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숙려기간2022.03.22.
당황한 것도 잠시, 세나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 걸음을 떼었다. 강현은 그녀를 피해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강현과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틀게 된 세나가 그와 부딪힐 뻔했고,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아. 죄송해요.”
“…….”
이번에 좌측으로 비켜섰으나, 강현 역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또다시 막아서는 꼴이 되었다. 아침부터 보이는 멍청한 꼴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가 갈 길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자 강현이 세나의 어깨를 덜컥 잡아 세웠다. 그러고는 그녀의 몸을 빙그르 돌려세우더니 엘리베이터 밖으로 내려주었다. 졸지에 짐짝처럼 내려져 덩그러니 서 있는 세나를 두고 강현은 아무 말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선배……!”
이대로 그를 보내면 언제 또 만날지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세나가 다급히 손을 뻗어 강현의 소맷귀를 잡았다.
“얘기 좀 해요. 해야 할 말이 있어요. 지금 아니라도 좋으니까 언제 시간 되는지만 말해주시면……”
“나중에. 지금은 좀 바빠서."
이상했다. 분명 손안에 그의 소맷귀가 잡혀 있는데,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는 듯했다.
“……나중에 언제요?”
절박한 세나와는 다르게 강현의 얼굴은 지극히 무표정했다. 그러나 나른하게 감겼다 떠진 눈꺼풀 아래 무정하고 차가운 시선은 소매에 매달린 무게를 귀찮아하는 듯 보이기도 했고, 불쾌하게 보는 듯하기도 했다.
“…….”
세나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치아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강현은 손목을 돌려 시간을 확인한 후 그녀의 손목을 살짝 잡아 제 소맷귀를 붙든 손을 떼어냈다. 추풍낙엽처럼 허무하게 팽개쳐진 제 손이 어색했다. 그와 동시에 철렁,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더 붙잡지 않을게요. 하나만-.”
대답 대신 짧은 한숨이 머리맡에서 흩어졌다. 세나는 입안이 바짝 말라와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차마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가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채 물었다.
“늦더라도 기다릴 테니까, 일 끝나고는 가능해요?”
지금 당장은 바쁘다니까, 퇴근할 때쯤에는 시간을 내주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강현의 입술은 좀처럼 열릴 줄 몰랐다. 그러는 사이 그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삑-, 경고음을 울리며, 그 문이 닫혀버렸다. 알아서 생각하라는 걸까. 그래서 일부러 답을 하지 않을 것일까. 여지라도 주면 좋으련만, 왜 사과를 전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인지 야속한 마음에 눈가가 시큰거렸다. 그리고 허무했다. 기껏 준비한 말들은 그의 냉랭함에 막혀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나가질 못했다. 이러다 영영 그와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불길한 생각에 마음이 쩌릿쩌릿 아파졌다.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를 응시하는 세나의 갈색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렸다. 곧 있을 상담만 아니었다면,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 선배한테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겠지.’
연애를 할 때도 서로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별것 아닌 일로 다툼이 일고, 서운해지고, 속상한 나날들이 이어지면 가끔은 우리의 사랑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의심이 들기도 하고 마음이 지치기도 하니까. 시간을 갖는다는 건, 함께 했던 시간을 돌아보며 서로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앞으로의 관계를 튼튼히 다질 기반으로 삼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이혼도 마찬가지다. 자녀가 없는 경우엔 1개월, 자녀가 있는 경우엔 3개월의 숙려기간이 있다. 감정적인 선택으로 홧김에 헤어짐을 택하는 부부들. 그들의 양육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 자녀들을 위해. 법이 강제적으로 정한 이 시간을 통해 그동안의 결혼생활을 돌아볼 수 있도록 2007년쯤 민법 개정으로 생겨났다. 서로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 몇십 년을 다르게 살아온 이들이 함께 가정을 꾸리고 살을 맞대고 사는 데에 평생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듯이 아무리 긴 시간을 갖더라도 상처가 아물지 못한다거나, 수많은 시도 끝에 헤어짐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끝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하기에, 사랑했기에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서로에 대한 이해. 그 이해의 첫걸음은 대화다.
‘정말 맞지 않아서 헤어지는 건 최후의 보루다. 충분히 시간을 갖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혼을 마주하는 변호사 기세나가 상담자들에게 늘 전하는 말이었다. 세나는 북받쳐 오른 감정을 삭이려 고개를 젖히고 후우, 긴 숨을 잇달아 토했다. *** 세나는 곱게 포개어진 손등 위에 이마를 내렸다. 손등 위로 뜨끈한 미열이 번졌다.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크게 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허무함이 가득한 갈색 눈동자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대화. 중요하지. 그런데 일단 만날 수가 있어야 대화를 하지.’
수많은 상담자에게 일단 대화부터 하라고 조언을 했던 자신은 정작 벽만 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이후 퇴근까지 기다렸지만, 강현은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내일이면 벌써 주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확신했다. 류강현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세나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하, 거절이지. 뭘 미련을 갖니. 딱 보니 ‘이젠 너 싫어, 그만 꺼져.’인데. 상황 파악 안 돼? 이 말을 꼭 육성으로 들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변명이든 핑계든 들어줄 수는 있잖아. 질려서 더는 좋아하지 않더라도. 사과할 기회는 줘야지.’
‘그 사과가 누구 좋으라는 건데. 너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거잖아? 아냐? 혹시나 하는 기대는 집어치워. 너 진짜 이기적인 거 알지?’
‘알아! 나도 안다고……. 그래도 이유를 알면 정상참작으로 용서를 해-.’
‘용서? 너도 이런 일 당하면 화부터 낼 거면서 왜 그가 용서해 줄 거로 생각해?’
양쪽 귓가에, 두 개의 인격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 세나의 마음속엔 응어리만 점점 쌓였다.
“아아- 모르겠다. 정말……. 나도 미칠 것 같단 말이야…….”
테이블 위로 팔꿈치를 교차해 그 아래로 얼굴을 묻었다. 등을 굽혀 엎드린 상태로 고개만 모로 돌렸다.
“그냥……. 선배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다.”
보기 좋게 휘어서 비스듬한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짙은 눈썹 머리를 꿈틀이며 콧잔등을 살짝 찌푸릴 때가. 매섭게 치켜뜬 눈매는 저를 마주할 때면 살며시 누그러지며 순식간에 나른해졌다. 그걸 보고 있으면 절로 심장이 쿵쿵 방망이질했다. 턱을 괴고 있을 때, 얼굴의 한쪽 면을 죄 감싸는 큰 손은 또 어떻고. 곰 발바닥만 한 커다란 손바닥이 툭, 정수리에 닿았다 떨어질 때는 잘한 것도 없는데 대단한 칭찬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이상해졌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자기 손에 들어 있는 것에 대해선 정당한 평가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잃게 되면 그제야 값을 매겨보려 한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셰익스피어가 남긴 말이었다. 그러게. 잃어보니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절절하게 깨닫고 만다. 그가 먼저 얘기 좀 하자고 찾아와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따금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에 제 방문을 바라보았지만, 열릴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희망 고문이 따로 없었다. 세나는 테이블 위에 쌓인 종이 뭉치들을 의미 없이 휘리릭 훑었다.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류강현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고 싶었지만, 가져갈 만한 게 없었다. 초조한 마음에 뒤꿈치로 바닥을 튕기다 발치에 있던 쓰레기통을 엎었다. 점심에 먹고 버린 노란 현탁액 비닐들이 잔뜩 구겨진 채 바닥을 어지럽혔다. 세나는 움직이기도 싫은 상태라 의자에 앉은 상태로 허리만 숙였다. 힘없는 팔을 휘적휘적하고 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파드득 어깨를 떨며 상체를 급히 일으켜 세우다 테이블 밑판에 쿵 머리를 찧었다.
“……뭐 하세요?”
혹시나 했는데, 김정한 비서실장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 줍다가……. 무슨 일로 오셨어요?”
골을 울리는 욱신욱신한 통증과 파도처럼 덮치는 실망감에 세나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김정한 비서실장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주먹을 말아 가까스로 참아내고 말문을 열었다.
“대표님이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면 퇴근을 같이 하자고 하시네요.”
“아, 왜요?”
“목적지가 본가인 걸로 봐서는 집안 행사인 듯 보이던데요?”
“뭐 대단한 집안이라고 행사씩이나. 그런 거 없어요. 그냥 기 대표님의 변덕이겠죠. 안 가요. 바빠요.”
“요즘 통 기운이 없어 보이신다고 걱정하시던데.”
“그걸 알면 계약이나 파기해달라고 전해주세요.”
김정한은 기세나가 파기하고자 하는 계약이 어떤 계약인지 정확히는 모르나, 눈치껏 알아차렸다. 그러나 기 센 두 부녀 사이에서 새우 등 터지고 싶지 않은 터라 쓸데없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일단 전달은 해드릴게요. 그럼 따로 일정이 있으신 건가요?”
“없어요. 없는데, 혹시나 해서요. 암튼 계약 파기해 주기 전까지 시간 없다고 전해주세요.”
“네. 그 말도 토씨 하나 안 빼고 전달해 드리죠.”
그가 들어왔던 문을 향해 몸을 돌리는 그때, 세나가 김정한 비서를 불러세웠다.
“저기, 김 비서님.”
김정한은 못 들은 척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기장수 대표가 벌여놓은 일거리를 처리하는 데만 해도 오늘 하루가 다 갈 판이었다.
“혹시, 바쁘세요?”
하지만 저 하얗고 조그만 얼굴에 ‘나 고민 있어요.’라는 문구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데, 모른 척하려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오늘 칼퇴근은 무리인가. 속으로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뭐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화가 난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얼마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까요?”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어떤 일은 진심을 담은 미안하다는 한마디로도 풀리니까요.”
“상대가 받아주지 않으면요?”
“기다려야죠. 용서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사람에겐 사과의 말이 폭력이 되기도 하니까.”
미안하다는 말로는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없기에. 상대를 마음껏 원망하고픈 사람에겐 용서라는 원치 않은 강요를 요구하기도 한다. 용서란 역설적이게도 때론 짐이 되고, 그것은 되레 또 다른 고통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미안하다는 말은, 고맙다는 말보다 더 신중해야 하고 어려운 것이다.
“어렵네요.”
“사람만큼 감정적이고, 복잡한 동물도 없다잖아요. 그래서 법이 있는 거고.”
“차라리 법의 심판을 받는 게 더 쉬운 것 같아요. 적어도 결과와 끝은 있으니까요.”
“법의 판결이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합당한 벌인지는 여전히 미지수죠.”
“…….”
“그래서 사과는 했습니까?”
얼굴을 보면 피하기 바쁜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했다. 세나가 힘없이 고개를 좌우로 젓자, 김정한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거 드릴 테니까 한번 가보세요.”
김정한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클립보드를 세나에게 건넸다. 그녀가 이게 뭐냐는 뜻을 담아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사람이랑 대화하고 싶은데 핑곗거리가 필요한 거 아니었어요? 중요한 서류니까 꼭 전달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