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100% 취향 저격
(85/120)
85화. 100% 취향 저격
(85/120)
85화. 100% 취향 저격
2022.04.23.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 걸까.
유치원 때부터? 아니면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연애를 몇 번 해보긴 했지만, 그렇게 폭 빠져 살았던 적도 없었으니 그냥 없는 척하면 되는 걸까?
아니면 적당히 추려 몇 명만 말하면 되나?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말 한번 잘못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는 꼴이 되어버렸다.
“방금 그 말 농담이죠?”
세나가 황망히 눈알을 또르르 굴렀다.
“농담 같아 보여?”
“…….”
강현이 세나를 뚫을 듯 응시하며 씨익, 웃었다.
살벌하던 표정이 풀리니까 그나마 농담처럼 느껴진다.
원래 유머러스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 저것도 재밌자고 한 농담이겠지.
다음번엔 좀 웃어줘야겠다고 생각한 세나가 찌개를 한 수저 떠서 맛을 보았다.
냄새도 구수하니 군침이 돌았는데, 맛 또한 일품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며 맛을 음미한 뒤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선배. 어디 가서 남들이 안 웃어준다고 해도 상처받지 마요.”
“내가 상처를 왜 받아?”
“그런 표정으로 그런 농담을 하니 사람들이 다 진담인 줄 알고 기겁하는 거예요. 무슨 농담을 그렇게 살벌하게 해. 나 정도 되니까 아, 농담이구나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거지.”
“웃으라고 한 말이-.”
“됐고, 언제 날 잡아서 같이 개그 프로그램이나 봐요. 그런 것도 자꾸 봐야 늘죠. 매번 형법서나 들여다보고 있으니, 요즘 유행하는 개그 코드가 뭔지 알긴 하겠어요?”
“……밥이나 먹어.”
제 말이 농담이 아니란 것을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
‘일단 그 바람나서 결혼한 주제에 청첩장까지 보낸 멍청한 놈의 다리 한 짝을 분질러 주는 것으로 시작해 줄까?’라고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지금은 서로 평화롭게 식사를 마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그런데 뭔가 억울하네.”
한 그릇 가득 퍼 담아준 밥을 뚝딱 해치운 세나가 후식으로 강현이 타준 커피 잔을 탁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맛있게 잘 먹고, 입가심으로 편의점에서 사 온 사과까지 몇 조각 집어 먹고는 뭐가 억울하다는 말인지.
의중을 알 수 없어 뭐 때문에 그러냐고 강현이 뒤를 보았다.
“아니, 선배도 연애 좀 해 봤을 거 아니에요? 왜 나만 추궁당해야 해?”
뱉고 보니 일리가 있다 느껴졌다. 연애는 나만 해봤나?
세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전 사용했던 그릇을 씻고 있는 강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설거지 중인 강현의 등 뒤에 바짝 달라붙어 뒤꿈치를 한껏 세우고는 그의 넓은 등판에 무게를 더해 몸을 기대었다.
단단한 근육들이 옹골차게 들어찬 울퉁불퉁한 등판을 캔버스 삼아 검지를 세워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선배는 몇 명이나 만나봤어요? 검사면 선도 많이 들어왔을 텐데, 바빠도 연애할 시간은 있었을 거 아니에요?”
강현의 날갯죽지가 간지럽다는 듯 꿈틀거렸다.
대답 대신 물소리에 섞인 희미한 웃음소리만 들렸다.
세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의 등에 뺨을 기댄 채 중얼중얼, 자신의 질문에 정당성까지 부여해가며 말을 이어갔다.
“나 되게 쿨한 여자라 몇 명을 만났든 질투 같은 건 안 할 테니, 걱정 마요. 그냥 선배는 어떤 연애를 했을까 단순히 그게 궁금한 거지.”
질투 같은 치졸한 감정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 쿨한 여자라 칭하는 것치고는, 말꼬리가 무척이나 길었다.
“주로 나처럼 예쁜 여자만 사귀었나? 뭐 이상형은 없다고 했지만, 똑똑하고 자기 할 일 잘하고?”
“본인에 대한 자각은 있나 보네?”
“뭐, 그거야 거울만 봐도 다 알지. 나 예쁜 거.”
“자신감이 높은 건 큰 장점이지.”
“암튼. 사귀자마자 손도 잡고, 막 끝까지 가고 그랬나? 심야 영화도 보러 가고, 한적한 곳으로 드라이브도 가고, 뭐 집에도 놀러 오고. 그러다 눈 맞아 그렇고 그랬나?”
“…….”
“저 방 침대에서 같이 누웠다가 깨서, 아침에 밥도 차려주고 그랬나?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세척만을 남겨두고 강현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일정하게 꿈틀거리던 근육이 별안간 굳자, 세나가 뺨을 슬쩍 떼어내 상황을 살폈다.
수전에서는 여전히 물이 흐르고 있었고, 개수대 수챗구멍으로 거품이 빙글빙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거는 질투가 아니라. 그냥 물어보는 건데, 선배도 아까 나한테 물어봤잖아요.”
혹시라도 그가 기분이 상했을까, 괜히 핑계를 붙여 볼멘소리를 내었다.
“아까 선배도 대놓고 집착한다는 둥 농담하길래…….”
“기세나. 하나만 해, 하나만.”
“…….”
“귀엽게 질투하든가, 멋있게 쿨하든가.”
그는 거품기가 남은 손을 흐르는 물에 대충 헹구고 수전을 잠갔다.
손의 물기를 탈탈 털며 세나를 향해 몸을 돌리는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그게 뭐든.”
강현이 뻘쭘히 서 있는 세나에게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나는 질투하는 기세나도 좋고, 쿨한 기세나도 좋으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취향은 전부 너야.”
그가 허리에 얹은 손에 살짝 힘을 주자 세나는 못 이기는 척 딸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제 품에 안겨 귓등을 홧홧하게 붉히는 세나를 내려보다 ‘어휴. 이걸 내가 무슨 수로 이겨.’ 하고 읊조리며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얹었다.
“그리고 기대하게 해서 미안한데, 연애해 본 적 없어.”
“거짓말. 왜요? 바빠서?”
“바빠서라기보다 연애가 살아가는 데 그렇게 절실하지 않아서가 맞는 말이지. 누구처럼 이놈 저놈 만나기엔 귀찮기도 했고.”
“…….”
“근데 지금은 기세나, 너랑 연애하고 싶어. 일이 미어터지도록 책상에 쌓여도. 너랑 같이 있으려고 잠 한숨 못 자도. 기세나니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니까.”
낮은 중저음으로 조곤조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그의 가슴이 잔잔히 부풀었다가 꺼졌다.
“답이 됐어?”
그 가슴에 이마를 묻고 있던 세나는 그의 호흡에 맞춰 숨을 내쉬며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아이참, 뭘 또 그렇게까지. 그 말 들으니까 또 기분은 막 좋아지긴 하네요…….”
세나가 두 팔을 그러모아 강현의 허리를 꼭 안자, 낮은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산들바람처럼 흩어졌다.
괜히 부끄러운 기분에 가슴팍에 닿아있는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강현은 커다란 손으로 작은 세나 얼굴과 목덜미를 한꺼번에 감싸 제 쪽을 향하게 만들었다.
“아침부터 귀엽게 구네.”
들어 올려진 시선의 끝엔 강현이 있었다. 근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세나가 동그란 눈을 한 번 깜짝이자, 그가 고개를 떨구었다.
포개진 입술 끝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몇 번의 숨결이 오가는 동안 세나는 천천히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강현의 손길은 투박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세나의 말간 뺨 위를 살살 어루만지고, 오뚝한 코끝이 광대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
촉촉한 입맞춤은 서로의 숨결을 더욱 가깝게 느끼게 했다.
살며시 벌어진 입술 사이에 자리한 강현의 도톰한 입술의 감촉은 과일 맛이 나는 젤리처럼 말랑말랑하면서도 탄성이 있었다.
세나는 그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가 쪽, 소리 나게 머금었다.
뜨거운 열기를 품은 접촉은 구름 위를 걷는 듯 포근하고, 몸을 둥둥 들뜨게 했다.
강현과의 키스는 담백하고 산뜻했다.
그래서 더 목이 말랐고,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어떠한 열망을 느끼게 했다.
“흐응…….”
콧소리를 내던 세나가 불현듯 뭔가가 떠올랐는지, 감은 눈을 번쩍 뜨며 강현에게서 떨어졌다.
“방금 그거 거짓말이죠?”
단잠을 자다가 돌연 뺨을 맞은 기분에 강현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짙은 눈썹꼬리엔 ‘도대체 지금, 키스하다 말고 무슨 헛소리냐?’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세나가 손끝으로 제 입술 언저리를 더듬더듬,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연애해본 적도 없다면서, 키스를 이렇게 잘한다고? 게다가, 어젯밤에. 그, 그, 그건 뭐예요?”
“어젯밤?”
“그래요. 침대에서. 나 막 정신도 못 차리게 했잖아요. 연애는 안 해봤는데 그게 가능하다고? 거짓말, 누굴 속이려고.”
저가 말을 꺼내면서도 부끄러운지 손을 부채모양으로 만들어 발갛게 상기된 볼 위로 팔랑팔랑 부쳤다.
지난밤, 강현의 이야기 때문에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그전에 ‘다른 것’ 때문에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하마터면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네.”
여우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확실히 류강현은 개과가 아니라 여우과다.
아니 여우도 개과구나!
10년 만의 깨우침에 세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려 고개까지 휘휘 저었다.
그러고는 다 들켰으니 사실대로 말하라며,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와.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입에 발린 소리 장난 없다. 선수인가? 검사들을 서로를 프로라고 부른다던데, 그 프로가 이 프로인 줄 몰랐네. 허, 진짠 줄 알고 혼자 너무 설렜잖아?”
강현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경험이 없다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그저 키스 한 번으로 정신을 쏙 빼놓는 남자인데.
세나는 그의 거짓말을 밝혀내려 눈살을 좁혔다.
“요즘 시대에는 솔직한 게 대세예요. 그냥 인정할 건 인정하고, 선처를 구하는 게 어때요?”
범인을 조사하는 형사가 된 심정으로 재차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강현의 눈동자는 지긋하고 고요할 뿐, 흔들림도 없이 가라앉아있었다.
“선처? 누가, 누구한테?”
“그야 당연히 선배가 저한테 바라야죠.”
강현이 내리깔았던 눈매를 치켜뜨며 고개를 갸웃댔다.
“뭘 잘못했는데?”
세나 역시 이에 질세라 골반을 틀고 짝다리를 짚었다. 그리고 어디 한번 해보자는 식의 당당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가 그렇게 순진해 보였어요? 선배가 경험 없다는 말을 믿을 만큼?”
“왜 못 믿지? 내가 어디 가서 막 거짓말하고 그럴 사람처럼 보이나?”
“그런 게 아니라 경험자가 아니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말인 거죠. 우리 객관적으로 상황을 두고 봐봐요. 선배의 연애 경험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작은 거짓말들이 모여서 우리의 신뢰 관계가 깨지는 거라구요.”
“…….”
“거짓말을 할 거면 차라리 서툴기라도 하든가. 뭐 이렇게까지 능숙해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해…….”
세나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툴툴거리자, 허공을 향해 코웃음을 친 강현이 제 허리춤에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 자신의 턱 아래를 받쳤다.
곧이어 비스듬히 기울어졌던 강현의 입술이 나른하게 벌어지다 못해 자신만만한 호선을 그렸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선처를 구해야 할 만큼 잘했다?”
선이 뚜렷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느릿느릿한 어투는 낮고 음산했다.
“내가 밤에 정신도 못 차리게 만들었다?”
마지막 음절에 물음표가 걸리자, 분위기의 흐름이 묘해졌다.
“그래서 그렇게 울며 매달렸나?”
세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시선이었지만, 강현이 풍기는 기운이 한 몫을 더했다.
마치 동물이 내뿜는 페로몬처럼, 삽시간에 흐름이 뒤바뀌어 버렸다.
“누, 누가 매달렸다고……. 선배가 너무 집요하게, 나를 괴롭히니까…….”
“집요해서 싫다는 말인지, 좋았다는 말인지 내가 판단이 안 서네.”
말을 하면 할수록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거기다 별다른 뜻이 있는 말이 아닌데 왜 이렇게 야릇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강현이 이렇게 갑자기 분위기를 확 바꿀 때마다 심장이 옥죄여오고 숨이 막혔다.
그의 모습은 마치 철창 안 한적하게 노닐던 맹수가 돌연 모습을 바꾸어 눈앞에 있는 상대를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것 같았다.
세나는 흔들리는 동공을 바쁘게 굴려 도망칠 공간을 살폈다.
그러나 성큼 제 쪽으로 다가선 강현의 커다란 몸체에 앞길이 딱 막혔고,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다 등 뒤에 있던 아일랜드 조리대에 엉덩이를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