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Hold me t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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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Hold me t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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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Hold me tight
2022.04.09.
“누구……?”
강현의 눈동자 위로 그것이 누구인지 가늠하는 눈빛이 스쳐 지났다. 그러다 이내 세나가 말하는 사람을 떠올린 듯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배. 아무리 내가 선배를 좋아한다고 해도 이건 아니에요. 이건 내 문제예요. 선배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구요.”
이연화를 떠올리자, 지레 질려버린 세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강현은 세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헝클어져 있던 잔머리칼을 다정하게 귓가에 걸어주며 소리 없이 살짝 웃었다.
“왜 웃어요? 난 심각한데.”
“알고 보면 이렇게 다혈질인데,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몰랐다는 게 신기해서.”
“……그래서 별로예요?”
세나의 눈썹꼬리가 위로 한껏 치솟았다가 금세 꼬리를 내려왔다.
그게 무척 귀여웠다. 그 눈썹 위에 입을 맞추고 싶을 만큼.
“그럴 리가.”
“표정은 아닌데? 왜 그렇게 봐요?”
“좋아서. 참고로 난 솔직한 기세나가 제일 귀여워.”
강현은 뻣뻣한 모양새로 옹송그려진 그녀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려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 나 역시 그 문제로 네게 어떤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 낳아줬다고 다 같은 부모가 아니지.”
“그런데 왜 여기로 와요?”
“여기서 다 설명하기엔 조금 긴 이야긴데…….”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소리를 줄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조금 조심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음, 하고 목을 울리다, 가볍게 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네게 소개해주고픈 사람이 우연하게도, 여기 계시거든.”
“…….”
세나는 그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걸음을 쉽게 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강현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무래도 오늘 그런 일이 있었으니 여기 다시 온 것도 힘들겠지. 미안. 내 생각만 하느라 배려가 부족했네.”
“이상하게 숨이 막혀요. 한시도 있고 싶지 않아요.”
“괜찮아. 다음에 다시 오면 되니까. 네가 불편하다면 내려가서 기다려. 옷만 챙겨 나올 테니까.”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강현이 자신의 팔뚝에서 세나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금방 올게.’ 하고 미련도 없이 혼자 걸음을 옮겼다.
“…….”
멀어지는 강현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기적거리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뭘 보고만 서 있어. 기세나. 좋아한다며. 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며. 그런데 왜 이러고 있어? 등신처럼.’
찝찝한 기분을 떨치고 마음을 다잡은 세나가 껌딱지처럼 바닥에 들러붙어 있던 걸음을 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현이 사라진 병실 입구에 다다랐다.
그의 말대로 이연화가 있는 병실이 아니었다. 바로 옆 병실이었다.
병실은 문은 반쯤 열려있었다.
그를 찾아 병실 안으로 한 발짝 내딛는 찰나,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 여사님, 많이 기다렸어?”
일부러 목청을 키운 듯한 밝은 음색이 정말 자신이 찾던 사람의 목소리가 맞는지 긴가민가했다.
“울 똥강아지, 친구는 잘 만나고 왔어?”
이어서 들리는 한 여인의 음색에 세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뭔 강아지? 순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뜻밖의 단어였다.
세나는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휙 돌아갔다.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똥강아지야? 덩치 좀 봐. 이 여사가 봐온 동네 개들 중에서 내가 제일 클걸?”
심드렁한 어투 속에 섞인 웃음기와 더불어 반쯤 쳐진 커튼 너머로 조명에 비친 커다란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류강현은 침상 바로 옆으로 바짝 의자를 당겨 앉더니, 위협적인 덩치를 한껏 웅크린 채로 저를 쓰다듬는 손길에 머리를 대주고 있었다.
더 없이 커진 눈이 바로 앞에 보이는 상황을 인지하는 동안 세나의 입이 툭 벌어졌다.
이 여사라고 불린 여인은 족히 예순은 훌쩍 넘어 보이는 왜소한 체구였다.
그녀는 코끝에 투명한 튜브를 끼운 채 고롱고롱한 숨을 쉬면서도, 제 덩치의 세 배쯤은 돼 보이는 강현의 얼굴과 머리칼 이곳저곳을 손끝으로 꼼꼼히 살폈다.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은 살아온 세월만큼 깊었고, 입가엔 시종일관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에게 예쁨 받는 강아지처럼 온순하게 굴던 강현이 얼굴을 내어준 채로 시계를 슬쩍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아. 나 없어도 잘 있을 수 있지?”
“그럼. 간호사 선생님들이랑 할망구들이랑 수다 떨면 시간 금방 가.”
“또 올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있거나,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내가 몇 번 누르면 된다고?”
“몇 번을 말해, 내가 치매인 줄 알어? 1번. 1번만 꾹 누르면 된다고. 안 까먹었어.”
“와- 역시 우리 이 여사가 나보다 더 똑똑하다니까.”
“내가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해서 남들보다 조금 늙은 거지, 미모는 여전하잖아?”
“알아. 옥수동 미모 하면 우리 이 여사님이지. 빨리 나아, 그래야 그 재밌다는 춤 다시 배우러 다니지.”
“내가 말했었나? 영감탱이들이 그렇게 나만 가면 손 한번 잡아달라고 한다고. 그 영감탱이들 나 없어서 아주 목이 빠질 지경이라더라.”
“이 여사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동네 남정네들 마음을 꽉 잡고 있었네?”
“그중에 제일 젊은 놈이 너야.”
마디마디 굳은살이 박인 손길에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져도 그것도 좋다고 헤실헤실, ‘이 여사’를 보고 다정하게 웃는 강현의 얼굴은 무척이나 앳된 소년의 연심으로 가득했다.
“밤에 나 보고 싶으면 전화하고. 알았지?”
“일한다고 바쁜 놈 불러서 뭐 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얼른 가. 내일 중요한 약속 있다며?”
“나한테 이 여사가 제일 중요하지. 아프지나 말아.”
“이제 괜찮다니까 그러네. 원래 늙으면 이곳저곳 안 아픈 데가 없어.”
“쓰러졌다는 연락받고 심장이 철렁했어. 다음부터 어디 아프다 싶으면 바로바로 병원 좀 가. 나 놀라게 하지 말고.”
어리광이 가득한 어투는 평소 류강현과는 이역만리쯤 동떨어진 모습이라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쓸데없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 그였다.
남들이 봤을 때 기가 질릴 정도로 할 말만 딱딱 내뱉는 류강현의 입에서 걱정이 가득한 잔소리와 동시에, 저리도 애교 가득한 말들이 쏟아질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심 봉사가 공양미 삼백 석도 없이 눈을 떴다’는 말이 더 그럴싸한 상황이었다.
“늙은 사람 귀찮게 말고 좋아하는 사람한테나 잘해. 그래야 나중에 가서 후회 안 해.”
“늙긴, 요즘 시대에 이 여사 나이면 창창한 이팔청춘인데. 퇴원하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내가 그렇게 해줄 거니까.”
“지금도 충분해. 여기서 뭘 얼마나 더 해주려고?”
“나 다시 이 여사네 동네로 이사 갈까?”
“어휴. 네 잔소리를 어떻게 견뎌. 싫어. 오지 마.”
“오지 말라니까 더 가고 싶네. 나 몰래 숨겨둔 남자 있는 거 아니고?”
“잠잘 시간도 부족한 놈이 그 멀리서 어떻게 출퇴근을 해? 그냥 가끔 보고 살아.”
그녀는 강현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으로 이번엔 그의 볼을 꼬집었다.
세나는 눈앞의 상황이 너무나 이질적이라 저도 모르게 힉, 쇳소리를 내었다.
제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가 생각보다 커 화들짝, 얼른 입부터 막았다. 그러나 이 여사의 시선을 끌기엔 충분했다.
“누구? 어머나, 혹시 저 아가씨가 네가 말한 그 변호사님 아니야?”
이 여사의 시선을 따라 강현의 고개도 병실 문 쪽을 향했다.
예고도 없이 맞닥뜨린 상황에 세나는 몸을 바짝 세우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인사를 해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다급하게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혔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류강현 변호사님의 후배-.”
후배라고 소개해야 하는지, 오늘부터 1일인 여자친구라고 해야 하는지 머뭇대는 사이, 이 여사가 강현의 어깨를 찰싹 소리 나게 때리며 눈을 흘겼다.
“저렇게 예쁘다고는 안 했잖아?”
“아닌데? 내가 너무 예뻐서 눈도 못 떼겠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아무래도 치매 검사해야 한다니까.”
“얼씨구, 그래서 목소리 들린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뽀르르 나갔다 온 거구먼?”
강현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세나와 이 여사를 한 번씩 힐끔거렸다.
“원래 오늘 소개해 줄 계획은 없었는데…….”
“뭔 소리야! 왔으면 당연히 소개해줘야지, 네가 좋다고 말한 아가씬 생전 첨인데!”
이 여사는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앙상한 주먹으로 강현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강현은 이 여사의 힘없는 주먹질에 아픈 척 엄살을 부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세나를 향해 다가오는 대신 한 손을 내밀었다.
침상에 반쯤 드리운 커튼을 사이에 두고 저 너머 강현의 세상으로 들어갈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이제 오롯이 세나의 몫이었다.
세나가 얼어 붙어있는 걸음을 떼었다.
그의 손을 잡기 위해 다가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진심을 담은 만큼 조심스러워졌다.
이윽고 강현의 커다란 손바닥 위로 세나의 손이 올려졌다.
강현은 제 손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흡족하게 바라보다 이내 다섯 손가락이 얽히도록 깍지를 꼈다.
“인사해. 이쪽은 이순옥 여사님.”
어머니가 아닌 여사님이라는 소개에 의아해진 것도 잠시, 세나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제 소개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기세나라고 합니다. 강현 선배와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쭈뼛대며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자, 옆에 서 있던 강현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반가워요. 이순옥이에요.”
“이 여사. 나 오늘부터 이 여자 거 하기로 했어. 섭섭해도 어쩔 수 없어.”
나이 지긋한 어르신을 앞에 두고 낯부끄러운 소리를 태평하게 내뱉는 강현 때문에 세나는 귓불까지 벌겋게 물들여야 했다.
이순옥은 그런 세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고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입가를 가렸다.
“섭섭하긴, 속이 다 후련한데. 그나저나 이렇게 나란히 보고 있으니,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이제 눈 감아도 여한이 없겠어.”
“눈은 감지 말고, 그냥 이 여자 예뻐만 해줘. 내가 많이 좋아해.”
“선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콕콕 박혀 세나를 더욱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얘가 이렇게 누구 좋다고 하는 애가 아닌데, 혹시 우리 애 혼자 좋아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그, 아, 음, 저도, 강현 선배 많이 좋아해요. 늦게 와서 죄송해요. 진작에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이렇게라도 와준 게 고마운 거죠. 우리 강현이가 덩치가 크고 무뚝뚝해도 속은 안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혹시나 저놈이 못된 소리 하면 나한테 다 일러요. 내가 혼쭐을 내줄 테니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당최 갈피를 잡지 못해 세나가 눈만 또르르 굴렸다.
그러나 강현은 아예 작정이라도 한 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능청을 떨었다.
“이 여사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네. 이 예쁜 여자가 내 마음 아프게 할까 걱정해야지, 혼낼 생각부터 하는 거야? 내가 뭐 섭섭하게 한 거 있어?”
“내가 네놈의 성질머리를 모를까 봐? 모르긴 몰라도 네놈 때문에 눈물을 쏙 뺐구먼, 쯧! 사내새끼가 제 여자나 울리고. 못난 짓 그만해. 예쁘다 예쁘다 해도 모자란 게 사랑이야. 안 그래요, 아가씨?”
강현 때문에 운 건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또 강현 때문인 게 맞기도 하고.
그렇다고 처음 만난 그녀에게 ‘제가 사실은-.’ 하고 입을 떼기도 쉽지 않아 세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치매가 아니라 점쟁이가 된 건가? 한 번 보면 그게 딱 보여?”
“내가 다른 놈은 몰라도 너는 좀 알지. 너를 누가 키웠는데.”
강현이 장난스럽게 씨익 웃자, 한숨을 한번 폭 내쉰 이순옥은 세나를 향해 화사하게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얄밉게 굴면 한 대 콱 쥐어박아도 되니까. 잘 좀 부탁해요.”
“아니에요. 제가 오히려 잘 부탁드린다고 해야 하는 입장이라.”
“이 나이가 되면 그런 게 더 잘 보여요. 세나 양은 똑 부러져 보여서 내가 안심되네요. 앞으로 쭉 우리 강현이 옆에 있어 줘요.”
“선배에 비하면 제가 너무 부족해서…….”
“들었지? 그냥 내 옆에 있어 주면 돼.”
“너만 잘하면 세나 양이 어련히 알아서 그래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