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 여자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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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그 여자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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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그 여자 예뻐요?
2022.05.24.
뜬구름 잡기식 허위 진술 속에 진실은 점차 퇴색되고, 수사는 방향성을 잃어 애꿎은 땅만 파고 있었다.
그 땅을 촉촉하게 적셔준 단비가 바로 일한 건설 비자금 자료였다.
“아. 그때 그 검사가 박영재 검사였군요. 일머리가 괜찮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박 검사도 선배에 대해 비슷한 말을 했어요. 악명은 높지만,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번 만나보실래요?”
의리도 있고, 사명감도 있다.
게다가 검찰 내부에 있는 사람이면서 강현에게 호감을 갖고 있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음…….”
자신의 계획이 성공하려면 필수 불가결한 존재임과 동시에 일머리까지 있으니 쾌재를 불러도 열 번을 더 불러야 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강현의 입에선 선뜻 그러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뭘 고민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만나봐야죠! 제가 만났을 땐 생긴 건 어리숙했지만, 어디 가서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닐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박영재 검사가 입이 무거운 건 확실해요. 사실 예전에 제가 선배 뒷조사를 좀 해봤는데, 끝까지 말을 안 해주더라구요. 저 완전 배신감 느꼈잖아요.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인데.”
“일단은 만나나 보시죠.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겸.”
“하아…….”
강현이 고민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박영재 검사를 소개해주겠다고 나선 이가 기세나라는 것.
그가 몇 개월을 준비한 계획에 세나가 등장하는 설정은 플랜 A와 B, 혹시나 일어날 불가피한 상황에 대비한 C에도 없었다.
“뭐가 문제예요?”
“문제라기보단 걱정이지.”
이미 채성민이 세나에게 어설프게 입을 턴 이상, 강현이 지금 계획하고 있는 일에 대해 그녀가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녀를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현 상황에 꼭 필요한 존재의 부재가 너무나도 컸다.
‘판이 커지면 K 법무법인 자체에서도 대응해야 할 테고…….’
그래도 깊게 개입하지 않도록만 신경 쓴다면, 괜찮지 않을까. 최악의 수까지 단시간에 계산을 끝마친 강현이 결심을 굳혔다.
“장 실장님.”
“네, 말씀하시죠.”
“잠시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장철호가 집무실을 나가고, 강현이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시간 괜찮아?”
“10시에 전담팀 미팅 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그녀의 반응에 따라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었지만, 일단 소파에 앉길 권했다.
사뭇 달라진 분위기에 엉거주춤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 강현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검사 시절 내 소문은 대충 들었을 거고.”
정말 말 그대로 대충이었다. 그것도 이상한 양념이 듬뿍 첨가된.
세나는 그 소문의 진위에 대해 강현에게 묻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가장 궁금한 게 뭐야?”
“궁금한 거 없어요. 어차피 헛소문인데요.”
“정말?”
“…….”
“…….”
째깍째깍.
손목에 채워둔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하나 있어요…….”
“뭔데? 뭐든 대답해줄게.”
“그…….”
다른 건 다 괜찮다. 류강현이 절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지금 와 생각해보면 왜 그런 소문에 휘둘렸는지 모를 만큼 강현에 대한 세나의 믿음은 아스팔트 바닥보다 두꺼워진 상태였다.
그런데 딱, 하나. 진짜 따악- 하나 뾰족한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아주 사소한.
“그 후배라는 검사…….”
목구멍에서 뽑아낸 가시가 혓바닥 아래서 뭉개졌다.
웅얼대는 말속에서 ‘검사’까지만 들은 강현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뭐?’ 하고 되물었다.
이제 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도 뭐 하고, 그렇다고 물어보기도 뭐 한 질문을 두고 세나는 큰 결심이라도 한 양 눈을 질끈 감았다.
“선배랑 이상한 소문으로 엮인 그 후배 여검사. 예쁘냐고요!”
“…….”
“…….”
또다시 찾아온 침묵 속에 세나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친 기세나. 이 미친! 그것도 질문이라고!
힐끔 쳐다본 강현의 얼굴은 황당하다 못해 당황스러울 정도로 굳어있었다.
“모, 못 들은 걸로 해요. 아니 그러게 궁금한 거 없다니까 왜 물어봐서! 그 후배 검사가 이쁘든 말든 나랑 뭔 상관이야? 그래. 아무 상관없지. 뭐 나랑 언니 동생 할 사이도 아니고. 아, 나이는 누가 더 많아요? 이쁜데 어린 건 또 아니죠? 아냐. 아냐. 이 질문도 못 들은 거로 해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세나가 허공에 손을 마구 휘저었다.
“어우,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났나 봐. 아직 잠이 덜 깨서 헛소리하네. 와, 아님, 더위를 먹었나? 선배, 방이 좀 덥지 않아요?”
이번에는 손을 펼쳐 얼굴 위로 파닥파닥했다.
“지구환경 너무 파괴돼서 걱정이에요. 우리나라가 아열대기후라니. 그래서 그런가, 요즘엔 6월 초만 돼도 완전 더워서 에어컨 없인 못 살겠잖아요. 안 그래요?”
세나는 횡설수설 자신이 던진 말을 수습하려 아무 말이나 내뱉다가 결국, 허공에서 바들거리던 손을 끌어내려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가렸다.
남부럽지 않은 학력과 노후 걱정 없는 전문직 종사자.
부귀영화가 아닌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하는 이 시대의 쿨한 여성은 오늘부로 죽었다.
“기세나.”
나직한 부름에 세나가 푹 숙인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알겠는데, 저 지금 쪽팔려서 죽을 것 같으니까 5분만 말 걸지 말아 줄래요?”
“세나야.”
5분만 내버려두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다정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대는 강현이 야속할 지경이었다.
왜 하필 ‘기세나.’가 아니고 ‘세나야.’인데!
“왜요. 왜! 왜 자꾸 불러요!”
“내가 갈까, 네가 올래?”
저건 또 뭔 소리인가 싶어, 세나는 손 아래 감쳐둔 얼굴에서 눈만 슬쩍 들어 올렸다.
강현이 세나를 마주 본 채 웃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웃음을 참아보려 입꼬리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자꾸만 풀리는 입매가 기어이 호선을 그렸다.
유머 코드만 빼고 완벽한 인간이 저를 보고 웃는다.
“내가 가면, 가는 길에 방문을 잠그고 갈 거야.”
검은 동공에 떠오른 이채엔 강한 애정을 동반한 어떤 욕구가 담겨있었다.
“그렇게 되면 10시 미팅은 기세나 팀장 없이 진행되겠지.”
“여기! 회사고! 선배 집무실이에요!”
누가 봐도 당연한 말을 그럴듯하게 외쳤다.
그러자 강현의 그린 듯한 미소가 살짝 삐뚤어졌다.
“그게 뭐 대수라고. 내 영역에서 내가 뭘 하든 누가 뭐라 그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안 그래도 큰 키가 오늘따라 더욱 커 보였다.
강현이 풍기는 분위기에 내재된 위압감은 특별한 모션을 취한 것도 아닌데 상대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세나의 시선이 그를 따라 천천히 위로 들렸다.
은은한 웃음. 그 너머에 존재하는 욕망이 무얼 뜻하는지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내가 갈게요! 거기 있어요! 딱, 거기.”
지레 겁을 먹은 세나가 재빨리 테이블을 돌아 강현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강현은 세나를 번쩍 들어다 제 허벅다리 위에다 앉혔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한 세나가 버둥거리자, 그가 허리에 팔을 둘러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머리통을 세나의 빗장뼈에 기대서 숨을 한껏 들이켰다.
“어제부터 이렇게 안고 싶었어. 아, 어제부터라는 말이 우습지. 꽤 오래전부터니까.”
“……오래전 언제요?”
“몰라. 그냥 어느 순간부터 그랬어. 몇 번 퇴짜를 맞아서 더 그랬나?”
말꼬리에 물음표를 달고 귀엽게 투덜거리는데, 순간 세나는 정말 자기가 그랬었나 할 뻔했다.
늘 예기치 못한 찰나에 불쑥, ‘방어’라는 단어조차 떠올리지 못하게 저를 함락하던 남자이지 않았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간의 행적들이 떠오르자 세나는 몹시 억울해졌다.
“퇴짜……. 퇴짜는 무슨! 순 멋대로 안고, 키스하고 그랬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오늘도 봐줘.”
세나는 품속으로 파고드는 남자를 더는 밀치지 못하고 몸에 힘을 풀었다.
“아까 질문 이어서 하는 건데요. 왜 그런 소문이 돈 거예요?”
“그 소문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지.”
‘류강현’을 떠올리면 ‘특검검사’가 아니라 ‘성추행 검사’라고 자연스럽게 따라붙도록 설계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소문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성과 관련된 스캔들이었다.
추악하고 지저분한 데다 은밀하게 행해지는 범법행위다 보니 뇌리에 탁, 박힐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가 그딴 소문을 냈는데요?”
“검찰 내부에서 왕따를 당했거든.”
“왕따요?? 선배는 왕따를 당하는 쪽이 아니라 왕따를 자처하는 쪽 아닌가요? 자발적 아웃사이더.”
강현이 풋, 하고 웃었다.
“넌 도대체 날 어떤 식으로 보고 있는 거야?”
“보여주는 대로 보고 있죠. 독. 고. 다. 이.”
그것도 맞는 말이다.
굳이 인간관계에 대해서 집착하는 편도 아니었고.
검사라는 직업을 택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검사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사법기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독립된 사법기관이라고 칭하면서도 그 속사정은 전혀 달랐다.
주먹구구식의 수사, 온갖 편법과 비리가 난무했다.
그들의 잣대에 빗대어 보면 강현은 돌연변이였다.
“암암리에 스폰서 검사를 조사 중이었는데,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했어.”
엮인 인물들이 너무 많았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권력과 바로 맞닿아 있는 자리에 있다 보니 오히려 도덕 불감증에 걸리고 만 것인지.
아니면 불법을 저지르는 놈들이 저렇게 잘 먹고 잘사는데, 나라고 왜 못사나 억울했던 건지.
“기소권을 무기 삼아 형량을 딜하고, 유예하고. 안 하는 놈들이 오히려 무능력하단 소리를 듣던 때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검찰 내부에서 따돌림을 당한 거예요?”
“괘씸죄지. 감히 평검사 나부랭이가 윗선을 들쑤시고 다녔으니까.”
꽤 흔한 일이었다. 군대와 마찬가지로 검사들의 세계는 상명하복의 체계로 이뤄졌다.
검사는 객관적인 옳고 그름보다 조직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오래된 썩은 관행.
어지간한 또라이가 아닌 이상 명령 불복종이란 있을 수 없었다.
더불어 상관의 비리를 그보다 한참 밑의 기수가 저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검사라는 조직에서 가장 큰 죄는 배신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성추행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데요?”
“그 스폰서 검사 사건을 말아먹게 된 이유가 그 후배 때문이었거든.”
같은 방에 근무하게 된 후배 검사는 2년 차, 이제 막 신입 딱지를 뗀 검사였다.
서정연은 그전까진 공판 검사로 법원을 오가다 수사 검사로는 첫 발령을 받았다.
다들 그녀의 수사 검사 첫 발령지의 직속 사수가 강현이라는 사실에 혀를 끌끌 찼지만, 오기와 열정으로 똘똘 뭉친 서정연은 강현의 방식을 곧잘 따라왔다.
질문도 많고, 습득력도 빠르고. 하나를 가르쳐주면 못해도 셋은 깨우쳤다.
씁쓸함을 지우지 못한 채 강현이 읊조렸다.
“똑똑한 친구였어.”
“역시. 뭐든 하나가 특출날 줄 알았어. 마음에 들었나 봐요?”
“그렇다기보다는 누가 생각나더군.”
“누구요?”
비록 아주 잠깐이었을 뿐이지만, 강현은 서정연을 보며 세나를 떠올렸다. 악바리처럼 파고드는 근성이 똑 닮아 있었으니까.
지금 와서 보면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왜 그때 그런 생각을 떠올렸는지.
아마도 일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잠시 어떻게 됐었던 걸지도.
덕분에 사수로서 서정연을 꽤 많이 아꼈던 것 같다.
얼추 손발이 맞아가고 있던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잠수를 탔다.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시간이 길어지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피의자 소환과 참고인 조사부터 진행하고 있는 사건의 기일 등, 인수인계가 없이 벌어진 일이라, 모든 것이 엉망이 될 뻔한 상황에 부닥쳤다.
안 그래도 지검에서 일이 제일 많기로 소문난 강현과 검사실 식구들은 한동안 패닉 상태였다.
그렇게 연락도 없이 일주일 만에 돌아온 서정연은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처음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의 무책임한 행동에 질려버린 강현은 어떤 훈계도, 조언도 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어차피 순환 근무를 가게 되면, 더는 저와는 상관없는 사람이 될 테니까.
서정연이 오기 전까지도 혼자 일했고, 종종 도움이 되었다고 하나 당장 그녀가 없다고 해서 크게 아쉬운 것도 없었다.
“류 검사님.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사수와 부사수 사이에서 그저 같은 검사실을 쓰는 동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사이로 정리가 됐을 무렵.
퇴근한 줄 알았던 서정연이 다시 돌아와 강현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