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스캔들2022.02.15.
친구라서 여자 보는 취향이 같은 건가. 아님, 어린 남자애들처럼 두 사람이 저를 두고 내기를 했나. 둘 중 누군가는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별의별 생각들이 다 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선배를 다시 만난 지도 얼마 안 됐고, 이렇다 할 접점도 없었고.”
“남녀가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데 꼭 뭐라도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난 널 다시 만나자 딱 내 마음을 알겠던데?”
채성민은 잡았던 세나의 손을 놓아주며 몸을 뒤로 물렸다.
“지난번 다이닝에서 갑자기 류강현이 나타나서 제대로 전하지 못한 말이 있는데. 대학 때 널 좋아했다는 말, 농담 아니야.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서 고백하지 못한 거였지.”
“다른 분이랑 유학까지 갔었잖아요.”
“맞아. 그걸 변명하려는 마음은 없어. 어쨌든, 지금은 나는 싱글이고, 너도 지금 만나는 사람이 없으니 지금이 기회가 아닐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생각지도 못했다. 채성민이 저를 좋아한다니. 나를 놀리는 게 아니냐는 물음에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제 마음을 고백하는 그를 보고는 멍하게 벌어져 있던 입술에 힘을 주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나?”
지금 눈앞의 채성민도, 술 취한 밤 저를 소중한 애물단지처럼 꼭 끌어안고 한숨만 내쉬던 류강현도. 만약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척 연기를 하고 있다면 변호사가 아니라 배우가 되어야 할 정도로 실감 나는 열연이었다.
“저는…….”
동그랗게 떠진 세나의 눈이 점차 본래의 모습으로 가라앉았다. 그녀가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이며 숨을 고르듯 할 말을 골랐다. 만약 이 고백이 정말 저를 놀리는 것이 아닌 두 사람의 진심이라면, 제 마음의 방향을 확실히 정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한때 첫사랑이라 여기던 남자의 고백은 풋풋했던 과거의 설렘과 거리가 멀었다. 솔직하게는 당황스럽고 조금 불편했다. 그리고 그와 다르게 자꾸만 마음속에서 목소리를 키우는 한 남자가 떠올랐다.
“아, 음. 선배. 마음은 정말 감사한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어, 그게.”
확실히 강현과는 달랐다. 강현의 고백엔 심장이 우뚝 멎었고, 그러다 철렁 바닥까지 떨어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져 호흡이 가빠져 올 때까지 제대로 된 조각 숨조차 뱉지 못하게 만드는 두근거림이 있었다. 그리고 말로는 안 된다, 싫다, 했어도 그의 관심이 저를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모순적인 마음도 있었다.
“네.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어차피 거절할 거 남아있는 미련의 불씨는 깡그리 지워주는 게 도리였다. 결심을 굳힌 세나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누구냐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채성민의 입에선 그런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얇은 샴페인 잔의 길쭉한 기둥을 손끝으로 잡고는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댈 뿐이었다. 세나는 조용히 그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채성민이 제 나름의 거절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입가로 가져간 샴페인을 한참이나 마시지도 않고 있다가, 그대로 내려놓았다.
“세나야.”
“네.”
“혹시 네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 류강현이야?”
그의 입에선 세나가 기다린 말이 아닌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아셨어요?”
“하필이면 왜 류강현이야.”
하필이면 왜 류강현이냐니. 세나는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마주쳐온 채성민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눈빛 속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중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감정은 불쾌감과 강한 적의였다. 그러나 이내 그런 감정들이 사라지고 조금은 서글픈, 마치 동정하는 듯한 눈빛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류강현이라면, 세나야. 다시 한번 생각해. 걘 안 돼.”
잘못된 학생을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세나를 살피던 채성민이 이내 못 참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러고는 안타까움이 담긴 한숨을 두어 번 푹푹 내쉬다, 눈꺼풀만 슬쩍 들어 세나의 표정을 살폈다. 마치 할 말이 있는데 차마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뭔데 그래요? 제가 뭘 모른다는 거예요?”
“하긴 그 자식이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지…….”
뭐냐고, 빨리 말해보라고 해야 하는데, 채성민은 일자로 입을 꾹 닫고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세나 또한 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를 화두에 올려두고 불안감을 조성하는 그가 못마땅했지만, 그의 반응이 여간 이상한 게 아니기에 애꿎은 물로 목만 축였다.
“반년 전부터 검찰청 내부에서 쉬쉬하던 사건이 있었어.”
채성민은 세나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 나지막한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스캔들 검사.”
스캔들 검사에도 종류가 다향하다. 성(性) 검사니, 스폰서 검사니, 뇌물 검사니, 몇 해마다 한 번씩 빵빵 터지는 스캔들이었다. 알다시피 검찰이나 경찰이나 제 식구 감싸기가 만연한데 제대로 된 수사가 될 리가 없고 그러다가 또 흐지부지 사라지는 사건이었다.
“그게 왜요?”
“그 성(性) 스폰 검사가 류강현 얘기잖아.”
홉뜬 세나의 갈색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며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에다 쐐기를 박듯 채성민은 다음 말을 던졌다.
“거기다 검사실 여후배를 성추행하고 무마시키려고 했던 것까지.”
“…….”
“아마 네가 형사 관련 사건을 맡는 변호사였다면 한 번쯤 들어봤었을 텐데…….”
“거짓말…….”
세나의 눈이 토끼처럼 번쩍 뜨였다.
“말도 안 돼요.”
세나가 재차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어보자, 채성민이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강현 선배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처음엔 나도 소식 듣고 긴가민가했어. 그런데 갑자기 검사 옷을 벗고 변호사가 된 것도 그렇고, 그 당시 강현이가 내게 했던 말을 생각해보니, 그 사건이 그 사건이었더라고.”
“뭐가, 잘못된 거예요. 강현 선배가 누명을 썼거나……. 진짜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잖아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검사 시절에 적이 워낙 많았으니까.”
물잔을 든 세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채성민이 하는 얘기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만 지난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다. 대외비라 말을 아끼던 동부지검의 박 검사도, 여후배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한여진도, 회식 때 왜 옷을 벗었냐고 물어본 다른 변호사의 말에 싸해졌던 분위기도.
“나도 친구니까 웬만하면 비밀을 지켜주려고 했는데……. 네가 그 녀석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하니,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어서 하는 말이야.”
“차라리 누굴 때렸으면 몰라, 정말 스폰서는 아니에요. 강현 선배가……. 강현 선배가 뭐가 아쉬워서. 아니, 선배도 생각해봐요. 그 오만한 남자가 누군가에게 그런 접대를 받고 사건을 축소한다거나, 그랬을 리가 없잖아요?”
제가 아는 류강현이라면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세나가 더듬더듬 강현의 상황을 대변하려 해봤지만, 실상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말도 안 된다고. 그런데-.”
채성민은 혼란스러운 세나의 심경을 헤아리는 듯한 어조로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었지만, 결국엔 사람이란 알 수 없다며 제아무리 청렴결백한 인간이라도 실수는 하기 마련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후배와의 일은 어떨지 몰라도, 스폰서 검사 사건에 연루된 건 확실해. 그 당시 대호 그룹이랑 관련 있는 기업 대표가 함께였거든.”
“…….”
“나도 그래서 확실히 알게 됐고.”
그러고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을 했다.
“차라리 그런 녀석 만날 거면, 나랑 만나. 아직 마음이 깊어진 거 아니잖아?”
친한 친구의 입에서 나온 류강현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라, 그의 말이 더는 세나에게 들리지 않았다.
호텔을 나와 차에 올라탄 세나는 곧장 동부지검에 있는 박 검사에 전화를 걸었다. 채성민의 말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부터, 어떻게 물어봐야 할까, 전화를 거는 내내 무릎이 달달 떨려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만약 채성민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저 ‘류강현이 그럴 리가 없다’는 믿음만으로 넘기기엔, 채성민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세 번의 연결 끝에 잔뜩 갈라진 목소리의 박 검사가 전화를 받았다.
-“기세 변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전화를 많이-.”
“류강현 검사 사건이 뭐야? 대외비라고 말했던 거.”
-“뭐야, 오랜만에 전화해서 다짜고짜 그건 왜 묻는 건데? 지금 같이 일하는 사이 아냐?”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래. 왜 자꾸 주변에 이상한 말들이 들리는지.”
-“대외비라고 했잖아. 나도 말 못 해.”
“그럼 하나만 물을게.”
-“뭔데?”
“선배가 옷 벗은 이유 중에 후배라는 여자 검사 일도 있어?”
-“…….”
“박 프로. 제발. 부탁이야.”
-“……없다고는 말 못 하지.”
“혹시 강현 선배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여검사한테?”
-“전에도 말했듯이 나도 잘 몰라. 대외비라서만이 아니라 사건이 워낙 이상해서 함부로 말하기가 그래.”
*** 일 년에 두 번, 국내 대형 로펌들이 돌아가면서 주최하는 변호사 모임이 있었다. 호텔 연회장을 빌려 간단한 식사와 술을 마시며 자유롭게 현 법안에 관한 대화를 나누거나, 바뀐 개정안에 대한 변론의 방향성을 주제로 이런저런 말들을 나누는 모임이었다.
“이번 모임은 어찌할 생각이야?”
기장수 대표는 세나를 앞에 앉혀두고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로펌 대표로 참여하는 거니 올해는 류강현 변호사랑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
“기세나.”
“…….”
세나는 대표실 호출을 받고 들어와 소파에 앉은 내내 찻잔엔 손도 안 대고 넋을 빼고 있었다.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기장수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제야 멍했던 시선에 초점이 잡힌다.
“네? 뭐라고 했어요?”
“무슨 생각을 하느라 넋을 빼놓고 있어? 뭔 일 있어?”
그녀는 어제부터 내내 류강현에 대한 생각을 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강현의 사무실에 당장 쳐들어가 도대체 검사 시절 무슨 짓을 어떻게 했길래 이런 소문이 도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 아침 몇 번이고 그의 방문 앞을 서성이다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가길 여러 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손톱만 한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다 오후가 돼서 접견을 나가는 강현의 뒷모습만 허무하게 바라보았다.
“……아뇨. 그냥, 뭐라고 하셨어요?”
“변호사 모임 말이야. 류강현 변호사랑 같이 가면 어떨까 하는데.”
“……아, 맞다……. 변호사 모임이 있었죠. 그게 언제죠?”
“이번 주 주말. 저녁 일곱 시쯤이었던가?”
이번 주 주말이면 강현과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변호사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세나에겐 그 모임이 무척 중요했지만, 그것을 잊고 있을 만큼 강현에게 빠져 있기도 했었다.
“까먹고 있었어요.”
“왜?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어?”
“아뇨. 아뇨. 다음으로 미루면 돼요. 그래서 류강현 변호사랑 같이 가자는 말씀이세요?”
“K 로펌 파트너 변호사니, 자격은 충분하지.”
자격이라. 만약 류강현이 정말 성(性)이든, 금전이든 대가를 받고 일을 하던 스폰서 검사이고, 위계로 눌러 후배 검사를 성추행했다면? 그래서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옷을 벗은 거라면? 과연 그에게 K 법무법인을 책임질 자격이 있을까?
“아빠. 우리 로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