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품위유지의 의무2022.03.01.
“그 새끼가 가장 혐오하는 게 바로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저를 이용하는 거야. 다른 사람한텐 무슨 짓을 해도 관심도 없는 새끼인데.”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저를 두고 뒤에서 딴 수작을 부렸다는 것을 알면 강현이 어떻게 나올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 계약서를 그 자식에게 보여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뻣뻣하고 오만방자한 놈의 얼굴이 어떤 모양으로 이지러질지…….”
추악한 냄새가 코끝에 감길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뱉어지는 나긋나긋한 음성. 달콤한 밀어가 어울릴법한 그의 목소리는 비열한 말들을 담았다.
“류강현은 너에 대한 배신감으로 절망할까, 아니면 자조할까? 뭐가 됐든 상처를 받은 얼굴이 한번 보고 싶긴 한데……. 어떨지 감이 안 오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그냥 좀 궁금해서. 그래서 세나야. 넌 어때? 네가 믿는 류강현은 너의 진심을 믿어줄까? 그 계약서를 보고도?”
“…….”
“아무도 믿지 않는 그 새끼가 널 믿었다니 아이러니하지? 저를 두고 어떤 물밑작업이 이뤄지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렇게 뒤통수를 맞을 놈이 아닌데, 그 새끼도 별수 없는 건가 싶기도 해서.”
“……하.”
“그런 계약서를 쓴 너도 참, 양심도 없지. 그래놓고 류강현을 좋아해? 있는 것들이 더해. 이기적이고 너무 주관적이야.”
채성민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세나의 가슴에 못을 대고 망치로 찧듯 쿵쿵 박혔다. 틀어막혔던 숨이 탄식처럼 터졌다. 누군가를 믿지 않은 사람이라던 류강현이 유일하게 믿은 사람이 자신인데. 그런 남자를 K 로펌의 지분과 입지를 얻기 위해 성급하게 팔아넘겼다. 그에게 연애 감정을 가질지 꿈에도 몰랐다는 말은 핑계일 뿐이다. 류강현에 대한 제 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전에. 류강현이 제게 진심으로 고백했던 그 순간. 그에게 계약서의 존재를 알렸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사람을 두고 이런 계약서를 작성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사람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도의를 저버린 건 다른 누군가가 아닌 기세나 본인이었다. 왜 이 계약서가 류강현에게 상처가 되리란 걸 몰랐을까. 이기적인 마음에 눈이 멀어 한 치 앞도 보지 못했다.
“아, 불쌍한 류강현. 그 새끼 빡친 거 한 번도 못 봤지? 만약 이용당했다는 거 알고 제대로 빡치면 K 로펌이고 뭐고 클라이언트 죄다 끌고 다른 데로 갈지도 모르지. 돌아설 땐 가차 없는 놈이니까.”
현재 K 로펌에서 주가로 고공행진을 달리는 류강현이, 돌연 K 로펌을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를 붙잡을 방법도 명분도 없는 세나는 채성민에게 한 수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게 뭔데요?”
“아- 그러게. 내가 뭘 원할까?”
으쓱이는 어깨와 함께 채성민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채성민은 누구보다 스스로를 잘 안다고 믿었다. 그랬기에, 이 시궁창에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 상대의 고혈을 빨아먹는 기생충이 된 것이었다. 목이 졸리고, 숨이 막히고, 진창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정신적인 고통이 저를 얼마나 갉아먹었는지. 더 버티다간 뼈도 남지 않으리라.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에서 빠져나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말인데.”
채성민은 세나의 뒤로 자리를 옮겨 그녀의 양쪽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살짝 몸을 틀어 여전히 사람들과 대화 중인 강현을 보게 만들었다.
“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그 계약서를 저 자식에게 보여줄까, 말까?”
사람의 감정을 제멋대로 가지고 놀고 있는 남자의 행동에는 죄책감조차 없었다. 생글거리는 웃음은 그 어떤 협박범보다 잔인하고 야비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채성민의 뺨을 올려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쓰레기 새끼.”
그보다 더한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겼다.
“개자식.”
채성민은 세나의 욕지기에 휘파람을 짧게 불기까지 했다. 이 사람은 얼마나 더 바닥인 사람인 걸까. 이런 인간에게 협박을 당한다는 자괴감과 더불어 한때 그를 좋아한 적 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든 수치가 되어 세나를 덮쳤다.
“치졸하고 비열해. 당신이 이런 개자식인 줄 알았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텐데.”
“뻔한 얘기지. 이제 와서 억울해해봤자, 본인만 손해야. 내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거든.”
그제야 새로운 사실을 또 깨닫는다. 류강현이 제게 채성민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 그의 정체를 알게 되면 제가 이토록 수치심을 느끼게 될까 봐서. 정말 쓸데없는 구석에서 배려심이 넘치는 남자였다.
“…….”
세나는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줄도 모르고 채성민을 노려보았다. 뻣뻣하게 굳은 볼 안쪽 여린 살이 악다문 어금니에 씹혔다.
“그러니까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 손등을 덮는 커다란 손길에 세나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무슨 생각해?”
멍하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던 그녀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고, 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 강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몸이 안 좋은 거 아니야? 어제도 그렇고.”
“잠을 잘 못 자서.”
“왜? 무슨 고민 있어?”
어젯밤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서 새벽 동이 터올 때까지 엄지손톱을 씹었다.
“여긴 또 왜 그래?”
그가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세나의 아랫입술 언저리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다, 입술까지 씹어버리는 바람에 피까지 봤다. 세나는 강현의 손길을 물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가슴이 수런거리고 목구멍이 꽉 막혀 제대로 된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강현과 함께 있는 지금 자꾸만 어제의 일이 상기돼, 표정 관리가 쉬이 되지 않았다.
“선배.”
“응?”
다정한 음색에 저렇게 물음표를 달고 대꾸해 줄 때면 잔잔한 마음의 물결이 요동을 친다는 걸 알까? 그러나 지금 세나에게 강현의 다정함은 독이었다.
‘류강현에게 이 계약서를 보여주지 않는 대신 그 새끼와 관계를 깔끔히 정리하고, 기장수 대표에게 결혼 상대로 나를 소개할 것. 파트너 변호사 자리도 함께.’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누구와 결혼? 이딴 짓을 해놓고 그런 말이 나와요?! 그리고 파트너 변호사는 제가 함부로 앉히고 자시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구요!’
‘그게 싫으면 지금 당장 이 계약서를 류강현에게 보여주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든가.’
‘…….’
‘아. 어쩌면 믿었던 상대에게 당한 배신과 실망으로 처절하게 무너지는 걸 목격할지도 모르지.’
‘……나쁜 새끼.’
‘어느 쪽을 선택하든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
채성민의 키득거림이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눈앞에 강현만 없었다면 두 손으로 제 귀를 틀어막고 머리를 세차게 젓고 싶었다. 차라리 채성민이 아니라 류강현에게 들켰더라면 더 나았을까? 변명이라도 해볼 수 있지는 않았을까?
“그…… 있잖아요.”
지금이라도 말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필이면 그의 고백에 대답을 하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더 늦기 전에.
“실례하겠습니다.”
뭐라고 얘기를 해보려 입을 떼는 순간,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고 식당 종업원이 끼어들었다. 그녀가 분주한 손길로 이것저것 내려놓자, 어느새 테이블 위엔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세팅되었다.
“무슨 고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먹자. 먹고 생각해. 생각이란 것도 에너지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니까.”
강현은 껍질이 잘 발린 게찜을 부러 세나의 앞으로 다시 밀어주며 살짝 웃었다.
“그동안 고기는 많이 먹여줬고, 대게를 좋아한다고 해서 먹으러 갈까 했는데, 첫 데이트에는 좀 그렇잖아?”
“그런 것도 신경 쓸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나는 안 쓰지만, 남들 눈을 의식하는 기세나는 불편할지 모르니까. 나랑은 좀 편하게 밥을 먹었으면 좋겠거든.”
하얀 비닐이 깔린 테이블에 빈 게 껍데기를 양쪽 수북이 쌓아두고, 두 손에는 비릿한 냄새와 게 국물을 줄줄 흘리면서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상상이 절로 되었다. 아마도 그랬다면 기세나는 먹는 둥 마는 둥 했을 터였다.
“기세나.”
“네?”
“넌 그냥 그 자체로 예뻐. 굳이 나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하지 마. 울고, 떼쓰고, 투정 부리는 거까지도 내 눈엔 다 예쁘니까.”
“아…….”
“왜 이제야 내 진심이 보여?”
“죄송해요.”
“뭐가?”
“그냥. 다요.”
“오늘따라 더 이상하게 구네. 식기 전에 먹어.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 여기 내가 좋아하는 집이거든. 맛있다면 다음에 또 같이 오자.”
“네.”
그의 진심 어린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안일하게 대했다. 저 혼자만 잘났다고 날뛴 대가를 이렇게 치르게 될 거란 걸 왜 몰랐을까. 류강현에 대한 제 마음이 그 대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세나 변호사.”
“…….”
“기 변!”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한여진 변호사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파득 어깨를 떤 세나의 동공에 그제야 초점이 잡혔다.
“어?”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진행된 가사전담팀 미팅 중이었다. 수백억 원대 재산분할이 걸린 재벌가 이혼소송으로 모두가 신경이 곤두세운 중요한 미팅으로, 어딘가 정신이 팔린 세나의 모습에 한여진이 한숨을 짧게 쉬며 눈을 흘겼다.
“몇 번을 부른 줄 알아? 미팅 내내 어디에 정신 팔려있는 거야?”
“아. 죄송합니다. 어디까지 얘기했죠?”
저를 향해 쏠린 얼굴을 마주하기 민망해 시선을 내리자, 이미 몇 페이지나 넘어가 있는 태블릿 PC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장기 프로젝트라지만, 벌써부터 기운 빼면 곤란하지.”
이때다 싶어 한여진이 핀잔을 주었다.
“다들 이 사건 하나만 맡은 것도 아닌데, 집중 좀 하자. 나도 미팅 끝난 후 줄줄이 스케줄 있어.”
웃고 넘어갈 수준의 핀잔이었지만, 마음이 복잡한 상황에서 여간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나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지도 못하고 울컥 치미는 분기를 삭이려 입술을 짓씹었다.
“이것 좀 드시고 하실래요?”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피던 이효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테이블 귀퉁이에 올려진 캐리어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가 세나의 태블릿 PC 옆에 조심스럽게 잔을 내려놓았다. 고맙다는 말을 하며 손을 뻗었는데 그녀의 손에 잡힌 건 분홍색 슬러시가 담긴 플라스틱 잔이었다.
“이게…….”
세나의 눈빛을 읽은 이효원이 대답했다.
“방금 류강현 변호사님 다녀가셨어요.”
오늘 아침 세나는 류강현의 집무실 앞을 빠르게 지나쳤다. 창 너머로 집무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를 봤음에도 알은척하지 않고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 방에 가방만 덜렁 던져두고 곧장 회의실로 와버렸다. 그가 그런 저를 못 봤을 리 없었다. 하지만 차마 얼굴을 마주 보고 웃으면서 인사할 수 없었다.
“기 변호사님이 정신이 없어 보이셔서 바로 가셨어요. 마시면서 회의하라고.”
“하아…….”
한 모금을 쪽 빨자 달콤함이 입안 가득 번졌다. 그러나 어쩐지 삼킬 수가 없었다. 하루를 빼놓지 않은 그의 정성에 목이 콱 메어서였다. 아침부터 속을 긁어대던 위염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수천 개의 바늘이 위를 콕콕 쑤시자 세나가 명치 부근을 꾹 누르며 끙, 앓았다.
“미안, 다들 바쁜 거 아는데, 잠시 쉬었다 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