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엉켜버린 실타래2022.03.08.
계약을 파기하려면 상호 간의 동의가 필요하다. 세나 또한 기장수 대표가 호락호락하게 계약을 파기해 줄 거로 생각지 않았다. 결심을 굳힌 세나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기장수의 얼굴을 직시했다.
“네. 알아요. 저도 변호사니까.”
이 계약이 없던 일이 된다고 해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류강현을 좋아하는 제 마음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검은 때를 떨칠 수는 있었다.
“가사전담팀 팀장 자리에서 물러날게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받았던 지분 다시 돌려 드릴게요. 거기서 발생하는 직계비속 증여세도 제가 부담할게요. 물론 지난번 양도했을 때 냈던 증여세도 포함해서요.”
진작에 이렇게 해야 했다. 자리 욕심에 눈이 멀어 수많은 변수를 예상치 못하고 덥석 미끼를 물어버린 제 아둔함을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가사전담팀 설립에 대해서 손해배상 청구하시면 그것까지 받아들일게요. 그런데 지금 가사전담팀이 맡은 사건들을 보고받으셔서 알겠지만, 해체하면 오히려 K 로펌의 손해예요. 그러니까 팀장이 아니라 팀원으로서 그 사건 계속 맡게 해주세요.”
한번 말을 내뱉고 나자 막힘없이 술술술 터져 나왔다.
“팀장 자리에 다른 사람 앉혀야 한다면, 한여진 변호사보다는 송 변호사님을 새로 모시는 게 나아요.”
세나는 계약 파기에 따른 위약금의 일조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모든 것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원래 제가 사용하던 방은 장 실장님이 사용하고 계시니까, 한동안 자리가 날 때까지만 사용할게요. 예전 방보다 좁은 곳이어도 상관없어요.”
다소 성급해 보이기까지 하는 세나의 모습에 기장수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계약을 없던 거로 하겠다? 보아하니 류강현 변호사도 널 맘에 들어 하는 것 같던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가만히 있으면 누워서 떡 먹을 팔자인데.”
“얼마 전까지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게 무례한 짓이란 걸 깨닫기 전까지.”
류강현의 마음을 얻은 후 계약서를 보며 얻게 된 이득만 따졌었다. 그렇게 행복한 사고 회로를 돌리는 동안 그가 받을 상처는 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서로가 좋으면 다 좋은 거 아니냐, 지극히 이기적인 잣대로 그를 기만했다. 정말 다 좋았을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았다. 그가 만약 K 로펌의 대표가 되기 위해 저를 이용했다면 말이다. 아마도 분개하며 그를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 악다구니를 쓸지도 모른다. 의도가 어찌 됐건 감히, 감히 저를 가지고 놀았냐고 삿대질과 욕지기를 쏟아붓겠지. 당해보니까 알겠다. 누군가에게 목적성을 가지고 이용당하는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더럽고, 불쾌하고, 자기 혐오적인 기분이었다.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남자기에 그런 류강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선뜻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돌릴 수 있는 건 되돌리고 싶었다.
“계약하기 전보다 손해가 클 텐데도 말이냐?”
“그 손해를 다 감수하더라도 지켜야 하는 게 있거든요.”
“그게 뭔데?”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진심과 제 자존심이요.”
자존심이란 무릇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었다. 변호사는 국가가 인정하는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교육을 받은 전문직업인으로서, 법률에 대한 전문적 지식뿐만 아니라 높은 수준의 도덕적·윤리적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변호사법엔 이런 조항이 있다. [변호사 윤리 장전 제5조. 품위유지의무. 변호사는 품위를 유지하고, 명예를 손상하는 행위를 하지 아니한다.]
“아빠. 제가 그 사람 많이 좋아하나 봐요.”
하물며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에도 응당 품위가 있어야지.
“그러니까 계약 없던 거로 해 줘요. 그 사람한테 더는 쪽팔리기 싫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쪽팔리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자 득실득실 마음을 좀먹던 불온한 상념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빠른 시일 내로 답변 주세요.”
생각해보겠다는 기장수 대표를 뒤로하고 대표실을 나왔다. 손해배상? 까짓것. 하면 그만이다.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다. 실수를 만회하는 방법으로 금전적인 수단이라면 얼마든지. 팀장 자리? 제가 그에 걸맞은 능력이 있다면 다시 올라가면 된다. 가사전담팀은 각자 맡은 업무가 있고, 그 업무의 적임자들을 제 손으로 뽑았다. 손발을 맞추기 짧은 시간이었지만, 성과가 좋았다. 그만큼 다들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장에 자신이 팀장 자리에서 물러나더라도, 일이 어그러질 리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세나는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핸드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오늘 좀 만나죠.”
-“생각보다 결심이 빠른데?”
“고민할 가치도 없으니까요.”
-“밥을 먹다간 체하겠지?”
“포크와 나이프가 없는 곳에서 만나죠. 혹시 모르잖아요. 까딱하다 상해치사로 경찰서에 가면 곤란하니까.”
-“와, 이게 우리 세나의 민낯이구나. 화끈해서 더 마음에 드는데?”
“약속 장소는 선배가 정해요.”
그렇게 말을 하고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채성민의 유들유들한 웃음소리를 더 듣고 있다간, 원초적인 욕지거리가 터질 것 같아서였다. 세나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몸의 무게만큼 뒤로 기울어진 의자를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짙은 코발트색 페인트가 발린 벽을 응시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채성민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갑자기 변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 따지고 보면 늘 사람들의 중심에 있던 그의 실체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준비된 듯한 부드러운 미소, 상냥하고, 누구에게나 다정한 남자. 오랜만에 만났을 당시에도 거리낌 없이 먼저 다가왔다. 온화한 성격에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 기세나에게 채성민은 불과 얼마 전까지 그런 이미지였다. 이제 와 그 모든 모습이 가식이라고 느끼기엔 너무 늦어버렸지만. 견고하게 쌓아 올린 가면 뒤에 숨어 누군가를 이용하며 살아온 남자와, 남들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허영심을 가진 여자. 근본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잘 어울린다는 말이 이토록 거슬릴 줄이야.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서까지 제 모습을 완벽하게 가꾸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잘 어울리긴 개뿔. 이제부터 만나지 말아야 할 남자 오무(五無)에 사기도 추가야.”
손목을 돌려 시간을 확인한 세나가 의자를 바로 하고 오후 상담자를 맞이했다.
*** 세나와 채성민이 만난 장소는 삼성동의 어느 골목 한적한 바였다. 낮은 조도의 개별 공간, 짙은 호박색 액체가 둥근 얼음이 담긴 잔에서 찰랑댔다. 두 사람은 인사도 없이 마주 앉아 각자의 잔 속에 담긴 얼음을 녹였다. 느긋하게 잔을 돌리던 채성민이 딸깍, 테이블 위로 온더록스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결심은 섰고?”
“처음엔 당황했고 그 담엔 화가 났고. 지금은 실망했어요.”
“나에 대한 감상?”
“아뇨. 저에 대한 감상.”
물과 희석된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넘긴 세나가 그와 마찬가지로 일부러 소리를 내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딸깍 내려놓았다. 의연하고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면 도와줄게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도와줘?”
채성민이 세나의 말꼬리를 잡더니 허공을 향해 헛웃음을 쳤다. 더불어 그녀의 말이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까지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웅얼거리더니 이번엔 그가 잔을 들어 원샷을 했다.
“도와준다라…….”
채성민이 스탠드 조명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세나를 주시했다. 그녀의 말 속에 담긴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그러다 입을 꾹 다물고 버티는 세나를 보며 또다시 비성 가득한 코웃음을 쳤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원하는 줄 알고?”
테이블 가운데 놓인 위스키 병이 채성민의 손에 들렸다. 곧이어 두 개의 빈 잔에 보기 좋게 다듬어진 얼음 위로 콸콸, 호박색 액체가 가득 담겼다.
“뭐를 도와준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세나는 결심을 굳힌 듯 단호했다.
“열등감. 그거 끌어안고 있어봤자, 사는 데 도움 안 돼요. 제가 해봐서 알아요. 정신만 피폐해진다는 거.”
잔을 들어 올리는 채성민의 눈썹 끝이 움찔, 눈매가 와락 구겨졌다.
“온실 속의 화초라 생각했지, 머리가 꽃밭이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어처구니가 없네.”
날이 선 비아냥거림에도 기세나는 자신이 뱉은 말에 책임을 지겠다는 듯 줄곧 올곧은 시선으로 채성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 갑자기 술맛이 확 떨어졌다.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몰라요. 지금도. 내가 알던 선배가 아니니까.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은 더욱 하지 않을 사람 같아서.”
채성민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름을 느꼈다. 제까짓 게 뭘 안다고 저답지 않다고 운운하는 것인지.
“그저 선배가 왜 이러는지가 궁금해요. 그 나이에 대호 그룹 법무팀장이면, 대단한 거잖아요. K 로펌이 아니라도 어디로든 이직할 수 있을 텐데.”
“알면? 뭐가 달라져?”
“이유를 알면 적어도 선배를 증오하진 않을 거니까. 그리고 선배가 원하는 게 뭔지 확실히 알아야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가진 자의 여유일까. 아니면 생전 겪어보지 못한 악의에 대처하는 무지한 자의 태도일까. 가진 게 쥐뿔도 없어서 몸도 팔고, 자존심도 팔고, 양심도 팔고. 그렇게 제 인생을 저당 잡고 얻은 자리가 바로 대호 그룹 법무팀장 자리였다. 그런데 비루한 인생의 모가지를 틀어쥔 전당포 주인은 도무지 그 가격을 제대로 쳐주지 않는다. 거기다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 넌덜머리가 나는 삶이 사람을 이토록 비열하게 만든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아마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 이런 하류 인생 따위는 모르고 살았을 테지.
“착한 척하는 거야? 멍청한 척하는 거야? 그것도 아니라면 뭐 방심하게 만들어서 뒤통수를 치려는 수작인가? 류강현한테 그랬던 것처럼?”
“제가 그 일로 선배한테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죠. 그건 강현 선배의 권리니까.”
이틀 전까지만 해도 제 한마디에 바르르 떨리던 눈동자는 더는 없었다.
“이 일에 강현 선배는 끌어들이지 말아요. 이 말 하자고 오늘 보자고 한 거니까.”
그 무엇이 되었건 채성민은 지금 당장 제 앞에 앉은 여자의 표정이 뒤틀리길 바랐다. 저와 똑같이 남을 이용해서 욕심을 채우는 주제에 혼자만 깨끗한 척하는 고고한 낯짝은 채성민의 어딘가를 긁어댔다.
“그래서 그 계약서 그 새끼한테 보여줬고?”
“계약은 파기할 거예요. 이미 아버지와도 얘기 다 끝났어요.”
“그렇게까지 류강현이 좋아?”
“네. 좋아요.”
“그런다고 네가 류강현을 이용했던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텐데 말이야.”
허를 찌르는 그의 말에, 잔잔한 웅덩이에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적개심에 투지를 불태우던 채성민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섰다. 채성민은 세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천천히 몸을 물려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었다. 그리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우리 세나가 내 제안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무리수를 두는 걸 보니.”
태연자약한 그의 태도에 세나는 영문도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이 곧 채성민의 손길로 향했다.
“분명 알아듣게 말했던 것 같은데, 내가 뭐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지금, 뭘 하려는 거예요?”
“이쯤 하면 내가 어떤 놈인지 알 때도 됐는데……. 넌 여전히 꽃밭이구나. 현실은 냄새나는 시궁창인데 말이야.”
핸드폰을 조작하는 그의 행동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곧이어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드는지 입꼬리가 긴 호선을 그리며 삐뚤어졌다.
“큰 건 하나 해결했다더니 한가한가 봐. 바로 읽을 줄은 몰랐는데.”
채성민은 자신의 손안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세나의 술잔 위에 올려두었다. 웅웅대는 진동이 그 아래에 깔린 액체와 얼음을 만나 더욱 넓게 공명했다. 그가 핸드폰이 올려진 잔을 세나 앞으로 슬쩍 밀었다. 핸드폰 액정에 떠오른 이름은 바로 ‘류강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