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그만 튕기고 나랑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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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그만 튕기고 나랑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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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그만 튕기고 나랑 만나
2022.04.05.
“아, 안다고요?”
“그걸 그렇게 잘 알면서 왜 그딴 새끼한테 휘둘려? 난 이렇게 멋대로 휘두르면서.”
질투 나게.
계약서대로라면 기세나는 류강현에게 없는 꼬리라도 만들어 흔들어야 했다.
어떻게든 꾀어내려 발버둥을 쳐도 모자랄 판인데, 그녀는 바보처럼 제게 접근하는 류강현을 밀어내기 바빴다.
계약사항을 망각했거나, 고리타분할 정도로 원칙적이거나.
“잘 생각해보면 네가 나에게 한 게 없어. 내가 널 꼬셨지.”
차라리 손에 쥔 패를 까고 도와달라고 했으면 결과가 달랐을 텐데. 미련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생긴 건 도도한 여우인데, 하는 짓은 미련한 곰탱이라니.
이러니 예전부터 자꾸만 눈에 걸린 거겠지.
“기세나. 다음부터 잘 생각해보고 행동해. 한 번만 더 이러면 눈 돌아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나, 용서해 주는 거예요?”
“처음부터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어. 화가 났지만, 너에게 난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날 왜 피한 거예요? 얘기도 안 들어주고……. 하루종일 선배한테 어떡하면 사과의 말을 전할 수 있을까, 몇 날 며칠 잠도 못 자고 머릿속에 선배만 가득해서 일도 손에 안 잡히고 밥도 안 넘어-.”
“…….”
“설마…… 일부러 그런 거예요?”
“발목은? 아까 삐끗한 거 같은데 괜찮아?”
“…….”
“내일 데이트는 주로 실내에서 해야겠지? 눈도 퉁퉁 부어서 뭘 볼 수나 있을지.”
“이 호랑 말코…… 새끼가…….”
이 모든 것이 그의 계략인 줄도 모르고 그동안 전전긍긍했던 것만 생각하면 속에서 천불이 나고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이 저절로 말려들어 주먹이 쥐어졌다.
강현이 그녀로부터 몸을 슬쩍 떼어내더니 옅게 웃으며 주먹을 쥔 손목을 살포시 잡았다. 그리고 제 얼굴로 가져갔다.
세나의 시선이 자신의 손을 따라 위로 들렸다.
강현은 세나와 눈이 마주치자 샐쭉하게 눈꼬리를 접었다.
“내가 더 잘해 줄 테니까, 이제 그만 튕기고 나랑 만나. 기세나.”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이 어디로 향할지 아는지 모르는지.
강현은 능청스럽게 세나의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쪽,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강현의 입술 선이 짓궂도록 휘었다.
당했다는 마음에 화가 나려다가도 그의 장난기 가득한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이 한없이 녹아내려 두근두근, 설레었다.
“……진짜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 난 또 뭐 이런 남자한테 반해?”
“키스해도 돼?”
원초적인 질문에 피어오른 수줍음으로 세나의 눈동자에 물결이 일었다.
“……그런 걸, 언제부터 물어보고.”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떨구고 중얼중얼, 대답은 끝을 맺기도 전에 상대의 입안으로 잡아먹혔다.
말캉하고 뜨거운 온기를 품은 접촉에 동그랗게 떠졌던 두 눈이 스르륵, 감겼다.
울음은 진작에 멎었었지만, 잔잔한 흐느낌이 남아있던 터라 호흡이 불안정했다.
세나는 서툴게 입을 벌려 빈틈으로 산소를 빨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그 작은 틈조차 용납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에 의해 숨이 콱콱 틀어막혔다.
첫 키스를 하는 소녀처럼 숨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몸을 바르작대자, 달콤한 숨결이 입안 가득 들어찼다.
세나는 강현의 입술에 매달려 그의 숨결을 쫓았다.
촉촉이 젖은 입술이 교차하고 서로가 서로를, 아쉬울 것도 없이 탐했다.
아득해진 귓가에 두 사람을 스쳐 지나는 다른 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나 달콤함에 매료되어 부끄러움도 잊고 입술을 맞물렸다.
쪽쪽쪽, 물기 어린 짧은 소리가 몇 번인가 반복되고 또다시 소리도 없는 깊은 접촉이 이어졌다.
노을이 지고, 어둠이 내린 공원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두 사람의 머리맡을 비추는 둥근 조명이 달빛처럼 은은했다.
가슴을 들썩이며 호흡을 가다듬는 세나의 이마에 강현이 제 이마를 기댔다.
세나의 코끝에 강현의 코끝이 닿았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 도망치기만 해봐. 여기 공원 CCTV, 아침 뉴스에서 보게 될 줄 알아.”
그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웃음이, 세나의 입술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고백에 대한 응답치곤 되게 살벌하네요.”
“기세나의 마음을 얻으려면 이 정도쯤은 해야 하지 않겠어?”
“참, 철두철미하네요. 키스하면서 CCTV 확인까지 하고.”
“이거야말로 낙장불입이지.”
“선배야말로 낙장불입이에요. 공개적인 장소에서 키스까지 했으니, 끝까지 책임져요.”
“바라던 바야.”
세나가 수줍게 물든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강현의 가슴에 살포시 이마를 기댔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울림이 자신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더는 그에게 숨기는 게 없다는 안도감.
그리고 누가 볼까 두려웠던 제 본모습을 알고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준 그가 너무나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에 반해 보잘것없는 자신이 어떻게 하면 그에게 받은 모든 것을 돌려줄 수 있을까,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런데 선배 왜 여기 있어요?”
“볼일이 있어서.”
개인적인 일이 있어 그가 일찍 퇴근했다는 장철호 실장의 말이 떠올랐다.
강현은 뭔가 머뭇대며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뭔데요? 내가 물어봐도 돼요?”
세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현은 대답을 아끼는 것치고 표정이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무슨 일이기에 고민하는 걸까.
괜히 물었나 싶어 제 말을 주워 담으려 하는데, 강현이 세나를 일으켰다.
“발목은 좀 어때? 걸을 수 있겠어?”
욱신욱신한 통증이 옅게 남아있었지만, 걷는 데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세나가 제자리걸음을 하며 발목 상태를 체크하다 살짝 절었다.
그러자 강현의 눈썹이 일순 일그러졌다.
“응급실이라도 갈래?”
“이 정도로 응급실 가면 의사들이 욕해요. 그냥 파스 붙이면 될 것 같아요.”
“업어줄까?”
강현이 금방이라도 안아 들 듯 말하자, 세나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뇨! 완전 오버야. 진짜. 내가 애도 아니고.”
“어린애처럼 펑펑 울 때는 언제고.”
“그건 선배가 너무 다정하게 달래주니까! 원래 울 때 달래주는 사람이 있으면 더 서럽단 말이에요!”
“내 앞에서만 울어. 그럼 얼마든지 달래 줄 테니까.”
“뭐래, 이제 안 울 거예요! 절대로!”
“……그래?”
이번에는 세나의 눈매가 게슴츠레하게 좁아졌다.
저 입꼬리에 걸린 빙긋한 웃음으로 보건대, 이 일을 가지고 한동안 저를 놀려 먹을 셈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놀려먹을 건데요?”
강현은 그녀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하아……. 진짜. 제 팔자 지가 꼰다고 하던데, 내가 딱 그 짝이네요.”
이기지 못할 싸움은 거는 게 아닌데.
그를 상대할 때마다 매번 겪는 일인데도 도무지 학습되지 않았다.
가만 보면 오히려 자신이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울긋불긋 번진 뺨 위로 번지는 열꽃에 세나가 한 손으로 부채를 만들어 펄럭거렸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 내 앞에서 편했으면 좋겠다고. 울고, 떼쓰고, 투정 부리는 거까지도 내 눈엔 다 예쁘니까.”
“울고 떼쓰는 게 뭐가 예쁘다고.”
퉁퉁 부은 눈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입술을 삐쭉거리는 그녀가 못 견디게 귀여워 강현의 손끝이 간질,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고 말았다.
한 품에 쏙 안기는 그녀의 여린 몸이, 제가 원하는 만큼 꽉 조이면 으스러질까 강약을 조절해서 가능한 빈틈이 없도록 안았다.
아, 정말이지 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매번 고민하지만, 정답이 없어 힘들다. 그냥 이렇게 안달이 날 때마다 품에 안을 수밖에.
강현의 품에 안긴 세나가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선배에 대해 알고 싶어요.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 나 진짜 많이 후회했어요. 선배는 나를 잘 아는데,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속상하고 그래서 내가 더 못나 보이고. 그러니까 이제라도 나에게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럴게.”
답답할 만도 한데 밀어내지도 않고, 품에 안겨서 웅얼대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강현은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도 못하고 제 품에 안겨있는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다디단 체향을 만끽했다.
잠시 뒤 강현은 세나의 목덜미에 촉, 가볍게 입을 맞추며 으스러질 듯 꽉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세나의 양쪽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 잡은 그가 고개를 낮춰 눈을 마주쳐왔다.
그윽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세나의 표정을 살폈다.
“불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어.”
세나를 바라보는 강현의 얼굴에 만연했던 장난기가 싹 걷히고, 그의 검은 눈동자엔 진중함만이 남았다.
“어쩌면 너와 나 사이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연이길래 이토록 그를 조심스럽게 만드는 걸까.
그러나 세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흔들리지 않을 거란 결심을 굳혔다. 오로지 류강현이란 남자 하나만 믿기로 했다.
“뭐든. 다 괜찮아요. 선배도 내가 바보 같고 못난 짓을 할 때마다 실망할 법도 한데, 이해해줬잖아요.”
“그거랑은 조금 달라.”
“아니야. 그게 뭐든 다 이해할 수 있어요.”
“…….”
강현은 잠시 말문을 멈췄다.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그녀에게 해야 하는 이야기였다.
물론 기세나라면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란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티 나지 않는 불씨가 더 무서운 법이었다.
강현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저를 직시하는 세나를 보았다.
물기가 자욱했던 눈망울에 물기가 걷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초롱초롱 빛을 낸다.
자신의 결심이 절대 바뀌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올곧은 눈빛과 힘주어 다문 입술.
저 입술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꼭 해야 하는 말이었다.
강현은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들을 애써 잠재우려 숨을 삼켰다.
저와 만나기로 한 이상 그녀도 알 권리가 있으니.
“말해줘요. 뭐든. 괜찮아요.”
“일단, 가자.”
강현이 살짝 구부린 팔꿈치를 세나를 향해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보다 한 마디 가량 작은 손이 엉겅퀴처럼 팔뚝에 감겨왔다.
강현은 저를 지지대 삼은 이 손이 멀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걸음을 내디뎠다.
병원으로 돌아와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가 아직 어디로 가는 건지 말해 주지 않았기에, 세나는 고개를 갸웃댔다. 그러다 강현이 엘리베이터의 7층 버튼을 누르자, 눈을 부릅떴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그를 뚫어질 듯 봤지만, 강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떤 말도 주고받지 않은 채 7층에서 내렸다.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은 간호사 스테이션을 두고 양쪽으로 갈라진 복도 앞에서 멈췄다.
왜 다시 여기로 돌아온 것일까.
이 복도 병실 어딘가에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 여자만 떠올리면 본능적으로 불쾌한 감정이 불쑥 치밀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세나가 팔뚝에 얹은 손에 힘을 줘 그를 돌려세웠다. 혼자만의 생각에 매몰돼있던 강현이 그제야 입을 뗐다.
“널 보면 반가워해 줄 사람.”
“이연화 씨는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