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최악(最惡)과 차악(遮惡)2022.03.05.
욱신욱신한 통증이 이제는 온몸으로 번지는 것 같았다. 세나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살짝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본 한여진도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세나는 저를 향한 시선을 뒤로한 채, 잰걸음으로 회의실을 빠져나와 화장실로 직행했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 두 손을 가져댔다. 차가운 물줄기가 투명한 포말을 일으키며 오목하게 만든 손바닥에 가득 고이다 넘쳐흘렀다. 수챗구멍으로 빠져나가는 물길을 멍하니 보던 세나가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얼음장 같은 물의 온도에 양 뺨이 얼얼했다. 그렇게 몇 번인가 연거푸 얼굴을 적신 후 다시 고개를 들었다.
“후아…….”
정신을 차리려 찬물로 세수를 하고, 가슴을 크게 부풀려 심호흡도 뱉었다. 턱 아래로 뚝뚝 흐르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훔친 뒤 페이퍼 타월로 남은 물기를 마저 닦아냈다. 그리고 허리를 펴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에 비친 낯빛이 파리한 여자는 실망스러운 눈을 하고 세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틀 사이에 많이도 수척해져 있었다. 세나는 재킷 주머니를 뒤져 여분으로 들고 다니던 립스틱을 꺼냈다. 밤새 까슬해진 입술의 각질을 손으로 뜯어내고 그 위에 덧발랐다. 색을 입혀가던 립스틱이 어젯밤 찢어진 자리에 걸려 뭉개졌다.
“하아…….”
다른 의미의 한숨이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세나가 양팔을 벌려 세면대를 짚었다. 그렇게라도 몸을 지탱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여기서 또 고민하면 너 진짜 못나져.”
법정에서도 질 게 뻔한 싸움이 있다. 죄를 지은 게 확실한 의뢰인을 변론해야 할 때였다. 그럴 때 일을 잘하는 변호사라면 최악(最惡)보다는 차악(次惡)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현재 채성민의 행위를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기밀문서 유출이라든가, 개인정보 보호법에도 걸리지 않는다. 그저 책상 서랍 속 계약서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사진을 찍었고, 그걸로 인해 재산상의 피해를 봤다거나 외부로 유출이 된 것도 아니었으니. 협박. 협박죄로 이 사태를 대처하기에 채성민 역시 변호사였다.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녹취해야 한다는 생각도 못 했지만, 있더라도 쓸모가 없을 거였다. 그의 교묘한 제안은 협박으로 보기에도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불시에 당한 습격에 당황한 건 사실이었지만, 혼자 고민을 거듭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객관적인 눈으로 상황을 들여다보게 됐다. 결론적으로, 세나는 채성민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류강현에게 계약서를 까발리겠다는 말에 겁을 먹은 게 아니었다.
‘그 뻣뻣한 얼굴이 어떤 모양으로 이지러질지…….’
그 말을 던지는 채성민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단순히 계약서의 존재를 밝히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채를 띤 교활한 눈은 남의 상처에 더욱 반짝이는 빛을 발했다. 섬뜩했다. 그의 시선은 난도질할 만큼 잘 벼린 칼날 같았고, 언제라도 피를 볼 수 있게 준비돼 있었다. 상처받는 류강현을 보고 싶다며 읊조리던 남자는 세 사람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더라도 아랑곳없어 보였다. 이간질이라니. 다분히 저열하고 유치한 짓거리였다. 그러나 사람 관계를 엉망으로 만드는 방법 중 이간질만큼 악랄하고, 효과가 좋은 것은 없었다. 조그만 구멍이 단단한 둑을 무너뜨리듯 이간질의 무서운 점은 바로 그것에 있었다. 특히 믿음을 주고받은 관계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류강현은 천애 고아에 누군가를 믿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믿으려고 하지 않은 것인지, 믿지 못한 것인지는 모른다. 실제로 그 말은 너무 많은 것들을 상상하게 했다. 류강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지도 못하는 제가 그의 아픈 유년 시절을 지레짐작하게 했고, 동정심을 자극했다. 하물며 그런 아픔이 있는 사람을 이용하려 했다는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당신은 이런 것까지 다 계산하고 말을 전한 거겠지……. 아, 진짜 소름 끼친다…….”
후회는 늘 눈앞에 일이 닥쳤을 때야 제 존재를 과시한다.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한때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 좋다고 눈물 콧물 짜며 고백했던 때로 돌아가, 당장에라도 제 목을 비틀고 졸라버리고 싶었다. 잘못을 했으면 용서를 구하고, 미움을 받든 원망을 받든. 그걸 감내하는 동안 마음이 아프겠지만, 제 스스로 선택해서 벌인 일이니 남 탓을 할 수는 없다. 단지, 강현에게 이런 식으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래도 다른 이의 입을 통하는 것보다 당사자에게 듣는 것이 덜 상처받지 않을까…….”
가슴 언저리가 돌덩이에 짓눌리듯 무직하게 가라앉는다.
‘실망하겠지……. 정이 뚝 떨어질 거야.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느냐고.’
몇 번이고 저를 다독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강현의 반응이 두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심란한 마음에 세나는 또다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쏟아냈다. 그러나 바보 같은 짓을 한 자신을 책망하는 건 이 일을 수습하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 세나는 다시 한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파리한 낯빛 대신 찬 기운에 살짝 붉어진 낯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릴 적부터 풀 죽은 자신을 거울에 비추며 늘 하던 말이 있었다. 당당하게. 기죽지 말고. 오늘도 어김없이 마음을 다독여봤지만 씁쓸한 기색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머뭇대다간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될지도 모른다.
*** 넋을 놓고 시간만 죽였던 가사전담팀 미팅을 빠르게 정리한 세나는 곧장 대표실을 찾았다. 류강현에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기 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김정한 비서는 어딘가 비장해 보이는 세나의 얼굴을 확인하고 이맛살을 살짝 들추었지만,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 막 오찬을 끝내고 돌아온 기장수 대표실의 문을 두드렸다. 세나가 접객용 소파에 자리를 잡자, 기장수는 옷걸이에 재킷을 걸어두고 대각선 상석에 앉았다. 차를 내올까 묻는 김정한에게 세나가 고개를 저었다. 김정한이 방문을 닫고 물러나자 대표실엔 미묘한 적막이 흘러들었다. 같은 층에 머무르지만,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먼저 대표실을 찾지 않은 제 딸이었다. 까슬한 낯을 보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
“…….”
두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지 수 분이 지나는 동안 한 마디도 오고 가지 않았다. 이럴 거면 차라도 내오라고 할 것이지. 애꿎은 시간만 축내는 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기장수가 소파 깊숙이 몸을 묻고 배 위로 깍지를 끼운 손을 올렸다. 그러는 동안 세나의 시선은 오동나무로 만든 탁자의 모서리 장식에 꽂혀 미동도 없었다. 아무래도 입이 열리기까지 한참은 더 남은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한소리를 하려다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어 도로 입을 다물었다. 남들 앞에서만 상냥하지, 본성은 고집스럽고 불같았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제 모습을 쏙 빼다 닮았다는 걸 알기에 굳이 저 성질머리에 기름을 붓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
뜻밖의 부름에 기장수가 몸을 슬그머니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라니. 기 대표님 아니면 아빠. 화가 아주 많이 났을 때는 옆집 아저씨를 부르듯 하던 기세나의 입에서 아버지라니. 보통 일이 아닌 듯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자신이 우려했던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장수의 정신은 온통 세나의 다음 말에 쏠려있었다.
“계약서 말인데요.”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화두에 기장수는 부릅뜬 눈을 갈무리하며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계약서? 무슨 계약서?”
“아버지랑 저랑 류강현 변호사를 두고 체결한 계약이요.”
“그게 왜? 이제야 제대로 해볼 마음이 든 거냐? 너도 자꾸 보니 괜찮다 싶지? 안 그래도 세훈이가 집에 와서 말하더라. 참 제대로 된 상대를 골랐다고.”
며칠 전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기장수는 모자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평소 말수가 적은 아들놈이 세나의 상대를 궁금해하는 윤모연에게 류강현의 첫인상을 설명해주었다. 제 누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모습에 엄지를 척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나이답지 않게 세상 신중하고 꼬장꼬장한 아들놈의 눈에도 들어찬 류강현이 더욱 마음에 든 순간이었다. 게다가 지난 주말 변호사 모임에서는 또 어떻고. 다른 로펌의 대표들이 류강현에게 눈독을 들이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난 제대로란 말이야.”
“네. 제대로세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계약 없던 거로 해요.”
“뭐? 둘이 잘 되고 있던 거 아니야?”
분명 기세훈이 흘린 정보에 따르면 둘 사이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 같았는데, 돌연 계약을 없던 일로 하겠다니.
“애초에 잘못된 판단으로 서명한 계약이었어요.”
“순간적인 판단 실수로 서명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긴 하지만, 명색이 변호사라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구나.”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기장수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세나를 살폈다.
“이제 와 잘못된 판단이라 운운해도 낙장불입. 거기에 서명한 건 다름 아닌 너였어.”
계약서상의 조항들을 누구보다 면밀히 검토하고 실리를 따지는 일을 밥 먹듯이 하는 양반들인데, 이제 와서 잘못된 판단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계약서엔 아무 문제가 없어.”
아버지와 딸이기 전에 변호사와 변호사로서, 추가된 조항과 삭제된 조항까지 모두 검토해서 도장을 찍은 계약서였다.
“문제없죠.”
너무 문제가 없다는 게 문제예요. 하며 세나가 말을 이었다.
“‘R’이 물건도 아니고 사람인데, 그 사람 마음도 중요하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어요. 류 변호사님은 우리가 저를 두고 이런 계약한 지 몰랐고, 그로 인해 대가가 발생한다는 것도 몰랐을 테니까. 계약서에 명시된 당사자가 모르는 이 계약은 부당 계약이에요.”
세나의 말을 듣던 기장수가 턱을 쓸어내리던 손으로 소파 팔걸이를 턱 짚었다. 짙은 눈썹 새가 좁아 들자 희끗희끗한 몇 가닥의 흰 눈썹이 함께 꿈틀거렸다.
“부당 계약으로 치부하기엔 이미 받아 간 게 너무 많지 않니? 실질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졌고.”
지금이야 아늑한 대표실을 차지하고 있는 뒷방 늙은이처럼 굴었지만, 노장은 죽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는 여전히 노련한 변호사였다. 거기다가 아무리 제 딸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어설픈 변론을 함구해줄 만큼 마음이 약하지도 않았다.
“네 말뜻에 따르면 계약의 객체가 되는 ‘R’의 마음이 걸린다는 건데…….”
“…….”
“이 계약으로 ‘R’에게 피해가 가는 것 없고, ‘갑’인 당사자인 나는 아직 받은 게 없고. ‘을’인 너만 이득을 본 상황에서 그까짓 말장난으로 계약 파기를 운운하다니 답지 않구나.”
가사전담팀 신설과 기장수가 가진 K 법무법인의 지분을 일부 양도받았다. 그리고 2층에 새로 생긴 자신의 집무실까지. 지금까지 이 계약에서 득을 본 건 기세나 저 하나였다.
“정 계약을 파기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