핵심 라인 검사를 기소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서정연은 입술을 꾹 말아 삼키며 하고픈 말을 삼켰다.
그러나 강현은 그녀가 뭘 말하고 싶은지 누구보다 잘 알아들었다.
“성폭력 특별법에 따른 조항 중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및 추행죄’라고 하고 싶은 거야?”
위계질서를 이용해 상사가 부하직원을 강제로 추행했을 때는 그것이 기존의 죄보다 죄질이 더욱 나쁘다, 하여 생긴 특별법이다.
“그건 바깥세상에서나 통하는 법이고, 여긴 무소불위의 권력 집단이니까. 없던 죄도 만들고, 있던 죄도 없애주는.”
“증거도 없는 성추행이니, 징계조차 받지 않겠죠.”
그녀에겐 미안한 말이었지만, 고소장을 작성하는 동시에 인사발령을 받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승진은 물 건너가고, 조직에서 떨어져 나온 암세포인 양 여기저기를 떠돌다 한직으로 좌천되거나, 옷을 벗게 될지도 모른다.
“......알아요. 제가 그걸 왜 모르겠어요. 저도 검산데…….”
서정연은 참았던 눈물을 다시 터트렸다.
이란투석(以卵投石). 일명 계란으로 바위 치기.
더럽게 꼬였네.
안타깝지만, 도와줄 수 없다고 말을 해야 했다. 지극히 냉철하고 이성적인 뇌는 그렇게 말하라고 독촉했다.
그러나 강현의 입은 뇌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른 말을 뱉었다.
“도와줄게.”
알량한 연민이었을까? 결국, 그것이 독이 되었다.
“뭐 내게 큰 걸 바라는 건 아니었어. 바람막이가 되어 달라는 거였지. 회식 때나, 혹시 부부장 검사와 따로 만날 일이 생기면 전화로 위치 확인을 해달라는 정도가 다였어.”
강현이 고저 없는 어조로 세나의 품에 기대어 말을 이었다.
“머리가 아주 어떻게 된 건 아니었지. 그 집단에서 그것도 나보다 까마득하게 높은 상사를 기소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서정연은 도와준다고 나선 강현에게 뜻밖의 정보를 물어다 주었다.
강현이 내사하고 있던 스폰서 검사에 관한 정보였다
“혹시 이게 류 검사님이 하는 일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뒷얘기가 궁금한 화두를 던져두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었다.
“회식 끝나고 부부장 검사님이 저를 따로 불렀어요. 왜 부르는지, 하필 호텔 룸으로 부른 건지, 회식 때 제가 뭔가 말실수를 했나, 이것저것 고민하느라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말꼬리를 흐리며 아무도 없는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복도에서 어떤 남자와 마주쳤어요. 근데 낯이 익어서 나중에 알아보니……. 대호 그룹 황유찬 전무였어요.”
“고상한 부부장 검사한테 스폰서가 있다는 말이야?”
“확실하진 않아요. 그런데, 지금 대호 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조사받고 있잖아요? 그 사람을 특수통 부부장 검사가 있는 객실 복도에서 마주친다는 게 우연일까요?”
우연일 리가.
스폰서 검사 사건을 공유하기 시작한 이후로 서정연은 활기를 되찾았다.
제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힌 고상한 부부장 검사의 등에, ‘말뚝을 박을 순 없어도, 뒤통수 한방을 세게 때려줄 수 있지 않을까요?’ 하며 웃기도 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검사와 스폰서의 유착 관계를 파면 팔수록 그녀의 야욕도 함께 몸집을 키웠다.
내수 조사가 최고의 궤도에 올랐을 때, 서정연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검장의 결재와 승인을 목전에 둔 늦은 새벽.
서정연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류강현을 팔아넘겼다. 고상한에게, 그것도 헐값에.
세나는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추려 강현의 머리통을 꽉 끌어안았다.
당사자가 이토록 덤덤한데 제가 뭐라고 차마 지나간 일에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읽은 듯 강현은, ‘옛날 일이야, 이젠 괜찮아.’ 하며 세나의 등을 토닥토닥했다.
“선배는 화도 안 나요?”
“나지. 왜 안 날까. 지금도 아주 많이 나 있는 상태지.”
화가 난다면서 옅게 웃기까지 하는 그를 세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얼마나 화가 났을까.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에 울화가 콱콱 차오르는데, 강현은 너무 태연자약했다.
맹수인 줄 알았는데, 이빨은 다 빠져서 아주 순둥이가 따로 없다.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런 일이 있었는지.”
세나는 강현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곤 온순한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다짐했다.
새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데, 가슴이 그렇게 미어질 수가 없었다.
이제 이 남자에게 누구도 상처를 입힐 수 없도록 내가 지켜줘야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른다.
“내가 말했잖아. 아무리 철저히 계획을 세우고, 앞을 내다본다 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고.”
“특히 그 계획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 사람의 신뢰와 관련될 일일 때, 라고도 했죠.”
“그래. 말 그대로 크게 뒤통수를 맞았지.”
암. 그렇고말고.
저 혼자 잘났다고 의기양양했던 류강현이 뒤통수를 맞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렇다고 자기 죄를 감추기 위해 선배한테 성희롱당했다, 소문을 낸 건 너무 선을 넘은 거 아녜요?”
“그것도 고상한 검사가 서정연과 손을 잡기 전 내건 조건이겠지. 신경 안 써.”
강현은 신경을 안 쓰다고 했을지언정, 제가 알게 된 이상 쉽게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감히 내 남자에게 그런 상처를 주다니.
다른 건 몰라도 서정연, 너는 꼭 내가 한번은 조진다.
“다만-.”
“네?”
“받은 게 있으니 돌려줘야지. 양아치도 아니고. 그냥 떼어먹을 순 없잖아?”
“…….”
복수를 대신 해주겠다는 계획은 취소다.
순간 잊고 있었다. 이 인간이 호락호락 당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눈에 콩깍지가 씌었나, 천하의 맹견 류강현을 온순한 강아지와 비교하다니.
순간 온순해 보였던 눈동자에서 고요한 광기를 읽었다.
“게다가 난 항상 받은 것의 몇 배로 돌려주는 타입이라.”
세나가 쭈뼛거리며 그의 뺨에 올려진 손을 거두었다.
인간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 순간 세나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괜히 찜찜하게 오금이 저려 왔다.
***
오늘따라 옆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너무 따끔거렸다.
가사 전담팀 막내 이효원의 브리핑이 시작됐는데, 오직 한 명만은 태블릿 PC가 아닌 세나만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태연한 표정으로 태블릿과 이효원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세나가 나직하게 한숨을 뱉었다.
“집중 좀 합시다. 한여진 변호사님.”
보다 못한 세나가 태블릿 펜슬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경고하자 한여진은 입을 댓 발로 내밀고 흥 콧방귀를 뀌었다.
“하아…….”
세나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한여진이 왜 저런 식으로 구는지 대충 예상이 갔다.
입이 근질근질하겠지.
누군가의 집무실에서의 어떤 행위를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나름 심각한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왜. 그렇게 됐지?’
정신을 차려보니 제 입술 위에 뜨겁고 촉촉한 입술이 맞붙어있었다.
가사 전담팀 미팅 10분을 남겨두고 도대체 왜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여우한테 홀린 것 같았다.
내려다보던 시선이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달라져 있었고, 블라우스 리본은 헝클어져 있었다.
‘진짜. 류강현은 미쳤어!’
세나의 립스틱을 죄다 먹어 치워버린 그의 입술이 어느새 붉은색을 띠며 반들반들 윤이 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관능적인지, 립스틱이 번진 남자의 입술에 흥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가 온몸으로 풍겨대는 성적 매력에 넋을 잃은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었다. 그리고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쉬워 다시 입술을 겹치고 말았다.
‘그때 만약 문밖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가사 전담 미팅 5분 전. 한여진이 그 복도를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강현의 말대로 이 미팅은 저 없이 진행됐을 게 뻔했다.
세나는 또 한 번 강현의 철두철미함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한여진을 발견하고 당황한 세나와는 달리 그는 무척이나 평온한 모습이었다.
마치 창 너머에 한여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처럼.
“사내에 도는 소문이 하나 있던데.”
“……들었어요?”
“들었지. 그리고 그 소문이 누구 입에서 나왔는지도.”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는데. K 법무법인 공식 스피커 한여진은 주둥이질로 패가망신할 상이다.
“이걸로 사람들에게 일일이 말하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군.”
강현이 손끝으로 제 입술에 묻은 립스틱을 쓱- 닦아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 손으로 립스틱이 뭉개진 세나의 입가를 매만지며 빙긋 웃었다.
“설마…… 한 변호사가 보고 있던 거 알고 키스한 거 아니죠?”
“글쎄.”
“…….”
“어떤 식으로 소문이 날지, 기대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