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자고 갈래요?2022.02.08.
설마, 하고 강현이 픽 웃었다. 그가 웃자 세나도 따라 웃었다.
“집에 가자. 데려다줄게.”
“아. 집에 어떻게 가지?”
“차 타고 가지. 대리기사 불렀어.”
“차까진 어떻게 가지?”
“걸어서.”
그녀의 고개가 다시 양쪽으로 저어졌다. 회사까지 걸어서 십 분 남짓. 강현이 옆에서 부축하면 금방이었다. 다시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조금 어눌한 발음이지만 꼬박꼬박 대답도 곧잘 했고, 술에 취한 것치고는 의식도 분명했다. 그런데 왜 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는 것인지 강현은 의아했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업어줘?”
한 마디 내뱉어 봤는데, 갑자기 세나가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 입으로 두말하기 없기!”
그리고 강현이 미처 준비도 하기 전에 계단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강현은 그녀를 놓칠세라 다급히 허리를 세웠다. 튀어 오른 몸이 강현의 등판에 안착하자마자 세나는 그의 목덜미를 두 팔로 꽉 끌어안고는 허리에 다리를 둘렀다.
“이게, 지금. 떨어졌으면 어쩌려고 그래?”
당황스러운 상황에 어이가 없었지만, 매달린 이의 허벅지를 감싸 안정적으로 받쳐 들었다. 매미처럼 강현의 등에 찰싹 달라붙은 세나가 다리를 덜렁덜렁 앞뒤로 흔들었다. 허공에 하얀색 캔버스 운동화가 신나게 흔들렸다.
“우리 로펌에서 류강현한테 업힌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거예요. 그쵸?”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누구처럼 나를 이동 수단으로 쓰진 않지.”
꺄르르 아이처럼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 때문에 강현도 고개를 옅게 치며 웃고 말았다. 번화가 한복판에서 다 큰 처녀를 업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우습기도 했지만, 그 처녀가 기세나이기에 기꺼워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오늘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 것인지...... 이렇게나마 위로가 되면 된 건가 싶기도 하고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어리광은 오피스텔에 도착해서도 이어졌다. 주차장에서부터 집까지 강현은 세나를 업은 채로 이동했다. 그리고 기어이 침실까지 바닥에 발 한번 딛지 않고 당도했다. 강현은 침대 끄트머리에 조심스럽게 세나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곧장 허리를 숙여 그녀의 운동화를 벗겨주었다. 세나는 침대에 얌전히 앉아 제 앞에 무릎을 굽히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새삼 윤기가 흐르는 까만 머리칼이 부드러워 보였다. 저도 모르게 손으로 훔치고 싶을 만큼. 가느다란 손가락이 강현의 머리카락 사이로 미끄러져 들었다.
“선배.”
그가 고개를 들어 세나를 올려다보았다. 머리카락만큼이나 새카만 눈동자가 오롯이 저만을 바라보는 것이 이렇게 몸속 어딘가를 뜨겁게 만들 일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에 위로가 되고, 그의 눈길이 저를 살펴주는 것이 좋았다. 군말 없이 제 어리광을 다 받아주는 남자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을까. 이런 남자를 놓치면 일생일대의 행운을 놓치는 게 아닐까?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있잖아요…….”
“또 뭐가 필요해서 말꼬리를 흐릴까?”
“자고 갈래요?”
“…….”
강현의 눈썹 머리가 꿈틀거리고, 또렷하던 눈동자가 설핏 흔들렸다. 세나는 그의 미세한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지금 살짝 당황한 것 같은데?”
“기세나.”
“네.”
“술 많이 마셨어?”
“많이 마셨어요. 그런데 필름이 끊길 정도는 아냐. 그래도 라면은 못 끓여줘요.”
“농담하는 것 보니 멀쩡해 보이기는 하는데.”
강현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들었다. ‘자고 갈래요?’라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강현은 세나의 눈동자를 뚫어질 듯 들여다보았다. 이럴 때면 늘 먼저 고개를 돌리고 마는 그녀인데, 오늘따라 맞닿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 줄 알고?”
사나운 말투와는 다르게 강현의 눈빛에는 정염이 가득했다. 세나는 그 생각이 맞다는 듯 붉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반쯤 내리깔린 그녀의 눈매는 매혹적이었고, 그것은 강현의 깊숙한 저변의 욕망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술 취한 여잘 어떻게 해보겠다는 놈들은 죄다 어딘가 모자란 새끼일 거라 생각했는데.”
“…….”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대놓고 유혹하는데 안 넘어가는 새끼가 모자란 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
“그래서 어떤 모자란 새끼 할 거예요?”
“글쎄, 난 생각보다 신사적이지 않거든.”
툭, 던지듯 내뱉은 말을 끝으로 강현의 입술이 세나의 입술을 덮쳐왔다. 두 사람분의 무게가 실리자 매트리스가 아래로 푹 꺼졌다. 등 뒤를 받치는 포근함과 제 몸 위로 드리운 거대한 파도 같은 기운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저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시작부터 깊게 맞물린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숨을 쉬기 위해 비스듬히 기운 고개는 이내 커다란 손에 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고, 벌어진 입술 새로 촉촉이 젖은 숨결이 밀려들었다. 세나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혀드는 강인한 힘에 매달려 눈을 감았다.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 새로 햇살이 스며들어 눈두덩을 콕콕 찔렀다. 이놈의 세상은 왜 자는 사이 멸망하지 않은 것인지.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의 아침은 늘 고통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왜 순간의 즐거움에 매번 지고 마는 것일까. 세나는 뒷골을 바짝 땅기는 두통에 인상을 팍 쓰며 베갯잇에 볼을 비볐다. 실크 소재가 주는 부드러움에 느른한 숨을 뱉다, 뇌리에 꽂히는 기억에 두 눈을 번쩍 떴다.
“……!!”
어젯밤 집에 혼자 오지 않았다. 류강현이 저를 바래다주었고, 침대까지 데려다 앉혔고, 신발을 벗겨주었다. 그리고. 세나가 고개를 홱 돌려 옆자리를 확인했다. 가지런히 놓인 베개에는 그의 흔적이 지워져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세나는 강현의 숨결이 닿았던 목덜미가 화끈거려 손으로 더듬거려보았다.
“술에 취해 야한 꿈이라도 꾼 거야???”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입맞춤도 저를 고요히 내려다보는 까만 눈동자도. 그의 숨결이 닿았던 곳곳이. 자신은 신사가 아니라고 말하던 그의 탁한 목소리가 남아있는 술기운을 몰아냈다.
“모자란 새끼가 아니라더니.”
어젯밤 분명 키스를 시작으로 고조된 감정이 서로를 원했고, 격렬해진 상태로 몸까지 맞대었다. 둘 다 살갗이 닿기를 갈망했고, 피부에서 피부로 서로의 온도가 넘나들 순간을 기대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강현이 돌연 먼저 몸을 물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아랫입술을 짓이기는 그는 괴로운 듯 미간 사이를 찌푸리기까지 했다. 세나가 두 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감쌌고, 제 쪽으로 끌어당겨 이마를 맞대었다. 다시 입술을 맞물리기 위해 고개를 비틀었을 때, 강현은 자조가 가득한 혼잣말을 읊조렸다.
“이러다 정말로 널 어떻게 할지 모르겠는데, 더는 못 참을 것 같기도 하고.”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네가 다음날 후회하면 그건 그것대로 상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그에게 세나는 대답 대신 재차 입술을 들이밀었다. 그가 못 이기는 척 입술을 받아들였지만, 거기까지였다. 자꾸만 품을 파고드는 그녀를 밀어내지도 못하면서 조급한 숨을 내쉴 뿐 더는 건드리지 않았다. 세나는 어젯밤 일을 떠올리며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나 진짜 괜찮았는데. 후회도 안 할 거였고.”
들숨과 날숨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맞댄 채, 강현은 그렇게 세나를 꼭 끌어안아 주는 거로 날밤을 새웠다. 신사와 모자란 새끼의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세나가 잠이 드는 순간까지, 가만가만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고, 종종 이마와 눈두덩에 입술을 쪽쪽, 내려주었다. 내기에서 이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강현은 극강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세나는 협탁에 놓인 캘린더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어느 한 숫자 위를 더듬었다. 그와의 데이트가 있는 이번 주 토요일. 이제 그만 그의 고백에 대답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10평 남짓한 집무실 안에는 팔랑팔랑 종이 넘기는 소리가 가득했다. 엄지와 검지에 골무를 낀 장철호 실장은 회의 테이블 양측에 하얀 종이 탑을 세워두고 고개를 파묻다시피 하고 있었다. 새하얀 종이엔 휴먼명조체의 검은 글자가 빼곡했다. 침침한 눈을 끔뻑, 파란 골무의 평평한 면으로 A4용지의 모서리를 꾹 찍어 넘겼다. 그나마 읽기가 편한 글씨체라는데, 이것도 계속 보고 있으니 피곤한 건 매한가지였다. 두 시간째 서류들과 씨름하느라 목도 뻐근하고 눈도 뻐근하고. 4g도 안 되는 종이는 왜 또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 다음번엔 함초롱바탕체를 써볼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다 상석에 앉아 저와 똑같이 서류를 들여다보는 로봇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움직임이라고는 몇십 초마다 깜빡거리는 눈꺼풀과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는 손뿐이었다. 오른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붉은색 사인펜이 삐끗, 불규칙한 회전을 그릴 때야 저놈도 로봇이 아니라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괜한 짓을 했어. 아이고. 저런 인간인 걸 진작에 알았는데…….’
다른 변호사들은 이틀 동안 휴가를 받았는데, 모시는 상관 놈이 휴가도 없이 제 자리를 꿰차고 저리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아 결국 휴가를 반납하고 출근 도장을 찍었다. 빈말이라도 ‘괜찮으니 들어가라.’ 할 줄 알았던 류강현은 장철호를 보자마자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누군가의 눈엔 그 미소가 근사할지 몰라도, 장철호의 눈엔 군대에서나 볼법한 악마 교관의 미소 같았다. 그리고 지금 이 종이 탑 사이에 저를 끌어다 앉혀두고 어디 도망도 못 가게 옆에 딱 붙어 함께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오늘도 제시간에 퇴근하긴 텄네, 텄어.’
대형 로펌의 변호사가 되면 좀 달라졌을까 했는데, 일 중독도 저런 일 중독이 없다.
‘저러니 아직도 장가를 못 갔지.’
검사 때도 악명이 높았던 류강현이었다. 장철호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장 실장님.”
제 욕을 한 건 또 귀신같이 알아서 저를 부르나, 뜨끔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드니 세상 근심을 얼굴로 짊어진 듯 심각한 표정이었다.
“왜, 뭐가 잘 안 풀리십니까?”
장철호를 불러놓고 정작 강현에게선 한참이나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살며시 찌푸려진 미간을 손끝으로 긁적였다. 도대체 뭐 때문에 저러나 싶어 그가 들고 있는 서류로 시선을 내렸는데. 그의 손에 들린 서류가 조금 이상했다.
“류 변호사님. 여태껏 그거 읽고 있었습니까?”
분명 한 시간 전에 봤던 그 페이지 그대로에 멈춰있었다. 머리말과 목차 개요가 적혀있는. 아니, 이 양반이 지금 뭐 하는 짓인가. 한 시간 동안 자신이 검토한 서류만 해도 몇 개인데. 울컥한 마음이 고스란히 표정으로 드러났다.
“음……. 그게 말입니다.”
강현은 아랑곳없이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더니 그 위에 턱을 괴었다. 담배를 태우는 것처럼 쓰읍, 숨을 들이켜고는 한껏 짙어진 검은 눈동자를 마주쳐왔다. 고민의 색이 역력한 모습과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 아무래도 뭔가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다 싶어 장철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