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변곡점(變曲點)2022.02.26.
굳이 대답을 요구한 말은 아니었는지, 그는 세나의 손을 끌어다 제 팔뚝 위에 얹은 다음 테라스로부터 돌아섰다. 강현이 늦게 도착한 만큼 연회장의 분위기는 한풀 꺾여있었고, 새로 등장한 인물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검사 출신 변호사라 그런지, 그의 얼굴을 아는 변호사들도 있었다. 피고의 변호인으로 만났던 사이라 데면데면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일과 관련된 면을 제쳐두고 나면 굳이 대립각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될 수도 있는 게 변호사의 세계였다. 다가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 채성민과의 일은 머릿속에서 금세 잊혔다. 세나는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강현을 조금 신기한 눈으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무뚝뚝 그 자체로 살갑게 굴진 않았지만, 그래도 대학생 때처럼 날을 세우지도 않았다. 처음 변호사 모임에 함께 가자고 했을 때 선뜻 그러겠다는 말에 조금 놀란 것도 있었다. 워낙 모임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의외로 먼저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지 않았다. 물론 적당히 벽을 치고 거리를 두었지만. 오늘의 자리가 강현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맞지만, 그가 이 자리에 흔쾌히 응해준 것이 저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게 고마워 제 손 아래 놓인 듬직한 강현의 팔뚝을 살며시 어루만져보았다. 부드러운 옷감 아래 뼈대가 곧고 굵은 팔뚝을 감싸는 단단한 근육이 만져졌다. 뿌리가 깊어 흔들리지 않는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그가 저에게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라는 생각도.
‘왜 그렇게 당신을 미워하기 위해서 아등바등했을까?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지난날 자신의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 후회스러웠다.
‘더 잘해줄걸. 아니야, 지금이라도 잘하면 되겠지?’
‘그런데 세나야, 강현이도 알아?’
‘네가 K 로펌에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거 말이야.’
그러나 불시착한 비행기처럼 불쑥 머릿속에 들어 닥친 대화에 세나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내가 강현 선배를 이용한다고?’
채성민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거슬렸다. 이 또한 그의 질 나쁜 장난인 걸까?
“왜 그래?”
세나의 멍한 표정을 읽은 그가 제 팔뚝 위에 놓인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채성민의 말을 상기하던 세나가 막연한 불안감에 저도 모르게 그의 팔뚝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샴페인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잠깐 바람이라도 쐴까?”
강현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물론 친목 겸 그리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부러 말을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어쩐지 강현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우쭐한 기분까지 들었다.
“자네 여기 있었구먼.”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좀 늦었습니다.”
다른 로펌 대표들과 사업 이야기를 나누던 기장수가 강현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여긴 우리 로펌의 새로운 파트너 변호사입니다. 안 그래도 대표님들께 소개해 주려고 기다리던 참이었는데.”
“류강현입니다.”
강현이 깍듯이 인사를 하자, 기장수는 잠시 시간을 내달라, 무리와 어울리기를 권했다. 강현이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세나를 먼저 살폈다.
“다녀와요. 난 괜찮아요.”
세나가 그의 팔을 놓아주며 한걸음 물러났다. 안 그래도 복잡 미묘한 감정에 속이 시끄러웠던 차였다. 강현이 다른 대표와 어울리는 동안, 세나도 다른 변호사들과 다양한 대화를 나눴다. 얼마 전 제정된 스토킹 범죄 관련 처벌 법안은 개선으로 10월 21일부터 시행을 앞두고 있었다. 가사소송전담팀을 꾸리고 있는 세나도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이었다. ‘반의사불벌죄 폐지’가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이혼을 한 후 전 배우자가 상대 배우자에게 스토킹 범죄를 저지른다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꽤 오래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은데, 기장수 대표에게서는 강현을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 서 있다 보니 힐을 신은 다리가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 앉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세나의 시야에 채성민이 들어왔다. 다른 이들과의 대화에 집중하는 듯 보이면서도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던 10년 전의 채성민과 지금의 채성민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상냥하고 다정다감해 뭇 후배들에게 멘토로 삼고 싶은 선배로 불리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완전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됐어. 신경 쓰지 말자.”
이유가 뭐든 더는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이제 채성민은 더 이상 좋은 선배가 아니었다. 류강현의 말대로 어울리지 않으리라, 시선을 돌리는데 클러치백 속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채성민의 문자였다. 세나는 내용도 모르면서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고심 끝에 문자를 확인한 순간, 그녀의 눈이 크게 뜨이고 손 또한 바르르 떨렸다. 핸드폰 화면 속에 떠오른 사진 한 장. 기장수와 기세나가 류강현이라는 이름 대신 ‘R’이라는 알파벳으로 작성한 계약서였다. 바로 다음 문자가 들어왔다.
[우리가 잘 어울리는 이유. 이 정도면 근본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잘 맞는 것 같은데.]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사람들 사이에 있던 그는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진 채성민을 찾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울리지만,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계약서가 어떻게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걸까. 설마. 느닷없이 점심을 먹자며 사무실로 찾아온 채성민이, 세나가 잠시 계약관리팀에 갔다 온 사이 급하게 떠났던 날이 떠올랐다. 연결할 수 없다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전화를 끊고 다시 걸었다.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 통화음이 길게 이어지다, 끊기기 직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지금 어디예요?!”
“왜? 갑자기 내가 보고 싶어지기라도 했어?”
-“문자 뭐예요? 설마 제 사무실 책상 뒤진 거예요?!”
“그렇게 중요한 서류였으면 애초에 관리를 잘했어야지.”
주변 사람들을 의식해 한껏 소리는 죽였지만, 억양이나 톤은 날카로웠다.
-“선배도 변호사면서 상도덕도 없어요?! 어떻게 변호사 사무실을 뒤질 생각을 해요?”
채성민의 입가에 웃음이 비쭉 솟는다. 문이 잠겼다고 도둑이 집을 못 터는 것도 아니고.
“그러게, 나도 내가 손버릇이 안 좋은 줄은 몰랐는데, 미리 알았다면 알려줄 수 있었을 텐데.”
양심의 가책 혹은 죄책감이라고는 없는 그의 태도에 말문이 막힌 상대방에게선 한참 말이 없었다.
-“이걸로 뭘 어쩌려구요?”
“지금부터 생각해보려고.”
-“선배가 가지고 있어 봐야 아무짝에 소용없는 계약서예요.”
“알아. 사실 처음엔 뭘 어떻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그저 재밌는 짓을 벌였구나, 했지.”
-“알면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이래서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애들은 휘두르기가 쉽다. 누구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상대방의 악의에 애써 포장해 둔 어여쁜 얼굴에도 금이 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런데 네가 이렇게 득달같이 덤벼들면 그게 정말 커다란 약점이라도 되는 것 같잖아?”
이 상황이 못 견딜 만큼 즐겁다는 듯 말하는 그의 어투엔 조롱기가 가득했다.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고작 그깟 문자 하나에 이렇게 무너져서야 원, 쉬워도 너무 쉬웠다.
-“선배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요? 내가 알던 그 채성민 맞아요??”
“풋.”
참았던 웃음이 터졌다.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 버린 관계. 그렇게 만든 건 채성민 본인이었기에 변한 그녀를 탓할 마음은 없었다. 누구라도 믿었던 상대에게서 배신을 당하면 응당 태도부터 바뀌어야 할 테니까.
“아직도 그렇게 세상 물정을 몰라서야. 온실 속의 화초라 그런가, 인생을 헛살았네.”
사실 오늘까지도 긴가민가했었다. 그 계약서가 어디 갖다 팔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그녀도 자신과 별반 다를 거 없었구나, 하는 정도였을 뿐. 그래서 더더욱 류강현에 관한 안 좋은 소문을 흘리면, 그 둘 사이의 유대가 끊어질 거라 예상했는데, 뜻밖이었다. 뒤에서 이딴 같잖은 수작을 부리면서 저 혼자만 깨끗한 척, 정의로운 척, 고고한 척. 감히 그런 주제에 류강현을 믿는다며 헛소리를 해대는 꼴에 배알이 뒤틀렸다.
“그래서 네게 좀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줄까 해.”
“…….”
“류강현이 널 마음에 들어 한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홀을 빠져나온 채성민은 손가락으로 난간을 피아노 치듯 두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설마 했던 기세나가 류강현을 좋아한다고 확신한 건 오늘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상황을 복기한 채성민은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그 새끼가 천애 고아인 건 알고 있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듯 엄숙하기까지 했다.
“부모도 없는 새끼가 오만방자하게 뭐라도 되는 양 사람을 깔보지. 때론 그게 부럽기도 했어. 나랑은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도대체 그놈은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까. 궁금하기도 했었지.”
세나와 통화를 하면서 연회장 바깥 복도를 거닐던 채성민은 외벽 쪽 창가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강현을 발견했다.
“걔가 누가 좋아서 제 감정을 드러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네가 유일해. 이건 너한테 잘된 거겠지? 축하해. 그 새끼를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된 거.”
채성민은 멀찍이 떨어진 채로 강현과 그 무리를 지켜보았다. 그는 각 로펌 대표들 사이에서 우월한 피지컬을 자랑하듯 올곧은 자세로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딱히 흥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주변의 분위기는 보란 듯이 강현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
“류강현은 자기 자신 말고 아무도 안 믿어.”
잠시 끊어졌던 세나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너도 참 너다. 이 지경이 돼서도 그런 질문이나 하고 말이야.”
그 모습을 응시하는 채성민의 눈빛은 잔뜩 굶주린 들짐승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강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뒤로 휙 돌았다.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린다 생각했더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저를 노려보고 서 있는 기세나가 있었다. 채성민은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느긋한 걸음으로 세나에게 다가갔다.
“정말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지금 뭘 하는지?”
그녀에게로 고개를 기울인 채성민은 뱀처럼 붉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훑었다. 곧이어 길게 쭉 찢어진 입꼬리가 귓가에 걸쳐졌다.
“이간질하는 거잖아.”
경직되어있던 세나의 볼과 눈동자가 미세하게 경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