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역지사지(易地思之)2022.03.12.
“누가 받는 게 좋을까?”
핸드폰 아래 바르르 떨리는 금빛 위스키처럼 세나의 눈동자도 가늘게 진동했다. 애써 태연한 척해보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뭐라고 한 거예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의 미세한 떨림을 숨기고자 아래로 떨어트려 반대 손으로 잡았다. 움켜쥔 손바닥 사이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비난은 이 새끼의 권리라며? 왜, 비난을 받더라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허망한 시선과 힐난 어린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그것참, 되게 편리하고 이기적인 발상이네.”
한번 끊어졌던 진동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아늑한 홀을 채우는 고풍스러운 음악도, 주변의 소곤거림도 희미해져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직 류강현의 이름을 띄우고 있는 핸드폰의 진동만이 쿵쿵, 귓속으로 꽂혔다. 기장수 대표와의 계약이 파기되면 강현에게 제대로 진실을 고할 생각이었다. 용서할지 말지는 그의 몫이었지만, 제 진심만큼은 알아주길 바랐기에. 만약 계약 파기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일단은 채성민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나서 말할 계획이었다.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맞닥뜨릴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채성민이 류강현에게 뭐라고 메시지를 보낸 걸까. 뭐라고 보냈기에 저 핸드폰이 쉬지도 않고 울리는 걸까. 세나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어그러졌다. 그러나 저 전화만큼은 받아야 한다는 본능이 굳어 있는 몸을 깨웠다. 그때였다. 세나의 움직임을 눈치챈 채성민이 비스듬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핸드폰을 도로 가져갔다.
“과연 류강현은 어떤 선택을 할까? 네가 강현을 믿었던 만큼 널 믿어줄까?”
그의 시선이 허공에 붕 뜬 손에 한 번, 하얗게 질린 낯에 한 번씩 닿았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밝은 목소리로 류강현의 전화를 받았다.
“내 문자에 열이 받긴 했나 봐. 나 같은 새끼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양반이 이렇게 친히 전화를 다 주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엔 조롱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세나를 뚫어질 듯 응시하는 눈은 여전히 싸늘히 식어있었다.
“그래서. 내가 보낸 선물은 마음에 들어?”
핸드폰 너머의 상대가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스피커 모드가 아닌 이상 들릴 리가 없었다. 세나의 얼굴에 초조한 심정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불안정한 눈동자가 채성민의 귓가에 닿은 핸드폰과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모를 입을 번갈아 담아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채성민이 나른하게 벌린 입술로 ‘화가 많이 났나 봐.’하고 소리 없는 말을 전달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킥, 조소까지 흘리며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지금 네 표정을 직접 보면 더 재밌을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내 앞에는 다른 사람이 앉아 있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들으며 홀짝, 홀짝, 한 모금씩 음미하던 채성민이 핸드폰을 귓가에서 떼더니 기세나에게 건넸다.
“…….”
“받아 봐.”
그런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그녀에게 채성민은 핸드폰을 든 손을 흔들며 재차 권했다. 세나는 떨리는 손끝을 가누지도 못하고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핸드폰이 벽돌을 드는 것처럼 버겁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선배.”
세나는 목소리도 표정도 갈무리 짓지 못한 채 전화를 받았다.
-“…….”
저를 타박하는 분노가 귓전을 때릴 줄 알았는데, 정작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나가 신경을 곤두세워 수화기 너머의 소리에 집중했다. 그제야 전화가 끊어진 게 아니라는 것과, 차갑게 숨을 고르는 강현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선배. 제가 다 말할게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기세나.”
낮게 뚝 떨어진 그의 음성이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쿠르릉 울리는 천둥 같았다. 핸드폰을 쥔 세나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지금 제가, 제가 선배가 있는 곳으로 갈게요. 얼굴 보고 직접 설명할 테니까. 화를 내도 좋고 다 좋으니까 일단 제 말부터 좀 들어주세요.”
변명이라 생각해도 좋고, 핑계라고 생각해도 좋다. 어떤 말을 꺼내서라도 그가 지금 느끼는 배신감을 조금이나마 덜어 줄 수 있다면. 하지만 그는 세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끝으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화가 났을까. 당연히 화가 났겠지.
“선배. 제발요…….”
-“우리 내기에 대한 답을 아직 못 들은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요. 처음부터 다 말할 테니까, 어딘지 알려줘요. 사무실이에요?”
-“그럴 필요가 있을까?”
허탈감에 젖은 탄식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새었다. 핸드폰 너머 형체도 없는 목소리에 매달려 애원하던 세나가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러나 기대했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강현 선배…….”
-“우리 내기, 네가 이긴 거로 하자.”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가 낯설었다. 그러나 어떤 음성보다 더 뇌리에 박혀 메아리쳤다. 전화는 이미 끊어졌는데, 온몸에 힘이 빠져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류강현이 K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로 온 이래로, 가장 먼저 불이 켜지고 제일 마지막에 꺼지던 그의 집무실은 오늘따라 컴컴하기만 했다. 가파른 경사를 저 혼자 내달리다 지칠 때 앞을 보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그의 어깨가 보였고, 뒤를 돌아보면 자신을 받쳐주는 넓은 가슴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모든 게 어디에도 없었다. 밤늦은 시간, 세나는 망연자실한 기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불이 꺼진 강현의 집무실 문에 이마를 쿵, 찧었다. 강현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먼저 전화를 걸어 받지 않은 적도 없었고, 답이 오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 그가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차라리 집이라도 안다면 그 근처에서 기다릴 텐데.
[늦어도 좋으니까, 기다릴게요.]
메시지를 보냈지만, 읽음 표시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은 정말 류강현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는다. 먼저 다가와 준 사람도, 저를 챙긴 사람도, 말하지 않아도 알아준 사람도. 죄다 류강현이었다. 그는 이런 자신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그 모든 것을 군말 없이 해줬을까. 그의 진심을 조금만 빨리 알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갑자기 정말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네……. 뭐든 다 잘하는 선배가 나 한 번만 용서, 아니 이해해주면 안 돼요?”
긴 한숨과 함께 강현에게 하고 싶은 말을 방문에 대고 중얼거렸다. 눈 가리고 아웅하다시피 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잡아먹혀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질 것 같았다.
“내가 벌인 일이니 내가 수습하고 싶었는데. 그게 또 선배한테 상처를 줄 거라고 생각 못 했네. 멍청하게…….”
자조와 후회가 뒤엉킨 혼잣말만 덩그러니 남았다. 내일은 이 문이 활짝, 까지는 아니어도 빼꼼히 열리길 바라는 게 욕심일까. 강현의 얼굴을 보면 답을 알 수 있을까? 그의 표정을 본다 한들 그의 생각은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일단 사과부터 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런데 들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뭘 어떻게 매달려야 하지……?’
무릎을 꿇고 그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사과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변명을 들어달라 매달리는 것도 듣기 싫은 사람에겐 일종의 폭력 아닌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자신의 감정을 밀어붙이며 들러붙는 것 또한 엄밀히 따지자면 스토킹 행위의 일종이었다. 변호사 모임에서 그렇게 떠들어 댔던 게 엊그제인데. 경범죄에 해당하던 스토킹 범죄의 처벌은 2021년 4월 20일에 제정, 최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 5천만 원의 중범죄로 강화되었다. 그리고 10월 21일 시행을 앞두고 있었다. 스토킹 범죄로 시작하여 벌어진 다수의 강력범죄로 인해 비로소 그 심각성을 인정, 처벌강화 조치로 예방 주사쯤은 맞게 된 셈이었다.
‘이 와중에 개정된 법률안은 외우고 있구나……. 이 나사 빠진 것이…….’
불안정한 심리는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불러왔고, 세나는 오락가락하는 생각의 씨앗들을 손으로 휘휘 저어 떨쳐냈다. 강현의 답신을 삼십 분이 넘도록 기다렸지만,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쿵, 다시 한번 그의 방문에 노크 대신 이마를 떨구었다. 지이이잉-. 적막한 복도에 진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선배?!”
-“일은 끝났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신자 확인도 없이 전화를 받았는데, 뜻밖의 목소리였다. 세나가 핸드폰을 귀에서 멀찌감치 떼어 수신자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러나 아는 목소리다. 두 번 다시 연락도, 찾아오지도 말라 경고했던 여자. 이연화였다. 류강현이 아니란 사실에 실망한 것도 있었지만, 징글징글한 그녀의 행동에 꾹꾹 눌러놨던 화가 폭발해버렸다. 정말 신물이 날 정도로 이기적인 여자였다.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왜 모를 거로 생각해, 내 딸인데.”
“이연화 씨. 제 말을 이해 못 하셨나 본데, 저 엄마 없다니까. 이미 죽은 사람이 왜 자꾸 찾아요?”
-“말을 참 못되게 하네. 누가 그 인간 딸 아니랄까 봐. 일 끝났으면 만나서 이야기해. 꼭 할 말이 있어.”
“이보세요! 그쪽은 할 말이 있을지 모르지만, 난 할 말이 없다고요. 우리가 부모와 자식 간으로 오붓하게 대화를 나눌 거였으면 십여 년 전에 했어야지! 당신은 그 기회를 아주 오래전에 날려 먹었다고!”
더는 들어줄 말이 없기에 단칼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곧장 이연화의 번호를 수신 차단해버렸다.
“……도대체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채성민도. 이연화도. 삶에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던 사람들이라 여겼는데. 어째서 이렇게 타이밍 좋게 자신을 찾아와 뻔뻔한 모습을 과시하는 것인지. 기운이 쭉 빠진 세나가 굳게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아……!”
명치 안쪽이 콱 하고 쪼여 들었다. 누군가 위장을 손으로 쥐어짜는 고통이었다. 세나가 한 손으로 아랫배를 움켜쥐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비단 이연화뿐만이 아니었다. 대화할 기회를 날려 먹은 건 저도 매한가지였기에. 이기적인 그 여자의 유전자가 기세나의 몸속 어딘가에도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역지사지를 겪어봐야 안다고 하나 보네…….”
쓰디쓴 웃음을 겨우 삼키며 자조가 가득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이 몇 번이고 울렸다. 부재중 전화에 이어 문자까지. 수신자를 확인한 강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이 보이지 않게 뒤집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장철호가 물음표 대신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기 변호사님인 것 같은데 왜 안 받으십니까?”
“혼날 짓을 했으면 혼나야 하니까요.”
메마른 목소리가 담백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자 장철호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데이트할 때 뭘 하는 게 좋냐 물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갑자기 분위기가 잘 타오르던 모닥불에 모래를 끼얹은 듯했다.
“기 변호사님이 뭐 잘못한 일이라도.”
“문제로 삼으면 문제가 될 수 있고, 문제로 삼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죠.”
“그게 무슨…….”
묻는 말에 답을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장철호가 눈두덩에 짙은 쌍꺼풀을 만들고 쳐다보자 강현이 픽, 웃으며, ‘이 부분 말입니다.’ 하고 종이 한 장을 손끝으로 찍어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아무래도 걸리는데 말입니다.”
어물쩍 일 얘기로 넘어가는 행동인즉슨 무슨 일이 있긴 한데, ‘노코멘트’를 하겠다는 우회적 표현이었다. 장철호는 군말 없이 고개를 떨궈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확인했다. 대호 그룹이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이 담긴 자료였다. 그중의 80%에 대호 그룹의 망나니 황유라가 저지른 파렴치한 짓거리들이 낱낱이 까발려져 있었다. 강현이 혀를 쯧, 짧게 덧굴리며 말을 이었다.
“구속이 안 된 게 용하네요. 이래서 사람들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 하나 봅니다.”
“사후 수습이 워낙 기상천외해서 저도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채성민 팀장 솜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더군요.”
“하. 이렇게 능력자인 줄 알았으면 진작 쳐내버렸을 텐데. 괜히 살살 봐줬네.”
나지막이 내뱉은 말엔 감탄도 담겨 있었다. 그간의 일들을 처리한 실력에 대단하다 못해 개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왜 그 좋은 머리를 고작 이딴 데 쓰고 있는지. 그러나 어디까지나 아주 짧은 한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강현에게 채성민은 그런 존재였다. 눈앞에 보이면 거슬렸지만, 뒤돌아서면 까마득히 잊히는. 물론 기세나를 욕심만 내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그랬을 것이다.
“소재지는 파악됐습니까?”
주어도 없이 던진 물음이었지만, 장철호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소재지 파악은 물론,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서당 개 십오 년이면 풍월이 아니라, 훈장 대리쯤은 해 먹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정보원에게서 온 문자를 강현에게 보여주며 씩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양쪽 볼에 깊은 보조개가 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