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풀 액셀 직진남 (93/120)


93화. 풀 액셀 직진남
2022.05.21.


16551868804488.jpg

 

16551868804496.jpg

“장 실장님, 경찰청 마약 수사팀에 아시는 분 계신다고 했죠?”

16551868804501.jpg

“경찰 쪽이야 빠삭하다지만, 이게 일반적인 상황이 아닌지라. 이 정도 건이면 검찰에서 먼저 움직여 줘야 하는데 말입니다.”

마약 수사는 검찰의 인지 수사로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최근에는 경찰청으로 이관되고 있는 과정 중에 있었다.

형사소송 관련 검·경찰법 개정에 따른 변화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마약 수사는 대검찰청 강력부 마약과 담당이다.

16551868804496.jpg

“일단은 시약 반응 검사부터 하죠.”

머리카락에서 나온 약물과 이 빨간 알약의 상관관계부터 공식기관에서 인증받는 절차를 밟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려면 검찰청이든, 경찰청 마약수사대든 도움이 필요했다.

16551868804501.jpg

“신종 약물이라면 시약 키트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일 것 같지 않은데.”

16551868804496.jpg

“밑져야 본전이죠. 이 알갱이에 뭐가 들었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데. 분석의뢰도 같이하죠.”

이 정도까지 물어다 줬는데도 못 먹으면 싹 다 갈아엎어야지.

16551868804496.jpg

“황유라 미국에 있을 때 자료 아직 조사 중이죠?”

강현은 황유라가 묵었던 호텔과 그 당시 사망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건에 개입된 사람들이 몇이나 있는지에 대해 따로 조사를 요구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짤막한 기사 한 줄이라도 나온 게 있다면 그것까지 전부. 빠짐없이.

16551868804501.jpg

“네. 열흘은 더 달라고 하던데, 어찌나 짜증을 내던지. 수행비 더블로 올려달라던데요?”

제대로 된 자료만 가져오면 주는 것쯤이야 문제 될 게 없다. 그런데 열흘이라.

16551868804496.jpg

“뭐 미국이라도 갔다 온답니까?”

16551868804501.jpg

“그러게요. 아무래도 깊숙이 묻어둔 자료다 보니 찾는 게 좀 힘들 거라 예상은 했지만 좀 걸리네요.”

16551868804496.jpg

“최대한 빨리 자료를 받고 싶은데.”

마약 수사의 진행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강현에겐 그 자료가 필요했다.

황유라가 손에 쥔 목줄을 제가 받아 쥐고 흔들려면.

강현이 미간 사이를 좁히곤 ‘쓰흡-’ 숨을 삼키며 고민에 잠겼다.

그러는 동안 저 나름대로 생각에 잠겼던 장철호가 화색이 도는 얼굴을 번쩍 들어 올렸다.

16551868804501.jpg

“그거 제가 가면 안 됩니까?! 저는 한 일주일이면 될 것 같은데? 아, 미국 한 번도 안 가봤는데!”

16551868804496.jpg

“……그걸 말이라고.”

16551868804501.jpg

“심지어 괌도 못 가본 거 아세요?”

16551868804496.jpg

“장 실장님.”

16551868804501.jpg

“남들 다 가는 괌인데! 저 신혼여행도 제주도로 갔잖아요!”

16551868804496.jpg

“그렇게 가고 싶어 하시는데, 이참에 아주 보내드릴까요?”

살벌하게 치켜뜬 눈이 농담으로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장철호는 머쓱해진 분위기를 무마시키려 하하하, 어색하게 웃어보았지만, 어째 노려보는 시선은 더욱 따끔해져 왔다.

16551868804501.jpg

“……어흠. 녹음파일은 어쩌실 겁니까? 이것도 넘기실 건가요?”

16551868804496.jpg

“아뇨. 그 파일은 따로 쓸 데가 생길 겁니다.”

대호 그룹의 황유라. ‘마약 사범’, ‘검찰에 송치’. 과연 이 타이틀을 단 기사를 뉴스에서 볼 수 있을까?

반짝, 이슈가 될 수는 있어도, 글쎄.

금방 끓어올랐다 바로 식어버리는 냄비가 될 게 자명했다.

어차피 그럴 거라 이미 예상하던 터였다.

강현은 오히려 이 사건을 시작점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 조금 더 깊숙이. 그들만의 세계에서 만연하게 일어났던 일을 파헤칠 계획이었다.

16551868804496.jpg

“어차피 우리의 계획은 사실 이 사건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16551868804501.jpg

“가능할까요?”

16551868804496.jpg

“사건이 묻힌다면 우리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 되겠죠. 대호 그룹을 내사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도록 만들거나, 검찰 내부를 압박할 수 있는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

16551868804501.jpg

“류 변호사님이 계획하시는 일엔 적어도 강력부 검사 한 명은 필요한 거 아닙니까?”

필요하다. 반드시. 그가 검사 시절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저 대형 로펌 파트너 변호사일 뿐인 강현이 검찰 내부 조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16551868804501.jpg

“근데 류 변호사님이 중앙지검하고는 워낙 척을 지고 계시니 선뜻 나서줄 검사가…….”

장철호가 말끝을 흐리며 강현의 눈치를 살폈다.

안 그래도 그 일로 눈 밖에 나, 검찰청 내부에 대외비라는 이름 아래 공문까지 떨어졌는데. 그의 계획에 동참해줄 검사가 있을 리 없었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라면 모를까.

특히나 내사가 들어가게 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수사 지휘는커녕 정보나 제대로 얻을 수 있을까.

강현을 대신해 선봉에 서줄 말이 필요한 상황인데 마땅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16551868804501.jpg

“사건 특성상 강력부나 특수부가 맞는데. 그쪽 부서 검사들은 어느 정도 짬이 있을 테니 더더욱 나서기를 꺼리겠죠. 난다 긴다 했던 류 변호사님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다 봤을 테니.”

1655186885146.jpg

“강력부 검사요? 나 아는 사람 있는데?”

두 사람이 심각한 난관에 봉착한 그때, 해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느닷없이 등장한 인물에 커다란 덩치의 장철호는 푸드덕거리며 의자에서 펄떡 뛰어올랐고, 강현은 소리 없이 눈만 크게 떴다.

목소리의 주인이 세나인 것을 확인한 장철호는 가슴을 쓸어내릴 새도 없이 태블릿 PC며 테이블 위에 놓인 증거자료를 재빨리 감췄다.

그 모습에 되레 놀란 세나가 뒷걸음질을 쳤다.

1655186885146.jpg

“아- 죄송해요. 노크를 몇 번이나 했는데 대답이 없어서…….”

16551868804496.jpg

“미안. 집중하고 있느라 못 들었나 봐.”

1655186885146.jpg

“그래도 문을 함부로 여는 게 아닌데. 어. 중요한 얘기 중이었다면 다시 나가볼게요.”

세나는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것 같은 분위기에 뒷걸음질했던 모습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강현에 의해 손목이 붙들려 제자리로 돌아왔다.

좀 전에 크게 뜨였던 눈 대신,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가 은근함을 머금고 세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16551868804496.jpg

“주말에 가족들이랑 식사는 잘했어?”

세나가 수줍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눈동자는 어딘가 모르게 간지러운 기분이 들게 했다.

1655186885146.jpg

“네. 잘했어요.”

16551868804496.jpg

“이야기도 잘했고?”

1655186885146.jpg

“네. 뭐.”

사내 연애란 이런 맛에 하나 보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다정한 인사를 나누고, 퇴근 때 시간을 맞춰 저녁을 함께 먹고.

더불어 각자의 방도 걸어서 1분 거리도 안 되니,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할 시간에 마주 보고 커피도 마시고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고.

그렇게 세나가 천진난만한 생각에 빠져들 때였다.

16551868804496.jpg

“다른 할 말은?”

1655186885146.jpg

“어떤?”

16551868804496.jpg

“언제 인사드리러 가면 되는지, 구체적인 날짜도 안 정하고 온 거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말했을 텐데. 그럴 거면 왜 갔어? 나랑 놀지.”

1655186885146.jpg

“선배! 잠깐-.”

16551868804496.jpg

“아니면 내가 이따 기 대표님 찾아가서 따님과의 교-.”

1655186885146.jpg

“으아! 그만!”

세나가 두 손을 겹쳐 강현의 입을 텁, 막았다. 그리고 곧바로 사색이 된 낯빛으로 강현의 뒤에 있는 장철호를 살폈다.

경악으로 물든 장 실장의 얼굴을 목격한 순간, 세나의 귓등이 한껏 붉어지다 못해 홧홧하게 타올랐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장 실장은 목을 큼큼 가다듬으며 다른 곳으로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세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강현이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더욱 짓궂은 표정을 짓는 줄도 모르고.

16551868874771.jpg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제 입술을 누르고 있는 손을 슬그머니 끌어내리더니 더욱 가깝게 고개를 숙인다.

16551868804496.jpg

“입은 왜 막아?”

1655186885146.jpg

“장 실장님도 계시는데, 이럴 거예요?”

강현의 얼굴과 그의 어깨너머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세나의 눈동자가 참 바쁘게도 움직였다.

16551868804496.jpg

“내가 창피해?”

1655186885146.jpg

“아니, 그게 아니라!”

16551868804496.jpg

“아침부터 나 보고 싶어 찾아온 거 아니었어?”

‘평소 출근 시간보다 이른데?’ 하며 싱긋 웃기까지 했다.

맞는 말이다. 오늘따라 눈도 일찍 떠졌고, 강현이 무척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비밀연애는 안 하기로 했다지만, 누가 있는 자리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지는 몰랐던지라 그의 태도가 몹시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세나가 할 말을 찾지 못해 어버버거리고 있자, 멀찌감치 물러나 있던 장철호가 재빨리 둘러댔다.

16551868804501.jpg

“저는 다 알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없는 사람처럼 있을 테니……. 나누실 말씀 있으면 나누세요. 어…… 아니면, 제가 나가드려도.”

무척이나 떨떠름한 어투였다. 뒤이어 두툼한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비다 어깨를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아마도 처음 마주하는 강현의 다정한 모습이 낯설기 때문인 듯했다.

1655186885146.jpg

“……선배랑 연애하다 제 명에 못 갈 것 같아요.”

귓등만 붉히고 있던 세나는 이제는 얼굴까지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16551868804496.jpg

“적응해. 독거노인 만들 셈이 아니라면 나랑 오래오래 살아야 할 테니까.”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류강현은 어디 가고, ‘내 삶에 후진은 없다. 풀 액셀 직진’ 류강현만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태도로 보아 앞으로도 이렇게 하루에도 열두 번 세나의 심장으로 돌진할 게 뻔했다.

1655186885146.jpg

“과로사가 아니라 수치사로 명을 재촉할 줄은 몰랐는데.”

비뚤게 웃는 모습이 밉살스러워야 하는데, 그 모습까지 근사해 보이면 앞으로는 어떡해야 하나. 세나의 입술이 절로 한숨을 토했다.

정말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다.

10년 전의 악연이 연인이 되고, 그 류강현이 기세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더불어 이 남자가 연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1655186885146.jpg

“하아. 암튼 그 얘기는 있다가 다시 하고, 강력부 검사는 왜 필요해요?”

16551868804496.jpg

“일 하나 맡길 사람이 필요해서.”

세나는 반사적으로 무슨 일이냐 물으려다 입을 닫았다.

그와 연인이기 전에 저 역시 변호사였고, 그것이 의뢰인과 연관된 일이라면 같이 수임하지 않은 일에 대해 캐묻는 것은 실례였다.

16551868804496.jpg

“강력부 검사랑은 어떤 사이야?”

1655186885146.jpg

“연수원 동기예요. 의리도 있고, 사명감도 있는 타입이고. 무엇보다 입이 무겁죠.”

세나의 입에서 다른 남자에 관한 나쁘지 않은 평가가 줄줄 이어지자, 강현의 짙은 눈썹이 일순간 찌푸려졌다.

16551868804496.jpg

“그 사람이랑 친해?”

1655186885146.jpg

“나름 친하다고 해야 하나……. 아! 저보다는 오히려 선배한테 호감이 있을걸요?”

상대에 대한 경계 단계가 한순간에 뚝, 떨어지며 세나의 평가에 대한 신뢰도가 올랐다.

16551868804496.jpg

“누군데?”

1655186885146.jpg

“동부지검에 박영재 검사요. 아세요?”

16551868804496.jpg

“어려서부터 영재 소리 듣고 자랐겠네.”

세나가 입술을 작게 벌리며 강현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강현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뜨악했다.

1655186885146.jpg

“……다 적응해도 그건 적응 못 하겠어요. 아니 안 할래요.”

16551868804496.jpg

“뭘?”

1655186885146.jpg

“천지를 창조한 신이라고 100% 완벽한 건 아닌가 보네요.”

3박 4일을 곱게 빚어 만든 인간에게서 유머 코드는 쏙 빼버린 걸 보니.

강현은 어깨를 한번 으쓱인 뒤 뒤를 돌아 장철호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16551868804496.jpg

“실장님, 박영재 검사 아십니까?”

16551868804501.jpg

“동부지검 박영재 검사라…….”

머릿속에 저장된 프로필들을 재빨리 굴리던 장철호가 손가락을 튕기며 입을 열었다.

16551868804501.jpg

“2년 전, 류 변호사님이 전 국회의원 뇌물수수 혐의 수사할 때, 보강 자료 넘겨받았던 그 검사님 아니십니까? 자료도 꼼꼼해서 급물살을 탔었던 터라 기억나네요. 제가 직접 만났었죠.”

장철호의 말에 당시 기억을 떠올려보던 강현이 턱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16551868804496.jpg

“혹시 그 일한 건설 자료 말입니까?”

16551868804501.jpg

“네. 그 자료 보시고 류 변호사님도 제대로 일하는 놈이 한 놈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 하셨잖아요?”

워낙 큰 게이트다 보니 보강 수사를 해야 하는 일들도 많았고, 뛰어든 검사들도 많았다.

하루가 멀다고 참고인 조사가 이뤄졌지만, 권력의 맛을 알아버린 인간들은 죄를 감추는 데 프로급이었다.

개중에 가장 악질은 뭐 말 안 해도,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몸소 체험을 해보신 양반들이었다.

권력은 쌓기도 어렵지만, 무너뜨리는 것은 더욱 어렵다. 특히나 권력을 나눠 가진 이권 집단들이 모이게 되면 더더욱.

16551868953347.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