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협상과 협박의 차이점2022.03.19.
어설프게 벌어졌던 기자의 입이 합죽이가 되었다.
“그거 원본 저희한테 좀 넘기시죠.”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꼴을 지켜보던 장철호는 에이, 허심탄회 얘기나 좀 합시다, 하며 김병진 기자의 앞에 놓인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우리가 자료는 많은데, 결정적 증거가 담긴 사진이 없네. 근데 그걸 김병진 씨가 떡하니 가지고 있고, 그걸로 무려 삼억이나 해 드셨다는데. 나눠 좀 먹읍시다.”
어떻게 알고 저를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의 문제가 아님을 판단한 김병진의 어두웠던 낯빛이 점차 밝아졌다. 그러다 뭔가 떠올랐는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난 또 뭐라고. 하여튼. 여기저기 적이 많은 집안이라니까.”
여유를 되찾은 남자가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제게 바라는 것이 있는 것 같으니 우위를 점령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다 알고 오셨으니까 하는 말인데……. 이것도 나름의 신뢰가 바탕인 장사라고, 돈을 받았으면 원본 파일은 이미 넘기고 없죠.”
“벌써? 어이쿠 이거 어쩌나. 류 변호사님, 우리가 너무 늦었나 봅니다. 이야- 큰일 났네.”
장철호가 정말 아쉽다는 듯 능청스럽게 대꾸하자, 담배를 문 입술이 비틀린 웃음을 그렸다. 대강의 상황 파악이 끝난 김병진은 거들먹거리며 턱짓으로 라이터를 가리켰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장철호가 테이블에 있던 라이터를 이용해 불을 붙여주었다.
“쓰읍…….”
볼이 움푹 팰 정도로 깊게 연기를 빨아들인 김병진은 보란 듯이 장철호의 얼굴에 매캐한 연기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담배를 끼운 손가락을 까딱까딱, 허공에 연기를 흩뿌리며 강현을 슬쩍 떠보았다.
“원래 이런 건은 오고 가는 게 있어야 신뢰가 싹트지 않겠습니까. 정 저랑 거래하고 싶다고 한다면 제게 뭘 줄 수 있는지 말해보시죠? 그럼, 혹시나 남아있는 것 중에서 찾아드릴 수도 있고.”
그 물음엔 장철호가 대신 답했다.
“거래? 우리가 거래할 게 뭐가 있을까? 김병진 기자님한테 뭐를 해드려야 하나. 이미 채성민 팀장이 검찰에 고소당한 건 기소유예 만들어준 거로 알고 있는데?”
김병진이 장철호를 쳐다보며 뭘 그런 것까지 알고 있냐 눈썹을 추켜세우자, 장철호가 유하게 미소를 짓고 있던 입술을 단박에 굳혔다.
“우리는 다른 걸 들고 왔지.”
그리고 김병진의 손가락에 걸린 담배를 탁, 뺏어 술이 담긴 잔에 푹, 꺼트렸다.
“실내 흡연이 법으로 금지된 지가 언젠데, 무식하게 방 안에서 담배를. 내가 겉으로는 건강해 보여도 기관지가 네 살배기 아이처럼 연약해요.”
담배 연기를 환기시키려는 요량으로 두툼한 손을 허공에 붕붕 젓자 김병진의 정수리 부근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조금만 각도가 빗나가면 장철호의 손바닥이 머리통을 후려갈길 판이었다. 능글능글 살가운 척하던 장철호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하자 김병진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탐욕에 눈먼 기레기라 뒤에서는 손가락질하고 욕할지언정 자신의 기사 한 줄에 울고 웃던 놈들이 태반인데. 이런 식의 대우는 처음이라 자존심이 확 구겨졌다. 대호 그룹 법무팀장 놈도 제 앞에선 고개를 숙였다. 김병진은 불쾌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허공을 휘젓는 손을 밀쳐냈다. 그러고는 류강현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행동입니까?! 검사도 아니고, 변호사 주제에 갑자기 찾아온 것도 모자라, 뭐라도 맡겨놓은 양 무례하게 무슨 짓이야?!”
여태껏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류강현이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거래를 하려면 협상이 필요한데, 제가 협상을 하는 법을 잘 몰라서 말입니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방 안을 울리자, 분위기는 또다시 바뀌었다. 마주 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지는 눈빛에 김병진이 불만을 토로하려던 입을 탁, 다물었다.
“나는 주로 협박을 하는 쪽이라.”
그의 말에 맞춰 장철호가 김병진에게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못 배워 먹은 티가 꼭 이런 데서 나죠.”
냉정한 얼굴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걸고 당당하게 내미는 갈색 서류 봉투는 심장을 철컹 내려앉게 하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
주로 김병진이 누군가를 뜯어먹을 때마다 일삼던 행위였다.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 봉투를 던져주며 약을 올리는. 그것을 자신이 되레 당하게 되자 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필리핀에 와이프분이 계시던데, 자녀들이랑 함께.”
“김병진 기자님, 기레기가 아니라 기러기, 셨구나.”
A4용지에 빼곡히 적힌 숫자들과 내용을 읽어 내려갈수록 김병진의 낯빛이 누렇게 떴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보는 강현이 조소를 흘렸다.
“제가 검사 생활을 하는 몇 년 동안 숨 쉬듯 하던 일이 남의 비리나 뒤를 캐던 일이었는데, 고작 기자 나부랭이 하나 협박하려고 장난칠 리 없으니 사실 확인 여부는 생략하죠.”
“…….”
“그건 그렇고, 기사 팔아서 번 돈을 어디다 쓰셨나 했더니, 그렇게 써재끼니 돈이 남아나질 않았겠습니다. 타지의 가족들 챙기랴, 도박하랴. 얼마 전엔 아예 불법 스포츠 사이트에까지 손을 대셨던데.”
강현은 한 손으로 자신의 턱 끝을 쓸어내리며 김병진의 앞날을 일목요연하게 상기시켰다. 상습적인 도박을 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의 벌금에 처한다. 그러나 불법 스포츠 도박의 경우 국민체육진흥법에 그 조항이 따로 있고, 제26조 유사 행위 금지 조항에 따라, 제48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의 벌금에 처한다.
“아이고! 이런! 그러면 상습성이 인정되니 집행유예는 물 건너갔고, 그럼 최소 3년쯤 실형이 떨어질 건데……. 그럼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는 누가 책임지려나.”
쿵짝을 맞춰 장철호가 휘몰아치자 김병진의 눈동자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협상이란 서로가 각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의논을 통해 합의점을 도출하는 거라면, 협박은 완전히 다른 상황을 말한다. 협박은 당하는 사람에겐 지극히 위협적이고, 강제적이며, 굴욕감을 느끼게 했다. 곧이어 류강현이 긴 다리를 테이블 아래로 꼬며 느긋한 어조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저랑 거래할 마음이 생기셨습니까?”
포획당한 사냥감을 바라보던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고,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삐삐삐- 주변에서 들리는 기계음과 분주한 발걸음이 가득한 곳. 팔뚝을 찔러대는 바늘과 소독약 냄새.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침대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전신이 진동했다. 의식이 가물가물하는 동안 촤르륵, 커튼이 쳐졌다 다시 열리기를 반복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응급실에서 나는 모든 소리들은 바로 귀 옆에서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귓속 가장 예민한 부근을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통증과 함께 천장에서 아래를 비추는 백열등의 불빛마저 눈알이 다 타버릴 듯 작열감을 더했다. 어린 세나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생생한 고통에 신음하는 내내 눈물을 줄줄 흘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열이 올라 숨을 컥컥 쉬는 동안, 눈앞이 자꾸만 흐려져 더 무서웠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머리맡에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누군가와 나눴고, 한숨으로 답하는 간호사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몸에서 힘이 점점 빠져갔다. 통증은 점차 멀어졌지만 훅, 바닥이 꺼졌다. 허공에 붕 뜬 몸은 깊이를 모를 시커먼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포와 두려움에 허우적대는 동안 제 손을 잡아주는 이 하나 없었다. 그렇게 머릿속을 침투한 바이러스와 힘겨운 사투 끝에 어린 세나는 이틀이나 지나서야 의식을 차렸다. 죽을 만큼 아팠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죽지 않는다’와 ‘혼자 아프면 무섭고 서럽다’는 사실을 사춘기도 겪기 전에 먼저 알아버렸다. 그 당시 대법원 판사였던 기장수는 세나가 응급실에 실려 간 지 꼬박 반나절이 지나서야 병원으로 달려올 수 있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돼 분노한 기장수와 딸을 사지로 내몰아 놓고도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던 이연화는 이날 이후 서로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어른들의 자존심 싸움에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병실에 홀로 남은 것은 고작 중학교 1학년짜리 여자아이였다. *** 땀으로 흠뻑 젖은 파자마와 욱신거리는 명치 통증에 끙끙 앓다가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무심결에 옆자리로 고개를 틀었다. 감기 몸살을 앓았던 날, 밤새 제 옆을 지켜주었던 한 남자가 그리워서. 그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무의식이란 게 그랬다. 한 번 맛본 달콤함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세나는 사람의 온기가 닿은 흔적이 없는 자리에서 겨우 시선을 떼어냈다. 컨디션이 저조한 아침, 안 꾸던 어릴 적 꿈을 꾸었다. 왠지 일진이 사나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세나는 안개가 낀 듯 무거운 머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나 다를까, 하고 많은 자리 중 하필이면 세나의 차 앞에 이중주차를 해 둔 차량의 주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낭비한 시간이 이십 분. 오피스텔 앞에서 잡아탄 택시는 서초동으로 이동하는 도중 갑작스러운 고장으로 운행을 멈췄다. 어쩔 수 없이 내린 곳은 택시를 다시 잡아타기도, 지하철을 타기도 모호한 거리라 세나는 하이힐을 신은 발로 부지런히 걸어서 출근해야 했다. 이런 날 병가를 냈으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하필이면의 연속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날 오전 상담이 있었다. 이미 출근 시간이 늦은 상황에서 약국까지 들르는 건 무리였다. 세나는 위를 콱콱 조여오는 격통에 신음을 삼키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두 팔로 명치 부근을 감싸고 엘리베이터 벽에 몸을 기댔다.
“출근은 했겠지?”
하루가 지났음에도 강현에겐 답신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같은 회사, 같은 층에서 일한다는 사실이었다.
“오늘 중으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일단은 사과의 말부터 전해야겠다. 그때 당시에 왜 그런 계약서를 썼는지도 털어놔야 하고, 아버지와의 계약을 없던 일로 하겠다는 말과 채성민과의 일. 그리고 또…….
“하아…….”
막상 그에게 털어놓으려 하자 다시금 머릿속이 복잡해져 와 한숨이 터졌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어려서부터 남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려 애를 썼고, 그만큼 노력했다. 자연스럽게 불편한 상황들을 눈치껏 피했고, 누군가에게 큰 실수나 잘못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해본 적도 당연히 없었다.
‘어쨌든 선배의 반응을 보다 보면 뭔가 달라질까…….’
세나가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 엘리베이터 계기판의 숫자는 착실하게 올라갔다. ‘띵-’ 경쾌한 알림음이 울리고, 15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벽에 몸을 기대고 섰던 세나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넋을 뺀 상태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다, 문 앞을 막고 선 인영을 발견하고 바닥에 두었던 시선을 끌어올렸다.
“……선배.”
조금 전까지는 일이 어떻게 되든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맞닥뜨릴 계획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