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무법자들의 도시 2022.05.07.
북적이고 소란함을 싫어하는 강현에게 그나마 다행인 건, 20평 남짓한 방 안이 시끌벅적한 바깥과는 다른 세상이라는 점이었다. 넓은 방은 말 그대로 그들만의 리그였다. 계급을 나누듯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확실히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뚜렷이 구분되었다. 위에서 아래로. VIP 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투명한 방음 유리가 홀을 울리는 시끌벅적한 음악을 차단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아래쪽의 홀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였다. 하물며 바깥에서 춤추는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홀의 풍경은 연못에 관상용으로 풀어놓은 형형색색의 잉어들을 보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인간의 욕망은 다채로워 보이면서도 비슷한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하나가 특권이었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함. 가진 게 많을수록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철저히 분리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사생활은 지키고, 남들의 비밀을 염탐하고. 이런 ‘배타적인’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돈을 쓴다. 언제부턴가 당연시되어 온, 가진 자만이 누리는 특권. 그와 동시에 충족되는 우월감. 아래쪽의 사람들도 비슷한 마음일까. 이따금 VIP 룸 유리창 쪽으로 고개를 쳐들고 이곳을 궁금해하는 호기심 또는 욕망이 어린 시선들과 마주쳤다. 유리창 너머를 내려다보던 강현이 무감한 눈을 돌려 다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파티장을 방불케 한 멋들어진 옷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열댓 명은 되어 보였다. 한 손에는 샴페인 잔 또는 위스키 잔을 들고서 방탕하게 놀고 있는 사람들 사이, 유독 지루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저 혼자 앉아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이미 한번 패악을 부린 것인지, 그녀가 앉은 자리의 테이블은 빈 술잔으로 어지러웠다. 차마 그녀의 곁에 다가가지 못하고 근처를 서성대는 몇 놈들과, 그녀를 힐끔이며 눈치를 보는 사람들. 그녀가 바로 이 VIP 룸의 주인인 황유라였다. 오랜만에 돌아와 환영파티를 열었다는 것치고는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뭐 그런 것까지 알 필요 있나. 방 안의 모든 이들이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강현은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강현은 테이블 위에 있는 빈 잔을 하나씩 들어보다 개중에 제일 깨끗한 놈으로 골랐다. 아이스 버킷에서 맨손으로 얼음을 퍼 잔에 떨군 뒤, 황유라 앞에 놓인 술병을 가져와 잔을 채웠다.
“…….”
옆통수에 꽂히는 시선을 무시한 채로 잔을 들어 갈색 액체를 한 모금 머금었다. 쌉싸름한 알코올이 혀에 착 감겨 목구멍을 척척하게 적셨다. 따끔할 정도의 시선을 가볍게 일별한 강현이 입안에서 맴돌던 술맛을 음미하며 낮게 읊조렸다.
“좋은 거 마시네. 로열 살루트 21년 산.”
오크 향이 강하게 나는 것에 비해 목 넘김이 가벼운 스카치위스키로 클럽에서 먹기에는 고가였지만, 황유라에게 이 정도 수준은 껌값이었다.
“넌 뭐야?”
“뭘 뭐야. 술 마시러 온 새끼지.”
술잔 속에 담긴 얼음을 빙그르르 돌리며, 강현이 두 눈을 샐쭉 접었다. 그러곤 다시 한번 술잔을 기울여 한 모금 삼킨 뒤, 감정 없는 서늘한 눈빛으로 황유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모인 새끼들 중에 음악 감상이나 하러 온 새끼는 없을 거 아냐?”
황유라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한바탕 난리를 부린 통에 아무도 제 옆에 앉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데, 그런 분위기를 가뿐히 무시한 것으로도 모자라, 제 말에 저따위로 대답한 놈은 또 뭐지 싶었다.
“내가 누군지 몰라?”
“알아. 대호 그룹 개망나니 황유라.”
너무나 당당한 대꾸에 불쾌를 넘어 황당하기까지 했다. 어디서라도 본 적이 있을까 해서 그를 뚫어져라 보았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뭘 그렇게 봐? 보면 아나?”
상대를 가늠하려는 눈초리에도 강현은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만하게 다리를 꼬아 앉아 소파 등받이에 어깨를 넓게 벌리며 팔을 턱 얹었다.
“신종 미친놈인가?”
“너만 할까.”
“근데, 왜 반말이야? 내가 누군지 안다며?”
“구질구질하게 예의를 차리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본인의 혓바닥이 반 토막인 건 생각도 못 하나 봐.”
“하, 뭘 기대하고 온 건지 모르겠는데, 닥치고 꺼져. 기분 별로 안 좋으니까.”
“기분이 별로 안 좋다, 라……. 하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모처럼의 웰컴 파티가 이렇게 따분한데.”
“어디서 소문 듣고 찾아온 기자 나부랭인가?”
“내가 기자면 너 가지고 고작 그딴 기사는 안 쓰지. 쓸 게 참 많은 세상인데 말이야.”
“…….”
제 짜증 서린 표정과 손짓 한 번이면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옆자리를 꿰차고 앉아 허락도 없이 술을 따라 마신 남자는 자신의 날 선 반응에 아랑곳도 없이 따박따박, 속이 뒤틀릴 만한 대답만 골라서 날렸다.
“돈도 많아 보이는데, 술이나 더 시켜. 이왕이면 같은 브랜드 38년 산으로. 여기 있을지는 모르겠군.”
태연자약한 강현의 태도를 한참이나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던 황유라가 돌연 웃음을 빵 터트렸다. 어디서 튀어나온 놈인지는 몰라도, 그의 말대로 이 따분한 놈들 사이에서 난 놈임은 확실했다. 가만히 보니 생김새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이 방의 그 누구보다 구미가 당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재밌네. 그래서, 기자도 아니면 스토컨가? 요즘 나 좋다고 달라붙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피곤하거든.”
“다들 눈깔들을 발바닥에 붙이고 다니는가 보네. 어울리면 피곤할 거 같은 타입인데.”
차가운 표정 아래에서 느껴지는 오만함과 더불어 묘한 나른함은 황유라에게 색다른 자극으로 다가왔다.
“너 누구야?”
“그런 건 알 거 없고.”
“여긴 누구 초대로 왔어? 아무나 못 들어올 텐데.”
“그냥 들어와 봤어. 심심해서. 여기서 제일 재밌는 사람이 너라고 소문났거든.”
“어울리면 피곤할 것 같은 타입이라더니?”
“내가 피곤한 걸 좀 즐기는 타입이라. 근데 뭐 별거 없네. 시간 아깝게 헛걸음했어.”
느른하게 벌어진 입매에서 튀어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황유라의 신경을 툭툭 건드렸고, 그것은 곧 무료하기만 했던 그녀에게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네 말대로 따분했는데. 그래. 오늘은 너랑 놀아야겠다.”
“좋을 대로.”
강현은 제 술잔을 들어 테이블 위에 놓인 황유라의 술잔에 ‘챙’ 소리 나게 부딪힌 뒤,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그의 행동을 흥미로운 눈초리도 지켜보던 황유라가 붉은 입술을 뒤틀며 고요하게 웃었다.
“네 말대로 재미 좀 보려면 술이 빠질 수 없겠네.”
그녀의 전화 한 통에 지저분했던 테이블이 싹 치워지고, 새롭게 세팅되었다. 강현이 말했던 고위층 뇌물로 세간에 알려진 38년산 로열 살루트까지. 황유라의 손짓 한 번에 불필요하게 머릿수나 채우던 사람들이 모두 쫓겨났다. 강현을 빼고 남은 사람은 황유라를 포함해 다섯. 그들은 깨끗하게 치워진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강현은 관심조차 없다는 듯한 얼굴로 제 주위를 둘러앉는 사람들을 훑었다. 이미 사전에 조사한 자료에 나와 있던 인물들이었다. 황유라의 정예 멤버들. 그녀와 함께 나쁜 짓을 일삼는 대단한 집안의 자제와 그들의 파트너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처음 보는 얼굴인 강현을 경계했다. 시선 또한 곱지 않았다. 모두가 제게 날을 세우고 있음에도, 강현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문 채로 그들을 관망했다. 제게는 직접적인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놈들의 행태가 우습기도 했다. 첫 대면에서 늘 있기 마련인 기 싸움이었다.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아래 계급이라는 그들만의 룰인 듯 보였다. 강현은 그들의 수군덕거림을 한 귀로 흘려보내며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로 꼰 다리 한 짝을 까딱일 뿐이었다. 불편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그들이었으니까. 황유라는 그런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모두가 자신을 경계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강현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뭐야, 이 사람 누군데?”
“아는 사람 있어? 누구야?”
“유라야, 네가 불렀어?”
한참의 신경전 끝에 투덜거림이 하나둘 터져 나왔다. 숙덕거림은 그 소리를 키웠지만, 누구 하나 강현에게 말을 직접 걸지는 않았다. 그저 자기네들끼리 주고받을 뿐이었다. 어디 가서 누구에게 무시당하고 산 적이 없는 집단이었다. 먼저 친한 척을 하며 살갑게 굴어도 곁을 내줄까 말까 한데, 되레 자신들을 저 아래 펄떡대는 잉어들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강현의 태도에 여간 심기가 불편한 게 아닌 듯 보였다. 집안과 학벌, 인맥 등 다양한 형태로 어우러진 집단 속에 뜬금없이 나타난 남자는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말 한마디 없이 외적으로 풍기는 포스만으로 그들 위에 군림하려 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남에게 한 번도 고개를 숙여보지 않은 왕처럼, 오만방자함을 금테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남들보다 특권을 누리고 살아온 이들에게 반발심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하, 뭐 대단한 것들이 모여 있다 난리길래 와봤더니.”
낯선 장소와 사람들 사이에서 한껏 여유로운 자태를 뽐내던 강현이 픽,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술병을 들었다.
“뭘 쳐다보고만 있어? 비싼 술 올려두고 고사라도 지내?”
비웃음을 한껏 실은 써늘한 음성과 한 병에 몇백만 원을 호가하는 비싼 술을 아까운지도 모르고 콸콸콸, 잔을 채우는 모습에 한 번. 마지막으로 얼음도 없이 가득 담긴 술잔을 단숨에 털어 삼키는 모습에 한 번. 그렇게 강현의 흉흉한 포스에 눌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짙어졌다. 모르긴 몰라도 황유라와 동급이거나, 그보다 더한 미친놈이거나. 각자의 머릿속에 저마다 강현에 대한 이미지가 심어졌다.
“…….”
크리스털 잔을 깨트릴듯한 기세로 소리 나게 내려놓은 강현이 황유라를 쳐다보았다. 속내를 읽을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지루함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자신과 같은 기분이리라. 강현의 눈빛을 읽은 황유라가 손을 들어, ‘딱’ 소리 나게 핑거 스냅을 날렸다. 그러자 웅성거리기 바빴던 그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고 황유라에게 집중했다.
“누군지는 지금부터 차차 알아가면 되겠지? 난 쟤 마음에 들어.”
새빨갛게 칠한 입술이 짓궂게 보일 만큼 활짝 벌어지고, 비음 가득한 목소리가 방 안의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새로운 멤버가 온 듯한데, 우리 게임이나 할까? 오늘 보고 말지, 앞으로 같이 놀지 알아보기도 할 겸.”
황유라가 분위기를 다독이며 사회자를 자처했다.
“Truth or Die”
“Truth or Die?”
트루 오어 다이라. 강현이 되묻자 한껏 상기된 얼굴이 그를 향했다.
“응. 우리는 Dare가 아니라 Die야.”
강현은 한쪽 눈썹 머리를 들추며 묵묵히 술병을 기울였다.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 게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술자리에서 게임을 해본 경험은 없지만, 대강 눈치를 보자면 일종의 진실게임인 듯했다. 무엇에 대한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이라는 말은 퍽 마음에 들어 군말 없이 그들의 장난질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 전에 너, 뭐 하는 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