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완벽하지 못한 순간들2022.03.29.
마치 간이라도 맡겨둔 토끼를 보는 듯한 제 어미의 눈초리를 마주하고 확, 질려버렸다. 일말의 정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아마 이럴 때 떨어지라고 있는 건가 보다. 한 공간에서 이 방의 공기를 나눠마시고 있다는 것조차 소름이 끼친다.
“모성애는 애초에 가진 적도 없다 친다지만, 어떻게 딸년의 몸에 칼을 댈 생각을 하지?”
“검사를 받는 게 뭐가 어렵니? 힘든 거 하나 없다더라.”
방금 저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귀가 아닌 다른 곳을 통해서 흘러들었나 싶을 정도로 억장이 무너졌다. 가까스로 세워놓은 벽에 균열이 생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와르르 주저앉았다.
“미쳤구나, 당신. 정말 미쳤어.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날 낳았을까? 차라리 배 속에 있을 때 지워버리지.”
“그래, 네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지울 걸 그랬다. 적합 검사 한번 받아 보라는 거지 내가 당장 간을 떼 달랬니? 그리고 부모가 아프면 자식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 아니니?”
도리어 자신을 비난하는 이연화에게 세나가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썼다.
“부모가!! 부모 같아야지! 엄마가!! 내 엄마 같아야 마땅한 일이지!!! 당신이 내 엄마였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어?! 남자에 정신이 팔려서 딸년이 죽어가는 것도 모른 척하던 사람이 당신이란 여자인데!!! 감히!! 감히 이제 와서 자식 된 도리를 운운해?!”
“목소리 낮춰. 여기 병원이야.”
“차라리 그냥 죽지 그랬어?! 그랬다면 당신의 빈소를 찾아가 후회라도 할 텐데!! 근데!! 이제 그럴 가치도 없다는 걸 알았어.”
“뭐?”
“당신한테 내 간을 내줄 바에 내가 나가 죽을래. 그래, 그게 낫겠다! 목을 매달든 아니면 지금 여기서 뛰어내리든. 절대! 당신 같은 여자한테 그 어떤 것도 못 줘! 안 줘! 내가 죽어서 이 장기가 죄다 썩어 문드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일은 절대 없어!”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이를 악다물었다. 눈앞에 앉은 여자의 앞에서 흘린 눈물은 단 한 방울이라도 아까울 것 같아서. 주먹을 불끈 쥐고, 손톱을 세웠다. 손바닥을 아프게 누르는 힘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기세나!”
더는 말도 섞기 싫다고 돌아서는 세나를 이연화는 가만히 보내주지 않았다. 여린 볼살이 어금니에 씹혀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세나는 뻣뻣하게 굳은 몸을 돌려 핏발이 서린 눈으로 이연화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진짜 내 엄마라면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마. 그러다 혹시 알아? 당신이 죽기 직전 마음이 동해서 간 한쪽 내줄지?”
협박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열과 성의를 다해서. 저주를 퍼붓고, 악담을 쏟아내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파렴치한 여자의 입에서 한 마디라도 더 튀어나온다면, 정말로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 내가 뭘 기대한 걸까. 내가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저 여자를 만나러 온 것일까. 그냥 모른 척 무시했으면 그만인데. 그랬다면 이런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무슨 미련이 남아서, 그 거지 같은 미련에 발목이 잡혀 제 발로 지옥으로 걸어들어왔을까. 두 여자의 격앙된 싸움에 병실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이 따로 없었다. 환자와 보호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은 걸음걸음마다 연민과 동정, 그리고 측은한 시선이 끈덕지게 들러붙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혀를 끌끌 차는 소리. 그따위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릴 적 숱하게 받아봤던 시선이니까. 바람난 마누라 단속도 못 하면서, 판사는 무슨. 집안부터 챙겨야지. 요망하게 생긴 게 나중에 커서 제 엄마처럼 남자 밝힐 게 뻔하네. 집구석이 그 모양 그 꼴인데, 가정교육이 잘 될 턱이 있나. 사실을 알게 된 기장수가 동네를 떠나기 전까지, 무수히 들었던 동네 어른들의 뒷말들에 이미 이골이 나 있었다. 그 욕들을 왜 저가 얻어먹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그때는 그게 전부 제 잘못 같았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눈에 불을 켜고 완벽해 지려 노력했다. 그러니까. 지금도. 완벽하게 퇴장을 해야 한다. 이윽고 병실 바깥에 다다라서야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를 본 순간 가까스로 참았던 눈물이 저도 모르게 왈칵 터져버렸다.
“선배가…… 왜 또 여깄어, 또……. 왜!!”
마지막 외침은 미어진 가슴을 가눌 길 없는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강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 진짜. 짜증 나.”
커다란 눈망울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쉴 새 없이 흘러내렸고, 흐릿해진 시야로 그를 담기엔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재차 부르는 한 여자의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팠다. 세나는 강현을 밀치고 거친 걸음으로 복도를 내달렸다. 쿵쾅쿵쾅 심장이 날뛰고 머릿속에 온갖 잡생각들이 번쩍번쩍 떠올랐다. 왜. 왜. 왜. 왜 꼭. 이럴 때. 문장이 되지 못한 생각들 사이로 ‘왜?’라는 물음이 뱅글뱅글 어지럽게 맴돈다. 세나는 눈동자 표면 위로 가득 들어찬 물기를 손바닥으로 훔치며 입술을 꽉 씹었다. 이럴 때 드라마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어디론가 사라지고픈 저를 숨겨주면 좋으련만, 이미 1층으로 내려간 엘리베이터는 더디게 층수를 늘려갔다. 세나의 뒤로 저벅저벅 한 인기척이 따라붙었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몸을 틀었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내딛다가, 비상구를 알리는 초록색 등을 발견했다. 세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비상구 문을 열고 그대로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쁘게 내딛는 걸음을 따라잡지 못한 하이힐이 삐걱거리며 발목을 접질렸다. 그러나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세나는 그저 계단 손잡이를 꽉 붙들고 넘어지지만 않기를 바라며 발을 놀렸다. 탁탁탁탁탁탁- 불규칙한 발소리가 비상구를 울렸다. 하지만 비상구에서도 저 혼자가 아니었다. 뒤따라오는 발걸음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기어이 하이힐 한 짝이 벗겨지며 퉁퉁 계단 아래로 굴렀다. 갑작스런 낙차의 폭에 몸이 휘청였다.
“아……!”
그 순간 무릎을 꿇다시피 앞으로 고꾸라지는 세나의 팔뚝을 강하게 잡아챘다. 강현이었다. 세나는 저를 붙드는 단단한 힘을 떨치려 팔을 힘껏 휘둘렀다.
“놔요!”
“괜찮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분명 피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텐데도, 부득불 쫓아와 이런 꼴을 보고 마는 것인지, 넘어지는 저를 붙잡아 준 것이 고맙기는커녕 도리어 화가 났다. 제발 얘기 좀 하자고 매달릴 때는 그렇게 피하더니, 왜 이제 와 위해주는 척인지.
“제발요! 도망친 거 뻔히 알면 모른 척 좀 하라구요!!”
강현은 아무 말 없이 세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은 울분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엉망으로 구겨진 얼굴만큼이나 엉망으로 흐트러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선배는 왜 매번 이럴 때 나타나요?! 왜! 내가 가장 추할 때!!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 튀어나올 때마다! 매번! 매번! 왜 선배가 있냐구요!”
“…….”
“어때요? 속 시원해요? 잘난 척 콧대 높이고 있던 계집애가 제 엄마한테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그리고 어떤 막말을 뱉었는지, 눈으로 보니 속이 시원하냐구요!”
뚫린 입이라고 다다다, 소낙비처럼 누구를 향한 울분인지 모를 말들이 쏟아졌다.
“왜요? 한소리하고 싶어서 쫓아왔어요? 나한테 배신당해서 열 받았다 이거예요? 잘됐네! 해요. 마음껏 해! 어차피 나도 선배한테 비난받을 거 받고, 용서 빌고 이 지긋지긋한 마음 다 끝장내고 싶으니까!”
그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거세진 감정의 파도가 이성마저 집어삼켰다.
“일단 진정 좀 하고, 발목 상태부터 확인하자.”
“뭘 진정해요? 이 꼴을 하고 진정이라 말했어요? 그렇게 이성적인 사람이라서 나한테 그런 식으로 군 거예요?”
지금 세나는 상대의 행위가 적의든 선의든, 뭔가를 구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저 저를 향해 다가오는 모든 것에게 칼을 휘두르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찔렀다. 그런데 그는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않는다. 뭐 어쩌라는 걸까. 뇌를 거치지 않은 생각들이 바글바글 끓어오르고 이것을 목구멍 너머로 내뱉지 않으면 그대로 질식할 것 같았다.
“이젠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잖아! 당신 뒤통수나 치는 배은망덕한 년이니까. 그러니까 쫓아오지 말아요.”
접질린 발목의 욱신욱신한 통증은 가슴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통증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둔통이었다.
“나 비웃을 거면 얼마든지 비웃어도 되는데, 제발 나 몰래 혼자서 비웃어요. 나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홱 몸을 돌린 세나가 다시 계단을 타고 빠르게 내려갔다. 절뚝절뚝한 발걸음으로 꿋꿋이 1층에 도달해서 그대로 병원 로비를 빠져나갔다. 손등으로 훔쳐내던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소맷귀까지 흠뻑 적셔놓았다. 무슨 정신으로 회전문을 통과했는지도 모른 채 넋이 빠진 동공은 눈앞의 풍경조차 담아내지 못했다. 물속에 잠긴 듯 빡빡하게 조여오던 숨통이 바깥공기에 닿자 부지불식간에 퍽 터졌다. 그러나 망연자실한 기분은 떨칠 수 없었다. 일단 차로 가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데 별안간 몸이 휘청거렸다. 고개를 떨구자, 신발을 잃어버린 왼쪽 발이 보였다. 유리구두를 잃어버린 신데렐라도 아니고.
“아아……. 내 꼬라지 좀 봐. 이게 뭐야……. 흐윽.”
지금 자신의 꼴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리 한 짝이 망가진 밀랍 인형 같았다. 주차장으로 가야 하는데, 차를 어디다 대놨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은 어딘가에 숨어서 그냥 펑펑 울고 싶은데. 누군가가 저를 쫓아오기 전에 어디론가 이동하는 게 급선무였다. 고개를 이리저리 크게 돌리자 병원 우측 편에 작은 쉼터가 눈에 들어왔다. 세나는 다른 쪽 신발마저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다. 절뚝절뚝한 발놀림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든 쉼터 구석진 곳. 허벅지 춤까지 오는 화단에 걸터앉았다. 푹 숙인 고개를 바닥에 고정한 채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렸다. 후우 하고 길게 내뱉은 호흡 사이로 히끅, 명치 안쪽이 걸려 어깨를 떨었다. 몇 번이고 반복하자 폐부를 쥐어짜던 숨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제야 세나는 머릿속으로 한 남자를 떠올렸다. 류강현이 왜 그 자리에 있었던 건지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맞닥뜨린 상황에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워서 또 도망치고 말았다. 못 볼 꼴을 보인 상황에서 좋게 넘겨도 모자랄 판국에 오히려 분풀이를 해버리다니. 아아- 도대체 뭐라고 지껄인 것일까. 정말 다 끝나버렸다. 그와 자신의 사이는 늘 이것이 문제다. 자존감은 낮은 주제에, 그것을 숨기려 자존심만 내세운 꼴이 우습다. 찌질하고, 구차하고, 수준 낮은 제 본성을 어째서 그에게만 들키고 마는 걸까. 이런 저를 좋아한다니. 그래. 당장은 겉만 보고 좋아할 수 있어도 실체를 알게 된 지금, 학을 떼고 나가떨어질 거였다.
“차라리 잘됐어. 그냥 이대로 끝내는 게 맞지. 더 상처받기 전에.”
그 시기는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상황이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강현에게 ‘나도 당신을 좋아한다.’ 말하고 싶었는데. 그의 차가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 저를 예쁘다, 예쁘다 하고 바라볼 때. 세상에서 제일 어여쁜 모습으로 그의 고백에 답을 하고 싶었다. 이미 아주 많이 늦어버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