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2022.02.05.
“일은 무슨. 아무 일도 없거든요? 그리고 나 거의 다 왔어요.”
뭔 줄 알고 온대. 회사랑 거리도 고작 몇백 미터 안 되는 곳인데,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다고. 차분하고 깊이감이 있는 목소리를 들으니 더 마음이 울렁거렸다.
-“…….”
“진짠데. 오 분. 오 분이면 도착합니다. 나 배고파 죽을 것 같아요. 내 고기는 사수했어요?”
-“새로 시켜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기나 해. 칠락팔락 뛰어오다 넘어지지 말고.”
“모델이 워킹하는 것처럼 도도하게 등장할 거니까 딱 기다려요.”
그가 더 말을 붙일까, 얼른 전화를 끊은 세나가 차 뒤에 쪼그려 앉아 긴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이 꼴 저 꼴 다 보인 사이라고 해도 오늘 일 만큼은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남들이 다 안다고 해도, 강현에게만큼은 사랑 많이 받고 귀하게 자란 여자이고 싶었다. 강현이 가게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세나가 숨겼던 몸을 일으켰다. 혹시나 얼굴에 남아 있는 흔적이 있을까, 핸드폰 거울 앱을 켜고 눈가를 들여다보았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것 말고는 평소와 같았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고 예약된 객실로 들어서자 맥주잔을 머리 위로 들고 있던 K 로펌의 변호사들이 일제히 세나를 쳐다보았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환한 미소를 준비하고 있던 세나가 테이블 위에 놓인 아무 잔이나 들고 외쳤다.
“잠깐, 스탑! 저도 끼워 줘요!”
“기 변호사님이 빠지면 안 되지! 제일 큰 액수를 걸었는데.”
박 변호사가 벌떡 일어나 그녀의 잔에 거품 가득한 맥주를 채워주었고, 잠시 멈추었던 맥주잔들이 다시 한곳에 모여 출렁였다. 꼴깍꼴깍. 시원한 목 넘김 소리가 다음을 채웠고, 시원한 맥주의 맛은 탄성이 되어 터졌다.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강현이 그녀를 살피듯 바라보았지만, 세나는 그저 다 비운 잔을 아무렇지 않게 흔들어 보였다.
“기 변호사님 이쪽으로 오세요. 류 변호사님이 여기 자리 비워두라 하셨거든요.”
상석에 앉은 강현의 오른쪽 자리였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주인공의 옆자리를 탐하겠습니다.”
세나가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거는 동안 강현의 시선이 줄곧 따라붙었다. 세나는 일부러 더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리를 잡고 앉아 빈 술잔을 제조를 담당하고 있는 박 변호사에게 건네며 엄지손가락까지 척 들어 보였다.
“기세나.”
강현이 조용한 목소리로 세나를 불렀다. 아무래도 그녀의 상태가 마음에 걸렸다.
“네? 왜요?”
그러나 통화할 때보다 더 활기가 넘치는 목소리에 눈썹만 슬쩍 들추었다. 고집쟁이 그녀가 끝끝내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 신경이 쓰였지만, 이게 기세나식 방어기제인가 보다 여기며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먹고 싶은 거 시켜. 술을 마시려면 배부터 채워야지.”
메뉴판을 건네받은 그녀는 두 눈을 초롱초롱 반짝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곧이어 세나의 입에서 소고기의 다양한 부위가 줄줄줄, 주문처럼 쏟아졌다. 승리를 만끽하기 위해 열린 회식은 어느 때보다 시끌벅적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장철호 실장은 오늘 재판에서 있던 일부터 시작해, 류강현이 검사 시절 자신과 함께 해결했던 사건들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말솜씨가 워낙 좋은 사람이라 듣는 사람들도 덩달아 빠져들었다.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 변호사들은 내일이 없는 듯 먹고 마셔대느라 고삐가 풀리기 직전이었다. 세나 또한 그들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며 잔이 비워질 새도 없이 연거푸 마시느라 반쯤 눈이 풀린 상태였다.
“근데, 왜 검사 옷 벗으신 겁니까?”
그러다 누구인지 모를 목소리가 취기에 잔뜩 젖어 질문을 던졌다. 모두가 궁금해했지만, 그 누구도 류강현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없었다. 왁자지껄하던 소음이 일순간에 뚝 멎었다. 술기운에 총기를 잃은 눈들이 상석에 자리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소주잔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던 강현이 무심히 술을 삼키고 잔을 내려놓았다. 실컷 떠들어대던 장철호 실장은 돌연 강현의 상태를 살피며 잔을 들이켰다. 정작 질문을 받은 당사자의 얼굴에선 불쾌한 감정도, 당황스러운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검사들이 회식할 때 뭘 먹는 줄 아십니까?”
강현의 한마디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번. 소주에 삼겹살. 곱창. 그나마 좀 실적이 좋을 때는 미국산 소갈비.”
강현은 젓가락을 들어 불판 위에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접시로 가져와 파무침 위에 올려두고는 초록색 술병을 들었다. 찰랑거릴 만큼 그의 잔을 채운 술병은 다른 사람들의 비워진 잔들로 향했다.
“변호사가 되니, 값비싼 한우를 먹더란 말이죠.”
그가 사람들의 빈 잔을 채워주며 무덤덤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옷 벗을 사유 충분히 되지 않겠습니까? 똑같이 법 가지고 노는 건데.”
술병을 내려놓은 그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에 걸린 한 쌍의 젓가락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파채로 감싼 고기가 입안으로 깔끔하게 쏙, 모습을 감췄다. 굳게 다물린 입술은 제자리에, 턱만 조금 움직일 뿐. 먹는 모습 자체는 정갈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압박감이 느껴졌다. 허공에 잔을 들고 있던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대로 멈춰있었다. 움직임이 없는 세계에서 홀로 자유로운 사람은 강현뿐이었다. 그의 울대가 꿀렁거리며 씹혀진 고깃덩어리를 소리도 없이 삼켰다. 강현은 제 눈치를 보는 사람들을 향해 건배하듯 소주잔을 슬쩍 들어 올린 뒤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입가엔 미소를 드리웠는데, 눈매가 워낙 사나워 흉흉하기까지 했다. 사내에 도는 소문을 이곳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모를 리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세나가 저도 모르게 히끅,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람들 사이에 어색한 웃음이 흘렀고, 각자의 잔을 비우며 강현에게 머물렀던 시선을 돌렸다. 분위기는 다시 전처럼 시끌벅적해졌다.
“괜찮아요?”
세나가 강현에게만 들리게 조용히 물었다.
“뭐가?”
강현은 그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세나는 입술을 한껏 오므린 채 눈만 깜박거렸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지, 아니면 조금 전의 말이 진심인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한잔하시죠.”
맞은편의 장철호 실장이 강현의 잔을 채웠다. 그러고는 세나를 힐끔 보더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잔은 비워지는 동시에 다시 차올랐다. 우리네 인생도 금방 비워지고, 금방 차오르면 좋을 텐데. 아픈 기억은 잊으려 노력해도 쉽지 않았고, 좋은 기억은 어느 순간 돌아보면 잊혀있었다. 쉬운 거 하나 없는 삶을 아등바등 살아가다 홀로 걸어온 시간을 돌아보면 아쉬움만 가득했다. 그때 이랬더라면. 그때 이러지 않았더라면. 이미 열기가 빠진 불판엔, 다 식어버린 고기 몇 점이 남아있었다.
“하아…….”
세나는 숨을 쉴 때마다 자신의 숨에 가득 배어있는 알코올 향 때문에 머리가 팽글팽글 돌 지경이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그녀가 다른 한 손으론 맥주잔 표면에 어린 물기를 훔쳤다. 불판에 남아있던 불이 제 볼로 옮겨왔나, 얼굴이 후끈거려 차갑게 식은 물방울을 손바닥에 묻혀 얼굴로 가져갔다. 저 혼자만 이렇게 취한 것일까, 세나는 턱을 괸 채로 고개를 돌려 생존자를 확인했다. 시끌벅적했던 사람들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취기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 채로. 어떤 이는 지금 자기가 든 잔이 술인지 물인지도 구분 못 했고, 어떤 이는 재킷을 이불 삼아 단잠을 이루고 있었다.
“전멸이네……. 킥킥.”
몇 시간 동안 이어진 회식은 변호사의 품위고 나발이고. 그나마 남은 알량한 의식을 벗 삼아 네발로 기어 다니지만 않으면 된다, 싶은 수준으로 만들었다. 힘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이번에는 왼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강현이 앉은 방향이었다. 그러다 세나의 고개가 손바닥 위에서 궤도를 이탈했다. 미끄러진 머리가 테이블에 쿵, 떨어지기 직전, 그녀의 이마 아래 커다란 손바닥이 깔렸다.
“너도 전멸한 이들 중 하나 같은데.”
평소에는 제일 꼭대기에 무게감도 모르고 꼿꼿이 잘 들고 다닌 것 같은데, 술만 마셨다 하면 왜 이렇게 무거워지는 건지. 세나가 머리를 들기 위해 낑낑거리자, 손바닥의 주인이 바람 가득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으음……. 웃지 말고. 도와줘요.”
“잘한다. 잘해.”
강현이 힘이 풀린 세나의 팔을 세워 테이블에 고정해주며 그 위에 그녀의 턱을 다시 올려두었다.
“이제야, 좀 앞이 보이네.”
“눈부터 뜨고 말해.”
저는 이렇게 머리도 무겁고 눈꺼풀도 무거운데. 왜 자꾸 웃지? 뭐가 웃긴가? 피식피식 새는 소리가 귓바퀴에 고였다 사라졌다. 세나는 꾹 닫힌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 위해 이맛살에 힘을 주었다. 겨우 떠진 눈앞엔 아주 멀쩡한 상태로 저를 바라보는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
“허, 왜 선배만, 혼자 멀쩡하지? 다 같이 마신 거, 아닌가?”
게슴츠레하게 뜬 눈 사이 오뚝한 콧잔등에 미세한 주름이 팍 잡혔다.
“억울해.”
“뭐가 그렇게 억울한데?”
“다 취했는데, 선배만, 너무, 멀쩡해. 더 먹여야겠어. 선배가 잘생겨 보이잖아.”
“언제는 얼굴이 최대 장점이라며?”
“그건, 그거는. 음. 맞는 말이지. 선배의 장점은 얼굴이지……. 부모님이, 좋아하겠다. 아들이 잘생겨서. 나도 예뻐, 근데, 음……, 아, 이건 말하면 안 돼.”
혀가 꼬여 늘어지는 발음으로 주저리주저리 읊조리던 세나가 한 손으로 느릿하게 제 입을 톡톡 두드렸다. 강현이 혀를 낮게 차며 장철호 실장의 어깨를 툭 쳤다.
“장 실장님. 다들 취한 것 같으니 이제 슬슬 마무리하시죠.”
“네, 그렇게 하시죠.”
그나마 덜 취한 장철호 실장이 손뼉을 부딪쳐 사람들을 깨웠다.
“변호사님들. 철수! 철수합시다! 잠은 집에 가서 주무시고.”
1차부터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린 집단은 2차 3차로 잡아두었던 계획들을 철회해야 했다. 짝! 짝! 찰진 소리가 방 안을 울리자 고개를 떨구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비틀한 모양새가 흡사 주술에 걸려 영혼을 잃어버린 인형 같았다. 조그만 명품 가방값을 술값으로 계산하고 나온 강현은 일렬종대로 고깃집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짙은 눈썹을 움찔거렸다.
“뭡니까?”
비척비척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사람들이 헤실헤실 웃으며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하고 나름 깍듯이 인사를 했다. 저마다 강현을 향한 나름의 존경과 신뢰가 담겨있는 인사였다.
“변호사님들도 수고하셨습니다. 일정이 없는 변호사님들은 이틀 동안 휴가라 생각하고 푹 쉬시고, 다른 일정이 있으신 분들은 아쉽지만, 다음번에 휴가서 제출하면 그때 사용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그가 마무리 인사를 하자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를 찾아 흩어졌다. 장철호 실장을 끝으로 다 떠나보낸 강현이 검지로 미간 사이를 긁적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가게 앞 계단 구석에 쪼그려 앉아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기세나가 있었다. 강현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녀의 얼굴이 바닥을 향해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속 안 좋아?”
세나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고기가 부족한 건가?”
그녀가 다시 한번 고개를 양쪽으로 젓더니 한숨을 폭 내쉬었다.
“춤을 못 춰서 아쉬워?”
장난스럽게 물어온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