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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저열한 열등감 (68/120)

68화. 저열한 열등감2022.02.22.

걸쭉하긴 하지만 원래라면 나름의 부드러움도 느껴지는 장철호의 목소리엔 잔뜩 화가 실려있었다. 자신의 덩치에 지레 겁을 먹는 사람들이 있다 보니 일부러라도 더 친근하고 살갑게 구는 그였는데, 확연히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니 세나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 떨었다.

16551863173907.jpg“하긴, 어디서 들은 게 뭐가 중요합니까. 믿냐 안 믿냐는 기세나 변호사님의 선택이죠!”

확 구겨진 눈썹 사이 분개 어린 감정이 넘실거렸다. 그의 반응을 살피는 세나의 모습에 그가 한층 더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16551863173907.jpg“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기 변호사님이 어떤 말을 들었든 간에, 그것보다 더한 말을 들었더라도 류강현 변호사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겁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뱉을 땐 또박또박한 어조와 화를 씹어 삼키는 듯한 눈빛이었다. 세나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장철호가 들릴 듯 말 듯한 욕설을 내뱉고는 세나의 뒤에다 대고 물었다.

16551863173907.jpg“그 말을 듣고 류 변호사님께 실망하셨나요?”

1655186317392.jpg“…….”

세나가 몸을 돌려 장철호를 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조바심이 난 듯 보이기도 하고, 실망감을 겨우 억누르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1655186317392.jpg“아뇨.”

16551863173907.jpg“류강현 변호사님 얼마나 믿으세요?”

잠깐 잊고 있었던 류강현의 모습 중 하나가 떠올랐다. 좋아하는 여자가 술에 취해 꼬시는데 안 넘어가는 놈이 모지리라고 말해놓고 결국엔 모지리가 되기로 선택한 남자의 순정이.

1655186317392.jpg“제게 보이는 만큼요.”

그런 사람이 스캔들 검사니, 성추행이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다만 조금 씁쓸함이 남아있는 건 제게 그런 말을 전한 채성민에게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던 어제의 자신 때문이었다.

16551863173907.jpg“절대 아닙니다.”

1655186317392.jpg“저도 알아요.”

세나가 싱긋 웃으며 대꾸하자 잔뜩 성이 나 있던 그의 눈썹이 슬며시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고는 이내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16551863173907.jpg“그런데 왜 물어보셨어요?”

서글서글한 모습 뒤에 감춰둔 강인한 발톱. 세나가 본 장철호는 잘못을 무조건 덮어두고 감추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1655186317392.jpg“아닌 거 아니까 물어본 거예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철호 실장님은 진실을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기에 장철호라면, 소문의 류강현이 사실이라면 가만히 뒀을 리가 없다는 근거는 없지만, 무한한 믿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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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 호텔 연회장은 잘 갖춰 입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벽을 따라 하얀 식탁보를 쓴 긴 테이블 위에는 술과 함께 곁들일 수 있는 핑거푸드를 비롯해 간단한 음식들이 접시와 함께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이름표가 올려진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삼십 분 남짓. 오늘의 연회를 주최한 로펌 대표의 개회사와 로펌의 간략한 이력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진 후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자유로운 분위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법인을 운영하는 대표들은 따로 자리를 잡고 앉아 자기네들끼리 회사 운영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안면이 있는 변호사들은 그간의 근황과 안부를 묻는 등 가벼운 대화들을 나눴다. 세나는 한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 입구 쪽을 힐끔거렸다. 행사 시작하기 직전 류강현으로부터 온 메시지에는 가벼운 접촉사고가 나서 조금 늦는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1655186317392.jpg“같이 올 걸 그랬나?”

그의 말에 따르면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닌 것 같았다. 호텔 근처 사거리에 서 있는 강현의 차량에 잠깐 한눈을 판 차가 와서 박았고, 뒤 범퍼가 살짝 찌그러진 것 외에는 그다지 피해가 없는 듯 보였다. 상대 차량의 속도가 높지 않아 그나마 피해가 적었다. 소개를 해 주고픈 사람들이 몇몇 참석하는 모임인지라 세나가 제 손목시계를 힐끔이며 강현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16551863195484.jpg“누구 기다려?”

세나가 들고 있는 잔에, 인사를 대신해 제 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방긋 웃는 남자. 채성민이었다.

1655186317392.jpg“여긴, 어떻게……. 아. 오늘 연회 주최 로펌이 대호 그룹 법무팀 자문회사였죠.”

16551863195484.jpg“참석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혹시나 해서 왔더니, 네가 있어서.”

평소라면 반갑게 그를 맞이했을 텐데, 그날 이후 세나는 채성민이 껄끄러웠다. 제가 걱정된다고 류강현에 대해 알려준 것인데, 꼭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은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래서 이틀 전 채성민의 연락도 일부러 피했다. 세나는 여전히 류강현과 관련된 소문의 진상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류강현은 절대 그럴 리가 없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채성민이란 사람 자체에 실망한 것도 있었다.

16551863195484.jpg“잠깐 얘기 좀 할까?”

1655186317392.jpg“아, 저 지금 강현 선배 기다리고 있어서.”

16551863195484.jpg“잠깐이면 돼.”

먼저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멀뚱히 보던 세나가 입구를 한번 돌아본 뒤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연회장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을 피해 테라스로 나왔다. 조용히 채성민을 뒤따라 테라스로 나온 세나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그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1655186317392.jpg“강현 선배가 그때 선배한테 뭐라고 했어요?”

16551863195484.jpg“응?”

1655186317392.jpg“레스토랑에서요.”

16551863195484.jpg‘그 당시 강현이가 내게 했던 말을 생각해보니, 그 사건이 그 사건이었더라고…….’

1655186317392.jpg“강현 선배가 뭐라고 한 말 때문에 알게 됐다고 했잖아요?”

샴페인을 한 모금 머금어 음미하던 채성민의 고개가 살며시 모로 기울었다. 그리고 곧 그린 듯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16551863195484.jpg“내가 그랬나?”

1655186317392.jpg“…….”

누군가 뒤에서 망치로 머리통을 후려친 듯 한순간 멍하고, 입술이 툭, 벌어졌다.

1655186317392.jpg“설마…… 거짓말이었어요?”

채성민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 그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그런 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6551863195484.jpg“정확하게 말하자면 거짓말은 아니지.”

1655186317392.jpg“거짓말이 아니면 뭔데요?”

16551863195484.jpg“중요한 정보만 살짝 빠트린 장난?”

장난이라니. 기가 찼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도 맞아 죽는다는데, 하물며 치명적인 헛소문을 흘린 것을 고작 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는 걸까? 제 앞에서 빙긋 웃고만 있는 그가 제가 알던 그 상냥한 선배인지 의심스러워졌다.

1655186317392.jpg“장난치고 질이 나쁘다고 생각 안 해요?”

16551863195484.jpg“그래서 어디까지 알아냈는데?”

1655186317392.jpg“뭘 알아내요?”

16551863195484.jpg“류강현한테 직접 물어본 거 아니야?”

1655186317392.jpg“아뇨. 물어볼 가치도 없는 소문이었어요.”

16551863195484.jpg“아, 그럼 그냥 류강현이라면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믿는다는 거? 대단하네.”

세나가 한껏 치켜세운 눈으로 채성민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이제부터 네가 뭘 말하든 믿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러자 채성민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잘게 털었다.

16551863195484.jpg“맞아. 스폰서 검사 사건을 수사한 게 류강현이었지. 그게 제 발목을 잡는 줄도 모르고. 멍청한 새끼.”

강한 적의를 과감히 드러내는 채성민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1655186317392.jpg“두 사람……. 친구 아니었어요?”

16551863195484.jpg“친구? 누가, 누구랑?”

그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친구라, 하고 덧그리는 어투가 생소한 단어를 내뱉는 듯했다.

16551863195484.jpg“아마 그 새끼도 나를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을걸?”

불현듯 세나는 채성민에게서 지난날의 제 모습이 보였다. 열등감. 열등감에서 피어오르는 적개심과 증오, 그 밖의 저열한 감정들.

16551863195484.jpg“그건 그렇고.”

채성민은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테라스 난간에 올려두고 그 손으로 세나의 손목을 잡았다. 당기는 힘에 끌려가지 않으려 팔목에 힘을 줘 버티자, 그녀의 같잖은 저항을 비웃듯 채성민은 피식, 실소했다. 눈은 서글서글하게 말고 있는데 정체 모를 욕망으로 희번들했고, 입꼬리가 삐뚤어진 것이 교활해 보이기까지 했다.

16551863195484.jpg“세나야, 강현이도 알아?”

전신을 옥죄이듯 응시하는 눈동자에 세나의 가슴이 덜그럭거렸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 사이를 기어올랐다. 그러나 제 불안감을 들키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두 눈에 힘을 줬다. 마주친 시선에 서린 경계심을 읽은 채성민은 상냥한 손길로 볼 옆으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귓가에 걸어주었다. 여전히 경계심을 지우지 않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이윽고 세나의 귓가에 떨어진 채성민의 입술에선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16551863195484.jpg“네가 K 로펌에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거 말이야.”

그게, 무슨. 누가 누굴 이용하냐고 입을 열려는 찰나, 팔목을 움켜쥐고 있던 악력이 스르륵 풀렸다. 그리고 세나의 너머로 눈동자를 치켜든 채성민은 여전히 귓가에 대고 있던 입술로 속삭였다.

16551863195484.jpg“기다리던 사람, 도착했나 보네.”

그의 말에 고개를 휙 돌리자, 강현이 연회장 한가운데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남들보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다 보니, 확실히 눈에 띄었다. 그를 두고 힐끔대는 시선들이 많았다. 세나는 채성민이 한 말이 신경 쓰여 강현에게 곧장 가지 못했다. 그녀의 망설임을 읽은 채성민은 오히려 등을 떠밀었다.

16551863195484.jpg“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으니, 이만 가봐.”

부드럽게 달래는 어투였지만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어 도리어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떨떠름함을 떨구지 못하고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때마침 그녀를 발견한 강현이 넓은 보폭으로 다가왔다. 안 그래도 시선을 잡아끄는데, 성큼성큼 걸어오니 꼭 전차가 눈앞에 들이닥치는 것 같았다.

16551863283444.jpg“내가 많이 늦었나?”

평소 일할 때 복장과 별반 다름없는 깔끔한 슈트였다. 그러나 사무실 조명이 아닌 샹들리에 조명에 비쳐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난히 근사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늘 입던 어두운 색감이 아닌 옅은 푸른빛이 맴도는 드레시 슈트였다. 투 버튼 단추를 모두 여미고 있어서 허리선이 더욱 도드라졌다. 강현은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서버를 손짓만으로 불러 세웠다. 그리고 서버의 손에 들린 트레이에서 황금색 빛깔의 위스키가 담긴 온더록스 잔을 집어 들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서비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일련의 과정들이 몹시 익숙한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세나는 저도 모르게 강현의 동작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16551863283444.jpg“내가 뭐 중요한 거라도 놓쳤어?”

1655186317392.jpg“……아뇨. 앞 시간은 어차피 건너뛰어도 되는 행사였어요.”

일부러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허리를 살짝 내린 강현은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깨끗한 검은 눈동자가 무언가를 가늠하듯 자신을 살피자, 세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구었다.

16551863283444.jpg“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걱정 많이 했어?”

1655186317392.jpg“괜찮아요?”

16551863283444.jpg“괜찮아. 정말 살짝 부딪힌 거라. 월요일에 공업사에 넘기면 돼.”

1655186317392.jpg“다행이네요.”

16551863283444.jpg“그런데 기세나.”

마침표가 찍히듯 맥이 뚝 끊기더니, 곧이어 한 톤 낮아진 음성이 들려왔다.

16551863283444.jpg“저놈은 여기 왜 있는 거야?”

놈이라 부르기 전에 분명 새끼, 라는 단어가 먼저 튀어나온 것을 들은 세나는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한 것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바닥으로 내렸던 고개를 들자 강현은 테라스 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할 뿐 고개를 까닥여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1655186317392.jpg“대호 그룹이랑 오늘 연회 주최한 법무법인이랑 협업 관계라 초대받았대요.”

16551863283444.jpg“만인에게 친절한 건 좋은데, 웬만하면 저놈이랑은 어울리지 마.”

1655186317392.jpg“…….”

16551863283444.jpg“기세나 인생에 저놈만큼 도움 안 되는 놈도 없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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