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여보, 당신, 자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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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여보, 당신, 자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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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여보, 당신, 자기야
2022.05.14.
“그전에.”
새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손가락이 강현의 가슴 언저리를 더듬거리다 이내 셔츠 단추 하나를 풀어냈다.
어느덧 단추 세 개가 풀린 셔츠가 슬며시 벌어졌다.
“이제야 좀 더 보기 좋네. 너무 갑갑해 보였거든.”
확장된 동공 너머 기묘한 생기가 뭘 의미하는지, 강현은 위치가 바뀐 그녀의 파우치를 보고 눈치챘다.
황유라는 빈 온더록스 잔을 치우고 샷 잔을 가져왔다.
표면이 찰랑일 정도로 잔을 채우고 강현에게 내밀었다.
“내 얘기가 계속 듣고 싶다면 마셔.”
강현은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빼 들고 그것을 군말 없이 비워냈다.
황유라는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강현의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처음 알았잖아.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는 줄.”
술병을 내려놓은 황유라가 그 손으로 강현의 팔뚝을 쓸어내렸다.
“피는 또 어찌나 많이 나던지, 새하얀 가운이 흠뻑 젖었어. 특히 가슴팍이.”
“어딜 찔렀는데?”
“목이었나, 가슴이었나. 몰라, 찔렀는지, 그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
그녀의 손길이 벌어진 셔츠 안으로 기어들었다.
물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미꾸라지의 진액이 배어 나온 듯 끈적한 손길이었다.
강현의 짙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러나 더 해보라는 듯 그녀의 손길을 딱히 저지하지 않았다.
황유라는 거기서 입을 꾹 다물더니 강현의 손에 들린 샷 잔을 빤히 응시했다.
“하, 계속 듣고 싶으면 술을 마시라고 하는 의미가 이런 의미였군.”
그녀의 수작질에 코웃음을 친 강현이 다시 잔을 비웠다. 이번에는 강현이 스스로 잔을 채웠다.
“그런데, 어딜 찔렀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게 말이 되나?”
강현이 반문하자 그녀의 입술이 뒤틀리더니 픽, 하는 실소가 새었다.
“내가 그때 좀 여기저기 치이고 있었거든. 제정신으로 견디기 힘들었을 때라.”
“칼은 어디서 났고?”
“그 새끼가 어디서 비싼 돈 주고 구매했다고 자랑한 잭나이프가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게 내 손에 들려 착 감겨있더라.”
“왜 죽였는데?”
“싫다는데 자꾸 치근덕거렸거든. 나도 죽을지는 몰랐지.”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강현이 빤히 쳐다보자 황유라는 양쪽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잖아?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는 줄 몰랐다고.’ 하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강현은 황유라의 입이 다물리기 전에 먼저 술잔을 들이켰다.
“정신 차리고 보니 사람은 죽어있지, 나는 새빨갛게 칠갑하고 있지. 술이고 뭐고. 눈앞에 그려진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그냥 꿈을 꾼 것 같았어.”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에 실존하는 사람을 죽였다. 그런데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목소리였다.
강현은 황유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대호 그룹의 황유라를 두고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망나니라더니, 이건 망나니가 아니라 금수만도 못한 ‘말종’이었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취해있었나?”
“그때는 지금보다 더 취해있었지.”
그녀가 돌연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강현의 술잔을 뺏어 들어 그 술을 제 목구멍으로 휙 들이부었다.
그녀는 입가를 타고 흘러내린 말간 액체를 손등으로 훔친 뒤 빈 잔을 머리 위에서 짤랑 흔들고는 다시 잔을 건넸다.
“왜. 사람 죽였다니까, 안 믿겨?”
“비밀 얘기치고 거창해서.”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강현은 일전 황유라의 자료에서 보았던 재활 치료센터 기록을 떠 올렸다.
하루 입원비용이 웬만한 호텔 스위트 룸 비용이랑 맞먹는 곳에 두 달간 처박혔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거라 짐작했다.
“뭐 믿든 말든 네 자유고, 뒷얘기가 궁금하지 않아?”
“뒷얘기?”
“내가 사람을 죽이고도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다닐 수 있는지.”
황유라는 치켜뜬 눈꺼풀에 힘을 풀며 강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황유라는 연약한 여인처럼 강현의 품에 파고들었다.
콧속으로 훅 끼친 짙은 플라워 계열 향수 냄새가 역겨워 숨이 막혔다.
“술이 필요한 타이밍이네.”
강현은 적절한 핑계를 대며 제게서 황유라를 떼어냈다.
상체를 일으킨 그는 비어 있던 잔에 다시 술을 가득 따랐다. 비싼 값을 자랑하는 양주의 병이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근데 누군데?”
“누구?”
“네가 죽인 사람.”
강현은 병에 남은 술은 탈탈 털어 잔을 채운 후 손을 뻗다 말고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어떤 놈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나, 해서.”
“에이. 그것까지 말하면 내가 너무 손해인데? 한 잔으로는 안 되겠는 걸?”
주절주절 지껄여대길래 한번 찔러봤더니 의외의 구석에서 방어적으로 나온다.
뭐 어차피 사건의 내용을 대강 알게 됐으니 그쪽으로 집요하게 파다 보면 뭐라도 하나 걸릴 것이다.
그러니 괜히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 아까부터 제 몸을 더듬거리는 축축한 손길이 몹시도 거슬리던 참이었다.
“내 얘기는 여기까지. 더 알고 싶으면 올라갈래?”
황유라는 음습한 속내를 거리낌 없이 표했다.
강현은 제법 유혹적으로 구는 여자를 빤히 쳐다보다 이내 시선을 떨구며 실없이 웃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내 비밀을 말하지 않았네.”
“침대에서 해도 돼.”
“아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말해줘야 공평하지.”
강현이 자신의 가슴팍을 짚은 황유라의 손목을 가볍게 비틀어 떼어냈다. 그러고는 고개를 낮게 내려 황유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구실을 못 해.”
“뭐?”
“내 여자가 만지는 게 아니면 반응을 안 한다고.”
“…….”
“아까부터 여기저기 주물럭거려서 반응 좀 볼까 했는데. 역시나.”
상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뒤늦게 깨달은 황유라의 시선이 곧장 그의 바지춤을 향했다.
강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유라의 손길이 머물렀던 셔츠 부근을 손등으로 탈탈 털어낸 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쪽이 매력 없어 얘가 제구실을 못 하는데, 더 있어 봐야 내가 손해지.”
쯧, 하고 혀를 가볍게 차는 소리가 그 어느 말보다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비스듬히 올라선 남자의 입꼬리엔 조롱이 매달려있었다.
확 달아오른 수치심에 황유라가 주먹을 말아쥐고 부들거렸다.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아직도 모르겠어?”
“뭐?”
“여태껏 내가 너랑 놀아준 거잖아. 시시한 거 참아가며.”
강현은 마지막까지 조소로 일갈한 뒤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의 등 뒤로 욕설이 섞인 고성이 날아들었지만, 강현은 묵묵히 걸음을 옮겨 VIP 룸을 빠져나왔다.
***
“하아…….”
풀썩 침대 위로 쓰러지는 몸이 무거웠다.
젖은 머리칼도 제대로 말리지 못하고 빙글 도는 시야가 어지러워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술을 먹어본 적이 도대체 얼마 만인지.
검사 첫 발령 때 호된 신고식 이후로 술독에 빠진 적이 있었지만, 그땐 지금보다 간이 훨씬 쌩쌩할 때였으니 견딜 만했던 것 같다.
내일 데이트가 취소된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강현은 팔을 들어 지끈거리는 이마 위에 내려놓았다.
기존에 수임하고 있는 사건과는 별개로 사설 조사관을 통해 황유라의 뒤를 캐봐야 했다.
일단 뉴욕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보강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과 한국의 정당방위는 법안의 구조부터 다르다.
성인 남성이 여성을 부적절하게 건드리려고 할 때 저항을 하다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게 됐다면, 확실히 정당방위가 성립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황유라는 그곳에서 재판을 받은 기록이 없었다.
‘그럼 그 사건이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묻혔다는 말인데…….’
살인사건을 1급 범죄로 다루고 있는 미국에서 별다른 제재 없이 손쉽게 빠져나왔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는 질문에 황유라는.
‘별거 없었어. 때마침 길 잃은 개 한 마리가 곁에 있었거든. 어찌나 똑똑하던지. 그래서 내가 그 개를 애지중지 키우고 있잖아, 지금까지도.’
……라고 했다.
황유라가 칭한 똑똑한 개는 채성민이고, 그들의 관계가 일반적인 고용 관계에 비해 남다른 이유는 황유라의 죄를 채성민이 제 손으로 직접 닦았기 때문이겠지.
‘거기서부터 제대로 엮이기 시작했구나. 채성민. 그것이 네 목을 조르는 밧줄인 줄도 모르고.’
그러거나 말거나 스스로 채운 목줄 스스로 끊어내는 건 알아서 할 일이고, 엄한 데다 분탕질은 하지 말았어야지.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는 치러야 하는 게 이치에 맞는 법이다.
무리하게 마신 술에 일어날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강현은 쉽사리 잠에서 깨지 못했다.
의식은 깨어 있는데 선잠이 든 것처럼 몽롱했다.
때마침 달깍,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인기척을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강현 씨, 일어나요.”
“…….”
아침부터 듣기에 퍽 상냥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야살스러운지 강현은 피식 웃으며 베갯잇에 볼을 비볐다. 그러자 깃털 같은 손길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얼른요.”
잠투정을 부리는 아이처럼 강현이 뭉그적거리자 가벼웠던 손길이 등을 타고 내려와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그가 꼼짝도 하지 않자,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부드럽게 턱을 쓸던 손길이 입술에 닿았다.
강현은 못 이긴 척 눈을 떴다.
“……세나야. 조금만 더 자면 안 될까?”
“안 돼요. 그러게 누가 술을 그렇게 마시래요? 본인이 아직 이십 댄 줄 알아요?”
강현은 뾰족하게 세운 눈꼬리로 입을 삐쭉거리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침대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녀가 꼼짝달싹할 수 없게 팔과 다리를 이용해 그녀의 몸을 칭칭 감았다.
“조금만 이렇게 더 안고 있자, 응?”
“오늘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도대체 어제 몇 시에 들어온 거예요? 나 잘 때 살금살금 들어오는 것 같던데?”
“다음부터는 늦게까지 안 마실 테니까, 오늘은 좀 봐주라.”
강현은 세나의 정수리에 볼을 기대며 포근한 향기를 흠뻑 들이켰다.
불쾌하기만 하던 향수 냄새와는 차원이 다른 따뜻하고 향긋한 체취에 몽롱한 잠기운이 뒤엉켜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그럼 밥 먹고 조금만 더 자든가. 속 버릴라.”
“괜찮아.”
“해장국 끓여놨는데.”
“해장국?”
“콩나물국으로.”
“네가 직접?”
“응. ‘여보’를 위해서 내가 직접.”
“…….”
여보를 위해 직접이라. 여보? 그 여보, 당신 할 때 그 여보가 맞겠지?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여보’ 소리가 왜 이렇게 이질적으로 들리는지 모르겠다, 생각하면서도 쉽사리 눈이 떠지지 않았다.
어쩌면 계란말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세나가 저를 위해 콩나물국을 끓여놨다는 소리가 더 말이 안 되는 게 아닐까.
‘여보’고 ‘콩나물국’이고 둘 다 말이 안 되는 게 맞지.
그러니까 이건 꿈이다.
꿈이라는 자각이 들자마자 무거웠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포근한 감촉은 꿈처럼 느껴지지 않았는데. 강현은 고개만 살짝 내려 품속에 묻혀있는 존재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나를 품었던 팔 안쪽엔 그녀가 베고 잠들었던 베개가 안겨있었다.
어제 새벽 술에 취해 생각을 정리하다 잠이 든 지도 모르게 까무룩 한 것 같은데, 그럼 그렇지.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 했더니, 꿈이었구나.
강현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멀뚱멀뚱 눈을 끔뻑거리다 다시 베개를 품에 안았다.
베갯잇에 은은하게 남은 그녀의 향 때문에 이런 꿈을 꾼 건지. 아니면 무의식의 발현인지.
“여보라…….”
자신의 꿈을 꾸는 걸 허락해주겠다고 한 그녀는 직접 꿈속에 찾아와 앙큼한 짓을 하고 사라졌다.
어이가 없게도 웃음부터 났다.
기세나한테 그런 호칭으로 불리고 싶었나.
상상도 못 했던 호칭을 꿈에서라도 들어보니 현실에서도 듣고 싶어졌다. 그러려면 주말 오전이라고 해서 침대 위에서 미적대고 있을 수 없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강현은 일단 해장부터 하기로 했다.
아무리 꿈이었다곤 하나 조금 자괴감이 들어 콩나물국은 직접 끓이기보다는 배달을 시키기로 하고, 꿈의 주인에게 아침 인사차 문자를 넣었다.
[다음번엔 현실에서 직접 말해줘.]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나에게서 답이 왔다.
[아침부터 무슨 말이에요? 문자 나한테 보낸 거 맞아요?]
그 아래로 머리에 물음표를 여러 개 띄운 이모티콘이 전송됐다. 그녀를 닮은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였다.
지금 그녀가 제 앞에 있었다면 꽉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갑갑하다, 숨 막힌다, 버둥거려도 놓아주지 않을 텐데. 어떡해야 좋을까 너를. 내가.
강현은 이모티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다음 문자를 전송했다.
[집엔 언제 인사하러 갈까? 나는 빠를수록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