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균열2022.03.26.
“그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예나 지금이나. 상처를 받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기세나에게는 본인만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마음을 연 상대에겐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요 몇 달을 가만히 지켜보던 김정한은 기세나의 변화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사과하고 싶어 하는 상대가 누군지, 그리고 그 상대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긴 몰라도 상대는 아마 기 변호사님 마음, 눈치챘을 겁니다.”
그의 말이 힘이 되었을까, 김정한 비서가 나가고 나서 잠시 고민하던 세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을 돌아 나와 전신거울에 제 모습을 한번 비춰보고 입가에 미소도 띄워보았다. 눈치도 없이 강현을 마주 보고 헤실헤실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버벅거리면서 꼭 해야 할 말을 못 하는 일은 없도록 하고 싶었다. 가슴을 부풀려 크게 심호흡도 하고,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보일까, 이리저리 자세를 취해보았다. 그러다 이래도 저래도 어설픈 동작에 입술을 부르르 털며 긴장감을 해소한 뒤 옆구리에 끼워둔 클립보드를 신줏단지 모시듯 두 팔로 고이 감쌌다.
“아. 몰라. 일단 부딪혀보고. 설마 받아야 할 서류를 앞에 두고 문전 박대하겠어?”
예전 같았으면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이렇게 이쁜 나를 보고.’였겠지만, 죄를 지은 자의 양심상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강현의 집무실 앞에 선 세나가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똑똑, 두 번 방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기대하던 목소리가 아닌, 조금 더 선이 굵은 목소리였다. 세나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얼굴만 쏙 집어넣었다. 빠른 눈동자로 방 안을 살폈지만, 집무실 안에는 류강현이 아닌 그의 법률비서인 장철호만 있을 뿐이었다.
“……류 변호사님 안 계시는 거예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급한 건이 아니라면 제게 주시면 됩니다.”
장철호가 문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를 향해 두툼한 손을 내밀었다. 세나는 품고 있는 클립보드를 마지못해 건네며 물었다.
“언제 오는데요? 클라이언트 미팅 간 거예요?”
“오늘 안 들어오실 거예요. 개인적인 일로 막 퇴근을 하셨거든요.”
“개인적인 일이요? 무슨 일인데요?”
아직 다섯 시도 되지 않았는데 퇴근을 했다는 말에 의아함이 앞섰다. 더군다나 외부일정도 아니고 개인적인 일이라니. K 법무법인에서 일이 많기로 소문난 그가 절대 퇴근할 리 없는 시간이었다.
“그게 류 변호사님, 아…….”
장철호는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세나의 눈치를 살폈다. 곧이어 손에 든 클립보드의 모서리 면으로 목 언저리를 툭툭 두드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흠-.’ 하고 목청을 가다듬고는 쓴웃음을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제가 알면 안 되는 거예요?”
더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 않을 게 뻔한데, 괜히 아쉬운 마음에 장철호의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
“개인적인 일이다 보니 제가 어디까지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일단 전화를 한번 걸어 보시는 게.”
“진짜 개인적인 일 맞아요? 장 실장님. 요즘 선배가 저 피하는 거 아시죠? 오늘도 저 피해서 도망친 건데 일찍 퇴근했다고 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것도……. 제가……. 음……. 뭐라고. 할 말이…… 없는데요.”
곤란한 일인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띄엄띄엄 말을 잇는 게 딱 거짓말을 하다 들킨 모양새였다. 아, 진짜. 이젠 정말 모르겠다. 저가 잘못한 건 백번 맞지만, 자꾸 이런 식이면 삐딱하게 행동하게 되는 것이 사람이었다. 원래 남의 가슴이 칼에 찔려 피가 철철 흘러도, 종이에 살짝 베인 제 손가락이 더 아픈 법이니까.
“됐어요. 가 볼게요. 장 실장님이 선배 사람인 건 알았지만, 저한테까지 이렇게 거리를 두실 줄 몰랐어요. 진짜 너무하네요.”
쾅!!! 벽이 흔들릴 정도로 세게 문을 닫고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장철호가 한숨을 푹 쉬며 제 이마를 탁 짚으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류 변호사님. 좀 적당히 하시지. 왜 중간이 없으십니까.”
이리 해서 연애는커녕 제대로 된 데이트는 할까, 걱정이 눈앞을 가렸다.
씩씩대는 걸음으로 방에 돌아온 세나가 소파의 쿠션을 집어 들었다.
“아아아아악!”
뭉쳐진 솜이 그녀의 울분을 묵묵히 집어삼켰다. 그러나 속은 후련하기는커녕 더 먹먹해졌다. 세나는 쿠션에 그대로 얼굴을 묻은 채 강현에게 하지 못할 말들을 속사포로 내뱉었다.
“좀생이! 밴댕이 소갈딱지! 류강현이 이 천하의 나쁜 새끼야! 아주 사람 피를 말려 죽일 작정 했지?! 이래서! 이래서!! 이래서!!”
이래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을(乙)이 된다고 했구나. 지금 이 기분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빨갛고 노랗다가 시퍼렇게 변한 물감들이 죄다 뒤엉켜 거무죽죽하고 탁한 색이 된 것 같았다. 한참을 분개하던 세나는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열이 뻗쳐와 그대로 소파에 쓰러지듯 널브러졌다. 감정적으로 치받는 생각들을 이겨보려 숨을 고르고 있는 찰나, 티 테이블 위에 올려둔 전화가 울렸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아무리 제 기분이 바닥을 치더라도 일하는 동안만큼은 프로여야 했다. 세나가 눈을 감은 채 손만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네. 기세나입니다.”
-“안녕하세요. 여기 서울 GN 병원인데요.”
“어디요? 병원??”
-“네, GN 병원이요. 이연화 환자분 보호자 되시죠?”
“……누구요?”
재차 되묻는 세나의 행위에 짜증이 다소 섞인 목소리가 답했다.
-“이연화 씨요. 혹시 지금 바로 병원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
낭랑한 목소리의 여자는 세나가 떠올리기도 싫은 사람의 이름을 말하더니, 의논할 일이 있다며 병원으로 방문을 요구했다. 어이가 없어 뭔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상대는 며칠 동안 전화를 했는데 보호자가 받지를 않아 곤란했다고. 사안이 급해 간호사실에서 직접 전화한다는 말까지 덧붙었다.
-“오늘 좀 보호자 방문 부탁드릴게요.”
상대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호출로 바쁜 모양인지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뭐지……?”
분명 ‘이연화 환자분의 보호자’라고 했다. 그 여자의 보호자건 뭐건 되고 싶은 생각은 단 1%도 없었지만, 이연화라는 이름 뒤에 ‘환자’라는 단어가 덜그럭 마음에 걸렸다.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 세나의 시야가 자꾸만 멍해졌다. 그러다 신호가 바뀌는지도 모르고 서 있다, 뒤차의 클랙슨 소리에 황급히 액셀로 발을 옮겼다. 그러다 몸이 앞으로 쏠려 시트벨트에 상반신이 덜컥 걸린다. 그렇게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병원으로 가는 내내 덜거덕거렸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병원 주차장에 대충 차를 세워두고, 로비를 가로질러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가야 할 층 버튼을 누르고 물러나려는데 갑자기 다리에 힘이 확 풀려 안전 바를 짚었다. 세나는 그제야 자신이 손을 벌벌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4인실 병실 앞에 도착한 세나는 미닫이문을 열지도 못하고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거렸다. 문 옆에 조그맣게 붙여진 입원환자 상황판이 눈에 들어왔다. 세나는 상황판에서 ‘이*화’라는 이름을 확인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확신할 수 없었다.
“잠시만요. 실례할게요.”
굳게 닫혀있는 줄만 알았던 문이 갑자기 열리고, 세나의 옆으로 간호사가 갖은 의약품이 담긴 트레이를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트레이를 쫓던 세나가 홀린 듯 간호사의 뒤를 따라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제일 안쪽 창가에 자리한 침상에 환자복 차림으로 누워있는 이연화를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환자인 이연화는 처음 세나를 찾아왔을 때와 달리, 짙은 화장기를 지운 민낯이었다. 퀭하게 팬 볼과 눈 밑 그늘. 빨간색 립스틱 뒤에 가려졌던 보랏빛의 입술은 파리했다. 세나가 보기에도 이연화의 얼굴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이연화가 몸을 뒤척이다 세나를 발견했다. 그녀가 리모컨을 눌러 침대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왔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저 사람에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해야 하는 걸까.
“넌 입도 없니? 괜찮냐고 묻지도 않고 뭘 그렇게 멀뚱멀뚱 보고만 있어?”
이연화의 눈꼬리가 신경질적으로 올라섰다. 세나를 향한 어투에도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그러게 진작 얘기 좀 하자 했을 때 말을 들었으면 좀 좋아? 이게 무슨 꼴이니?”
아파서 예민하다기보다는 분풀이할 대상을 대하는 듯했다. 더는 상처받지 않을 거라 여겼던 마음이라도 일말의 기대감조차 도려내는 비수가 꽂히자, 아프기는 매한가지였다. 세나는 상대의 날 선 반응에 잠깐이나마 느슨하게 풀렸던 경계심이 제 기능을 되찾았다.
“그런 꼴 보여주려고 여기로 부른 거 아니었어요? 왜 불렀어요?”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물어보지도 않아? 하나밖에 없는 딸년이 제 엄마를 쳐다보길 지나가는 개만도 못하게 보니. 그 인간이 널 어떻게 가르쳤는지 참 알만하구나.”
세나가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아파 보이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어차피 죽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여자다.
“어디가 아픈지 궁금해해야 해요? 제가 왜요? 아아- 이제 당신을 돌봐줄 남자가 없어요? 그래서 나보고 당신 간병이라도 하라는 거예요?”
“누가 간병이나 해달라고 부른 줄 알아? 나도 그딴 거 필요 없어.”
“그럼 왜 불렀어요? 안 그래도 바쁜데 이딴 수작질로 오라 가라 한 이유가 뭔데?”
세나의 반문에 이연화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뭔가 해야 말이 있는데 쉽게 뱉을 수 없는 말인 듯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기까지 했다. 돈이 필요한 걸까? 아버지에게 저를 팔아넘긴 대가는, 받아 간 10억이란 돈이 전부가 아니었다. 수도권의 아파트와 그밖에 다른 것들도 있었다. 그 큰돈을 홀라당 다 까먹고 빈털터리가 된 걸까? 그럼 돈이라도 쥐여 주고 떼어내야겠다.
“검사 하나 받아.”
“검사?”
“그래. 오늘 등록하면 다음 주쯤에 검사받을 수 있을 거야. 의사 선생님이랑 말 다 끝내놨어.”
저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갑자기 검사를 받으라니. 선뜻 무엇을 말하는지 와닿지 않았다. 십여 년을 남처럼 살았는데 이제 와 딸의 건강을 염려해서 검사를 받으라고 하는 말 같지도 않았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간 이식 적합 검사받으란 말이야.”
“……뭐, 뭘 받으라고?”
“몇 해 전부터 몸이 안 좋았는데, 간암 초기라더라. 그래서 이식이 필요해.”
귀는 열려있고, 눈은 멀쩡히 앞을 보는데, 제가 보고 들은 그것이 당최 무엇인지 이해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버석거리는 미소가 입가로 스멀스멀 번지더니, 이내 헛바람에 배부른 것처럼 실없는 웃음이 픽픽 새어 나왔다.
“……하……! 하! 하……!”
세나의 어깨가 크게 들썩거렸다. 어찌나 기가 찬 지 웃기지도 않은데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