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유도신문2022.02.19.
아직 정리가 다 되지 않은 상태로 운을 뗀 세나가 잠시 침묵으로 머릿속을 정리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법조인으로서 그 품위를 현격히 떨어트린 직원이 있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를 이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로 데려온 기장수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말이에요. 요즘 검찰 내부에서도 스폰서 검사니, 접대 검사니 이런 말들이 많고, 변호사들에게도 이런저런 유혹이 많잖아요. 상대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일부러 재판에서 패하는 경우도 있고.”
세나는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질문을 던졌다. 이 중에 뭐라도 걸리는 게 있다면 기장수 대표가 알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우리 로펌에 그런 짓을 한 변호사가 있다면 모를 리가 없겠죠?”
처음엔 단순히 ‘만약’으로 시작하는 질문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세나의 얼굴에선 절박함이 엿보였다. 기장수는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개인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면 모를 수도 있겠지.”
그의 말에 세나의 낯빛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그러자 기장수가 그런데, 하고 말을 이었다.
“K 법무법인에 그런 변호사라니. 가당치도 않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경력이 있는 변호사의 경우 훨씬 더 철저하게 검증하니까 절대 없겠죠?”
기장수는 ‘말로 하면 입 아프지.’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그는 사람 볼 줄 아는 자신의 선구안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판사로서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았던 피고인부터 악독한 짓을 서슴지 않고 행했던 범죄자까지. 24시간을 알차게 쓰며 사건 기록들을 누구보다 꼼꼼히 살피고, 혹시라도 자신의 판결 때문에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 판결하던 사람이었다. 세나는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그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내공을 존경했다. 하물며 그런 사람이 류강현을 제 딸에게 로펌의 파트너이자 배우자로 만들라는 계약서까지 들이밀었다면, 적어도 그딴 저급한 짓거리의 당사자가 아닐 것이다. 기장수 대표의 확고한 대답에 세나는 저를 괴롭히던 불손한 의심을 떨쳐냈다.
“류 변호사님한테는 제가 물어볼게요. 모임에 같이 갈 수 있는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세나는 의자에 앉자마자 강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신호가 걸린 지 얼마 못 가, 거리감이 있는 목소리로 그가 전화를 받았다.
“운전 중이에요?”
-“응. 무슨 일 있어?”
“우리 주말에 데이트 있잖아요……. 혹시 어디로 갈지 정했어요?”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혹시 어디 가겠다고 예약을 했으면…….”
세나가 말꼬리를 흐리며 반응을 살피자, 강현이 희미한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생각 중이야.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말해. 참고로 난 네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좋으니까.”
웃음기가 머문 낮은 목소리의 울림 때문에 핸드폰을 대고 있던 귀가 다 간질거렸다. 한순간이라도 그를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선배 믿어요.”
-“…….”
상대편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세나가 재차 물었다.
“선배를 믿는다고요. 듣고 있어요?”
-“잠깐 뭣 좀 생각한다고.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지?”
물음표 끝에 걸린 나직한 웃음소리가 살랑살랑 마음을 흔든다. 이쯤 하니 그가 다른 사람 앞에선 잘 웃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행이라 여겨졌다.
“그런 게 있어요.”
세나는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믿는 건 좋은데, 대화의 문맥을 따라가자니 혹시 데이트 코스가 마음에 안 들면 멱살이라도 잡을 건가? 좀 무서운데.”
말로는 무섭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목소리엔 여전히 웃음기가 맴돌았다. 세나가 ‘설마요.’ 하고 따라 웃었다.
“그것보다 데이트는 일요일로 미룰 수 있을까요? 이번 주 토요일엔 일정이 생겼어요.”
-“무슨 일인데? 중요한 일이야?”
“선배한테도 좋은 일이에요. 사무실 들어오면 내 방에 들러줘요.”
그와의 첫 데이트가 하루 밀려나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변호사 모임에서 그를 소개하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K 법무법인 대표 변호사로 다른 로펌에 처음 얼굴을 알리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의 고백에 제대로 된 답을 해주리라. 통화를 끝낸 세나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장철호의 방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철밥통을 때려치우고 류강현을 따라 K 로펌에 온 그라면, 이 사건에 대해 남들보다 자세하게 알고 있을 터였다. 물론 미주알고주알 제게 다 말해주진 않을 테지만, 강현을 믿기로 한 세나에겐 밑져야 본전이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찾아갈까 잠깐 고민하던 세나는 장철호의 방으로 향하기 전 휴게실에 들렀다. 그리고 머그잔에 커피 두 잔을 담아 총총총 걸어 나왔다. 예전 자신이 쓰던 사무실 문 앞에 서서 노크하자 이내 방문 허락이 떨어졌다. 세나가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장 실장님 바빠요?”
“기 변호사님, 아래층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여쭤볼 게 있는데, 잠시 시간 되세요?”
책상에 올려진 서류들을 피해, 그를 위해 준비한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생글생글한 눈웃음과 애교가 살짝 가미된 목소리는 덤이었다.
“안 그래도 딱 커피가 땡겼는데, 잘 마실게요.”
“요즘도 많이 바쁘죠? 강현 선배가 수임하는 사건들이 하나같이 어려운 케이스라, 골치가 아프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뭐, 류 변호사님이 아시다시피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잖습니까. 검사일 때나 변호사일 때나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지요.”
“그래요?”
세나가 은근슬쩍 흥미를 보이자 장철호가 그때를 기억하며 말문을 열었다.
“뭐 하나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수사관 들들 볶질 않나, 수사자료 넘긴 경찰서 가서 들들 볶질 않나, 류 변호사님이랑 2년 동안 함께 일하면서 저도 나름 이 일에 꽤나 재미 좀 보던 사람인데, 학을 뗐죠. 저보다 더한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사이가 좋으시던데요? 그런데 어떻게 또 같이 일하실 생각을 하셨어요?”
어렴풋이 뭔가가 떠올랐는지, 장철호가 치까지 떨면서 하소연 형식으로 말을 잇는데, 어투로 보나 표정으로도 보나 정말 싫은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이건 비밀인데, 제가 류 검사 순환근무로 헤어지게 됐을 때, 축배를 들었던 사람입니다. 두 번 다시 그 지긋지긋한 새끼…….”
장철호는 저도 모르게 내뱉은 욕설에 계면쩍어하며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세나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자 어물쩍 웃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암튼, 류 검사 안 봐도 된다고 한동안 출근길이 꽃길이었죠. 그런데 미운 정도 정이라고, 이상하게 한 번씩 그립더란 말이죠. 학대를 즐기는 타입도 아닌데. 사실 일할 때 죽이 짝짝 맞았던 것도 있고, 힘들긴 하더라도 갑갑한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기도 했고.”
세나가 흥미로운 기색을 내비치자 그는 강현이 맡았던 사건 중 특이한 사건 하나를 예시로 들며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세나는 장철호의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적절한 추임새를 넣었다.
“와, 역시. 선배는 검사가 딱, 인데. 제가 늘 생각했거든요. 눈을 마주치면 왜인지 모르게 뒷덜미가 오싹하는 게, 잘못도 없는데 괜히 움찔하게 만드는 그런 포스가 있달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기분 좋을 만큼 적당한 흥미를 보이며 ‘딱, 인데.’라고 말할 땐 그 부분이 포인트가 되도록 ‘딱’ 소리 나게 핑거 스냅까지 날렸다.
“맞습니다. 약간 그런 거 있죠. 난다긴다하는 사기꾼 놈들도 류 변호사님 책상 앞에 앉는 순간 지레 기가 질려서 가만히 놔둬도 죄를 실토하기까지 했으니 말 다 한 거죠.”
“그러게요. 그런데 왜 변호사를 하지?”
허허허.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소릴 내던 장철호가 입가에 미소를 걸어둔 채 순간 두 눈을 번뜩였다.
“그런데, 기세나 변호사님은 뭐가 궁금해서 자꾸 유도신문을 하실까?”
그를 따라 호호호 웃던 세나의 표정이 어색한 상태로 굳어버렸다. 살금살금 담을 넘던 도둑이 집주인과 딱 마주친 것처럼. 강현의 눈동자가 천 리 너머를 내다보는 봉황의 눈이라면, 그의 파트너인 장철호의 눈동자는 허튼소릴 하면 얄짤 없다는 호랑이의 눈이었다.
“저한테서 알아내고 싶은 게 뭡니까?”
장철호를 마주 보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티 많이 났어요?”
“저도 수사관 짬밥이라는 게 있는데. 가만히 보면 기세나 변호사님은 본인만 모르는 것 같아. 남 이용해서 잇속 챙기는 거. 변호사님은 그냥 정면 돌파가 어울려요. 이상한 데 머리 쓰지 말고.”
“선배랑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역시. 괜히 강현 선배 사람이 아니었어, 장 실장님은.”
세나가 잔뜩 주눅이 든 어조로 손톱 거스러미를 매만지자 장철호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며 크게 숨을 뱉었다.
“그래서 저를 찾아온 본론이 뭔가요? 제가 말할 수 있는 거라면 알려드릴 테니.”
장철호가 제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앉으라 권했다.
“얼마 전 강현 선배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릴 들었어요. 선배랑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고, 오해도 쌓여있었던 터라 사실 여부 확인보다 당황스러웠어요. 그래서 더욱 판단이 서질 않아 제대로 변론도 못 했어요. 아마 저도 모르게 의심했던 것 같아요.”
강현과의 통화에서 그를 믿는다 어쩐다 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의심의 싹을 키웠던 순간도 있었다. 세나는 고해성사하는 심정으로 장철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해서요. 제가 아는 선배라면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거든요.”
“혹시 사내에 도는 그 소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장철호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세나는 바닥으로 향했던 시선을 들고 빠르게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무슨 소문요?’ 하고 물었다.
“휴게실에서 주니어 변호사들끼리 수군덕거리는 말을 들었는데, 류 변호사님의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더라구요. 후배 검사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는데, 바람을 피웠다는 둥, 선배 검사랑 삼각관계였다는 둥. 어처구니가 없는 소문이라 그냥 넘겼는데 그게 기 변호사님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는데.”
“하…….”
그놈의 입이 문제다.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는 걸까. 그렇게 말을 전하고 싶으면 영양가라도 있게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전래동화나 전하지. 그리고 그 주니어 변호사들이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는 소문의 배후에 한여진이 있음이 분명했다. 입조심 하라 누누이 일렀는데.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한여진. 내가 너 가만 안 둔다.’
세나가 치미는 울화에 잘근잘근 치아로 씹어대던 아랫입술을 뱉었다.
“비슷하지만 달라요. 저는 강현 선배가 후배 검사를 성추행했고, 그걸 무마시키려다 검사직을 그만뒀다는 소문이에요. 그리고 다른 추문도…….”
나머지는 차마 제 입으로 뱉을 수 없어 추문으로 뭉뚱그렸다. 세나의 말을 들은 장철호가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려찍었다.
“어디서 들은 정보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