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Dynamite2022.02.12.
“첫 데이트 때 주로 뭘 합니까?”
“…….”
뜬금없는 질문에 멍해진 것도 잠시 ‘뭐 인마?’하고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저보다 몇 살이나 어린 상관이지만, 어쨌든. 사석에서조차 ‘강현아.’라고 불러 본 적이 없는 데다, 제 밥벌이를 책임지고 있는 그에게 차마 욕을 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웬 데이트…….”
의아한 동시에 누군가 떠올랐다. 장철호가 K 로펌으로 이직을 결정하기 전, 사람을 관철하는데 냉정하기 짝이 없는 류강현이 답지 않게 칭찬한 사람. 그렇지 않아도 장철호는 기세나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확실히 일머리가 있고, 똑 부러졌다. 특히 무언가를 결정할 때 강단이 있어 장철호의 마음에도 쏙 들었던 변호사였다.
“설마…….”
거기다 요즘 들어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형성되는 중이었다. 어제 회식 자리에서도 그렇고, 남에게 관심 없는 류강현의 눈동자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장소가 바로 기세나 변호사의 얼굴이었다.
“기세나 변호사님과 데이트?”
강현이 무뚝뚝한 얼굴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드디어 국수 먹는 겁니까?”
“그 사람이 들으면 기겁할 말인 것 같은데.”
“두 분 다 혼기도 꽉 찼고, 같은 직종 종사자니 이해관계도 좋고, 결혼하시는 건 시간문제 같은데요?”
“결혼은 혼자서 한답니까?”
“하실 마음은 있으시고요?”
은근한 눈초리로 의중을 떠보았지만, 강현은 이렇다 할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생각이 없다는 답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검사 재직 시절 하루가 멀다고 선 자리가 들어오는데, 주선자의 면을 세워주기 위해 몇 번인가 나가서 점심만 딱 먹고 들어온 강현이었다. 어느 날은 하도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니 류 검사님, 왜 맞선을 꼭 평일 점심으로 약속을 잡는 겁니까? 주말에 뭐 하시고. 차도 좀 마시고, 술도 좀 마시고 그래야…….’
‘사람 파악하는데 한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마음에 들었으면 주말에 다시 보자고 했겠죠.’
차를 마시면 서로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어야 하는 것도 귀찮다고 하는 양반이었다. 그런 양반이 첫 데이트 때 뭘 하냐고 물어보는 것이면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장철호는 손에 쥔 종이를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 여자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순진한 후배에게 연애란 말이야, 하고 조언을 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 류강현은 순진과는 꽤 거리가 먼 남자였지만. 하나 확실한 건 제대로 된 연애는 해본 적 없는 놈이라는 것이다.
“첫 데이트라면 꽃이죠. 다발은 부담스러우니 장미꽃 한 송이를 딱! 꽃 싫어하는 여자 없-.”
“그 사람,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아- 그럼 돈으로 꽃을 만들어서. 돈 싫어하는 여자 없-.”
“모르긴 몰라도 저보다 더 많이 가졌을 것 같던데?”
하긴. 강남 서초 일대에서 내로라하는 이혼 전문변호사인 것도 있었지만, K 법무법인의 기장수 대표의 장녀로 이대로만 실적을 유지하면 차기 대표 자리까지 오를, 능력 있는 그녀였다.
“그럼 일단, 맛집. 아니다 맛집은 기다리고 이러니까, 호텔 뷔페로 가시죠.”
“뷔페요?”
“기세나 변호사님이 뭐 좋아하는지는 아세요?”
“대충. 고기를 좋아합니다. 해산물도 좋아하는 것 같던데. 회는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고……. 그런데 또 육회는 좋아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괜히 블로그 뒤져서 이상한 데 가시지 말고 뷔페를 가면 다 해결되는 거 아닙니까? 가서 각자 좋아하는 거 실컷 먹고. 여자는 배가 고프면 예민해진다고 하더라구요.”
“사람이 많은 곳은 제가 별로라. 주말에 뷔페는 아무래도 시끄러울 것 같은데.”
강현은 눈매를 잔뜩 좁힌 채 의자에 기대어 턱까지 괴고 고민에 잠겼다. 여자의 마음은 천 길 물속보다 알기 어렵다는데, 저 똑똑한 양반이 법만 가지고 놀아 봤지, 데이트 코스 하나 정하지 못함에 장철호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장 실장님은 형수님과 어땠습니까?”
장철호는 대학 시절 지금의 아내를 만나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한 지 벌써 11년 차였다. 강현의 질문에 첫 데이트라 할 게 있었나 싶어 그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때야 둘 다 학생 때라 가난하기도 했고, 뭐 끽해서 비디오방이나 대학가 근처 대폿집에서 술 한잔한 게 다였죠. 그러다 차가 끊기면 한 시간쯤 걸어서 바래다주기도 하고. 하루는 술에 취해서…….”
오랜만에 풋풋했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자 말문이 터진 장철호는 자신의 연애사를 구구절절 쏟아내기 시작했고, 강현은 그의 이야기를 삼십 분가량 더 들어야 했다.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뭔가 건질 게 있을까 싶어 묵묵히 경청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고, 소득은 제로였다.
“아내가 저 얼굴 하나 보고 좋아했거든요. 살면서 저처럼 잘생긴 남자는 본 적이 없다고. 하하하. 아무튼 그래서…….”
장철호의 이야기를 듣는 강현은 점점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그러다 그의 말에 심각한 오류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도대체 거울은 뒀다가 어디다 쓰는 걸까. 그의 아내가 시력이 나쁘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시력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부분을 지적하진 않았다. 다만,
“……장 실장님. 잠시만 실례 좀.”
저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11년 치 결혼생활까지 줄줄이 쏟아낼까, 강현은 울리지도 않은 핸드폰을 귓가로 가져대며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 M 호텔 레스토랑으로 들어간 세나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고 예약된 테이블에 앉았다. 고속버스터미널 인근의 호텔이라 차가 막힐 것을 고려해 조금 이른 시간에 사무실에서 출발했던 터였다. 그 덕에 약속 시간인 7시보다 이십 분이나 먼저 도착했다.
“커피 먼저 주시겠어요? 아메리카노로.”
종업원이 가져다준 커피를 홀짝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일이라 가족들보다는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 다정한 밀어를 속삭이는 이들 사이에서 덩그러니 혼자 있는 자신이 이방인 같다는 느낌이 들어 어색하게 웃었다.
“왜 여기서 보자고 했을까.”
오후 상담을 끝내고 가사전담팀 블로그에 상담 댓글을 남기고 있을 때였다. 지난번 급한 일로 점심을 사 주지 못해 미안했다는 말과 함께 오늘 시간 괜찮으면 저녁 같이 하자는 채성민의 문자를 받았다. 장소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여느 호텔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인가 싶었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디저트로 케이크가 나오고 그 속에 숨은 반지를 찾아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지난번 꽃다발도 그렇고. 코스요리가 나오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이라……. 어쩐지 부담스럽게 느껴져 목덜미를 슬쩍 쓸어내릴 때였다.
“미안, 내가 늦은 건가?”
다정한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막 도착한 채성민이 세나를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테이블로 한걸음에 다가온 그가 자연스럽게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맞은편에 앉았다.
“아뇨. 제가 좀 일찍 온 거예요.”
“샴페인 괜찮지?”
“아, 네.”
세나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그가 한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자주 오는 곳인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코스요리와 샴페인 한 병을 주문했다. 잠시 뒤 테이블에 올라온 샴페인은 돔 페리뇽 로제였다. 류강현이 K 법무법인의 파트너 변호사로 온 날, 세나가 호텔 방에서 눈물을 훔치며 혼자 마셨던 그 술이었다.
“이걸 선배랑 마시게 될 줄 몰랐는데.”
어쩐지 반가운 마음에 조금 전까지 부담스러운 분위기라 여겼던 생각이 깡그리 잊혀 버렸다.
“늦었지만,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채성민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잔을 부딪쳐왔다. ‘챙-’ 크리스털 잔의 경쾌한 울림과 옅은 핑크빛 액체가 찰랑댔다. 애피타이저부터 메인까지. 깨끗한 식기에, 플레이팅이 예쁜 음식에. 눈이 즐거웠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디저트가 올라와 있었다. 작은 접시에 어여쁘게 담긴 마카롱 두 조각과 입가심용 과일이었다. 세나는 케이크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둥근 조각을 반으로 잘라 입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혓바닥 위에서 솜사탕처럼 사르륵 표면이 녹아내리자, 캐러멜 같은 달콤함이 가득 번졌다.
‘확실히 너무 과해.’
세나가 마카롱의 흔적을 꼭꼭 씹어 삼키고 디저트용 포크를 테이블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우리 다음번엔 좀 편한 데서 먹어요.”
그녀는 다른 테이블에 들릴까, 속살거리는 목소리로 채성민에게 권했다.
“왜? 별로야?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 별로라기보다 음식 맛도 좋고 분위기도 좋은데, 선후배 사이로 이런 곳은 잘 안 오죠.”
“그래?”
“여자친구 생기면 오세요. 좋아할 거예요.”
행여라도 그가 무안해할까, 모처럼 다시 만나게 된 거 그를 오매불망 기다렸던 정희도 함께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덧붙였다. 성민은 잘게 웃으며 샴페인 병을 들었다. 그러고는 반쯤 남아있는 자신의 잔을 채웠다.
“여자친구라…….”
샴페인이 잔 주둥이까지 아슬아슬 거품이 차오르다 흘러넘쳤다.
“어어, 선배, 잔 넘쳐요.”
흘러넘친 거품이 성민의 손과 테이블을 적시자, 세나는 무릎 위에 올려둔 냅킨을 집어 성민의 손과 테이블을 닦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채성민은 슬그머니 세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우리가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어때?”
“……네?”
“남자, 여자로 말이야.”
갑작스러운 접촉에 손을 뺄 생각도 못 하자, 채성민은 깍지를 끼우며 빈틈없이 맞물려왔다. 채성민의 손에 남아있는 투명한 액체가 세나의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세나가 흠칫 어깨를 떨며,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서로 얽혀있었다. 마디 사이가 딱 붙은 게 어금니에 달라붙은 떨어지지 않는 마카롱의 잔해처럼 끈적한 접촉이었다. 어쩌다가 분위기가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일까. 식사하는 내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 게 전부였다. 간간이 끼어드는 추억담, 그리고 다시 일상. 그러다가 일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조언과 견해의 차이를 주고받았다. 순조롭게 흘러갔던 분위기라 그가 고백해올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나가 홉뜬 눈으로 멍하니 채성민에게 붙들린 손을 바라보다, 슬쩍 힘을 줘 빼내려고 했다. 그러자 채성민은 짧게 콧숨을 흘리며 더욱 힘을 줘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자신이 던진 말이 어떤 의미인지 쐐기를 박았다.
“네 말대로 선후배 사이에서 분위기 좋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샴페인을 마시진 않지. 고백이라도 할 게 아니라면.”
“…….”
예기치 못한 상황에 세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연이 닿을 거라 여겨본 적도 없는 두 남자였다. 류강현과 채성민. 두 사람이 며칠을 사이에 두고 세나에게 고백을 해왔다.
“지금 저 놀리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