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희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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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희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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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희망 고문
2022.05.17.
주말 아침.
거하게 상이 차려진 식탁에 앉아 가족끼리 오붓하게 밥을 먹는 와중 징, 하고 울리는 핸드폰에 세나의 젓가락질이 멎었다.
강현에게 온 문자가 반가워 얼른 확인했다.
아, 아침에 먼저 문자 보낼걸.
세훈을 데리고 본가로 오느라 깜빡 잊고 있었다.
우리 금요일부터 1일인데.
이젠 정말 별 이유가 없어도 전화와 문자를 해도 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게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자를 확인한 세나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뭐라는 거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앞뒤 싹둑, 잘라먹고 툭, 던지는 문장 구성력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직접 뭘 말해달라는 거지?’
아무래도 이상해 답장을 보냈더니, 생뚱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 남자는 뭐가 다 이래? 우리가 사귀기로 한 지 한 달이 됐어, 일 년이 됐어?!’
고작 이틀이 지났는데 집안 인사를 운운하는 그가 아침부터 뭔 소린가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그렇게 내가 좋나? 싶어 어딘가 모르게 우쭐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나란히 누워 눈만 마주쳐도 설레었던 지난밤이 떠올랐다.
세나는 뺨 위로 확 끼치는 열을 식히려 물잔을 들었다.
미간을 좁혔다가 얼굴을 붉혔다가. 핸드폰을 보며 저 혼자 쇼하고 있는 세나를 주시하던 기장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무슨 일?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 뭐 어디서 연락이라도…….”
“아아…….”
아무 일도 없는 듯 넘어가는 건 무리인가.
세나는 젓가락 대신 물잔을 들어 목부터 축였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세나는 식탁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쓱 훑었다.
어딘가 모르게 시선이 불안정한 새어머니 윤모연부터 식사를 시작한 지 수분이 지났음에도 밥알이 줄지 않은 아버지 기장수와 그나마 조금 홀가분한 표정의 동생, 기세훈까지.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죠. 두 분은 그 얘길 언제 저에게 하실 생각이었어요?”
“어흠, 음.”
“이연화 씨가 직접 제게 찾아오지 않았다면, 끝까지 말씀 안 하셨겠죠?”
세나는 세훈을 한 번 흘겨본 뒤 말을 이었다.
“요 조그만 게 찾아와서 이상한 말을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세나야 그게 말이다……. 사실 네가 알아서 좋을 것도 없고 해서.”
이연화가 다시 나타난 목적을 알게 된 기장수는 제일 먼저 윤모연과 이 일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눴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윤모연은 분개했다.
“어떻게 엄마라는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그런 자각이 있었다면, 그 어린애를 병원에다 방치하지 않았겠지.”
“차라리 세나에게 빨리 알리는 게 어떨까요? 그런 여자라면 모르긴 몰라도 세나를 직접 찾아갈 것 같은데. 세나도 어린 나이도 아니니까-.”
“안 그래도 그 여자한테 받은 상처가 깊은데, 굳이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겠어? 모르는 게 나을지도 몰라.”
윤모연은 뭔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은 제삼자라는 걸 자각했다.
지금도 세나가 받을 상처가 걱정돼 마음이 수런거렸지만, 차마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세나의 기분만 살피고 있었다.
세나는 그런 윤모연을 바라보다 제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빠. 부모와 자식 사이가 몇 촌인지 아세요?”
그는 뭔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냐며 ‘당연히 일촌이지.’ 하고 대꾸했다.
“그럼 왜 부부 사이가 왜 무촌인 줄은 아세요?”
부모와 자식, 그들의 자식 사이는 이촌, 하물며 친인척들 사이에도 사촌, 오촌, 육촌이라는 촌수가 있는데 부부 사이는 무촌이었다.
언뜻 보면 그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뜻의 무촌이 퍽, 낭만적이다 느껴지겠지만, 까놓고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죽고 못 살아 하나가 되더라도, 이혼하면 아무 사이도 아니라서 무촌이에요.”
“…….”
“이 말인즉슨, 저와는 달리 아빠와 그 여자는 이제 아무 사이가 아니란 말이죠.”
지금 제 아버지의 아내는 윤모연이었고,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저를 키워준 사람도 윤모연이었다.
그리고 반쪽짜리 핏줄이긴 하나 남부럽지 않은 우애를 자랑하는 제 동생, 기세훈의 어머니였다.
누나를 위해서 간이고 쓸개고 내주겠다고 말하는.
“왜, 미련이라도 남아있으세요?”
“야, 너는!! 무슨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 내가 그 여자 때문에!”
“그럴 시간 있으면 어머니한테나 신경 쓰세요.”
“그건 내가 알아서 잘 해!”
“행여라도 그 여자한테 돈 쥐여줄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세나의 말에 버럭 성을 내던 기장수는 정곡을 찔렸는지 입을 헙, 다물었다.
“돈이 아깝지도 않으세요? 얼마나 더 뜯기려고? 그리고 그 여자 돈이 없는 것도 아녜요. 알아보니까 서울 시내에 브랜드 아파트 빚 한 푼 없이 자가로 갖고 있던데요, 뭘. 아빠한테 뜯어간 돈 잘 굴렸나 봐. 그 아파트 비싸던데.”
세나는 진심으로 더는 이 일로 가족들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도 오가지 않았으면 했다.
그녀가 정의한 가족이라는 개념 속엔 이연화의 자리는 없었다.
“더는 개입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해요.”
“뭘 어떻게 알아서 한다는 거냐?”
“일단 적합성 검사받을 거예요”
“뭐?!”
“누나!!”
“세나야, 그건……!”
그녀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어떤 일이건 차분함을 잃지 않았던 윤모연까지 합세해 언성을 높였다.
세나는 두 부자의 반응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나 윤모연의 반응에는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제 배 아파 낳은 세훈보다 자신을 더 친딸처럼 키웠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지금 느낄 복잡한 감정이 눈에 훤히 보였다.
“어머니.”
세나가 식탁 위로 팔을 뻗어 미세하게 떨고 있는 윤모연의 손을 잡았다.
“내겐 당신이 어머니예요. 이연화 그 여자가 아니라.”
“…….”
“이게 진짜 제 진심이에요.”
“그런데 어째서,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거니?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라면 절대 너에게 그런 짓을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거야. 물론 네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지만, 나는, 나는 네가…….”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술을 말아 삼키던 그녀가 눈물을 툭 떨구었다.
그 마음을 왜 모를까.
‘아마 당신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에게 절대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겠죠. 나도 그 여자 아니라 당신이었다면, 고민할 가치도 없이 내 간을 내어주었을 텐데…….’
자신이 아파죽겠으니 버린 자식의 배를 갈라 간을 내놓으라 아우성치던 누구와는 첨예하게 다른 반응이었다.
세나는 다시 한번 결심을 굳혔다.
“그래서요. 도저히 그 여자가 용서가 안 돼요.”
“그런데 왜?”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가 생각하는 그런 일을 할 건 아니니까.”
세나는 빙긋 웃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녀가 다시 젓가락을 들자, 다들 떨떠름함을 떨치지 못했지만,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세나는 윤모연이 차려준 정성 가득한 밥을 꼭꼭 씹어 삼키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희망 고문.
엄마란 사람이 제가 그리워 언젠가 돌아오진 않을까, 밤을 새워 기다렸던 제 어린 날에 대한 복수라고 해야 좋을지.
피가 마르고 눈물이 말라가던 날들이 지나, 엄마라는 존재에게 자신이 까맣게 지워진 것을 깨달았을 때 느꼈던 허무함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야 할지.
이제라도 딸이라는 존재에 대한 절실함을 깨우친 여자의 어리석은 고마움에 대한 보답일까나.
남자에 미쳐 자식을 버린 것은 용서해도, ‘엄마’라는 의미를 부정하게 만드는 그 여자의 만행을 이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부적합이 나오면 나오는 대로, 적합이 나오면 나오는 대로.’
고민은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을 테니, 일단 지금은 그것에 대해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마무리돼 갈 때쯤 세나는 아침에 사 온 디저트를 꺼내며 강현의 문자를 상기했다.
“그보다. 아빠. 우리 계약 말인데요.”
“응?”
“그거 계약 파기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아니, 뭔 마음이 또 이렇게 휙휙 바뀌는 거냐? 자존심이니 어쩌니, 하더니.”
“자존심도 자존심인데, 그 사람이 임도 보고 뽕도 따래요.”
“……류 변호사가 알아? 어쩌다가?”
언제는 R에게 손해를 끼친 게 아니라는 둥 그 계약서엔 문제가 없다고 했으면서, 강현이 계약서의 존재를 안다는 사실에 후환이 걱정은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됐어요.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아빠 사람 보는 눈 인정이요. 그 사람 진짜 멋있어. 그래서 뼛속까지 우려서 사골로 쪽쪽 빨아먹으려구요.”
“그게 왜 그렇게 연결돼?”
“배우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에요. 인생의 선배로서도, 같은 일을 하는 변호사로서도.”
“……내 딸이지만, 넌 정말…… 누굴 닮은 게냐?”
“내가 누굴 닮았겠어요?”
“그게 이 아비는 아닌 것 같다.”
“아빠. 확실한 건 세훈이보다는 제가 더 아빠를 닮았다는 거예요. 특히 성격적인 부분이요.”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하는 말이라 오히려 더 재미있는 부녀의 대화였다.
세훈을 필두로 풋, 하는 웃음이 터졌고 기장수만 빼놓고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혀를 끌끌 차며 인상을 찌푸리던 기장수도 마지못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뭐. 어머니도 그 사람 보고파 하셨으니 조만간 집으로 인사 올게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던 윤모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들갑을 떨고 싶지 않아 내색하진 않았지만, 세나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소개해주는 자리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제가 생각보다 그 사람 많이 좋아해요. 어머니도 그 사람을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윤모연은 딸에게 비로소 어머니라는 자리를 인정받은 것만 같았다.
그녀가 벅차오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또다시 눈시울을 붉히자, 세나는 괜히 쑥스러움을 느꼈다.
“그럴게. 고마워. 세나야.”
“제가 더요.”
일찌감치 출근한 강현의 집무실엔 주말 밤 그를 따라가지 못한 서운함으로 입술이 한껏 나온 장철호가 있었다.
“개똥도 약에 쓰일 때가 있는 법이라는데, 류 변호사님이 나에게 이럴 줄을 몰랐네요!”
하고 아침부터 투덜거렸다.
그러나 지난 밤 황유라와의 대면이 퍽 궁금했는지, 집무실까지 쪼르르 쫓아와 뭐든 내놔보라고 성화였다.
태블릿PC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에 집중하고 있는 장철호의 표정이 잔뜩 굳었다.
녹음파일을 듣는 동안 그의 눈썹은 조금씩 일그러지다 끝에 가서는 오만상으로 구겨졌다.
기도 안 차 웃음은커녕 헛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게 그날 녹음한 내용이란 말씀이시죠?”
“처음 사용해보는 거라 녹음이 됐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성능이 좋더군요.”
“그걸 선물한 보람을 여기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장철호가 힐끗 던진 시선은 탁상을 짚은 강현의 손목에 닿아있었다.
그의 손목엔 클럽에 갔을 당시 혹시나 해 착용했던 검은색 메탈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두 개의 지퍼백.
하나에는 빨간색 알갱이가 하나 담겨있었고, 하나에는 가느다란 여자의 머리카락이 담겨있었다.
“이게 그 ‘레드 릴리’ 인가 뭔가 하는 겁니까? 부유층 자제들이 암암리에 밀반입하는? 실물 구하기가 힘들다고 하던데 용케도 구하셨네요.”
“운이 좋았죠.”
평생을 법도 뭣도 없이 살았던지라 조심성을 잃은 건지. 아니면 어떤 사고를 쳐도 수습해줄 누군가가 있어서 세상 사는 게 조금 지루했던 건지. 그래서 더 큰 자극을 원했던 건지.
황유라는 강현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찾아온 줄도 모르고 보란 듯이 제 약점을 까발려댔다.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그 또한 일종의 스릴로 치부했을 것이다.
제 말에 흥미를 느끼는 강현을 보며 그녀는 더더욱 비밀 놀이에 심취해갔다.
덕분에 그녀의 눈을 피해 파우치에서 저 하나를 훔쳐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제 어쩌실 계획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