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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난 엄마 없는데 (62/120)

62화. 난 엄마 없는데202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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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질 무렵 강현이 다시 세나의 방을 찾았다.

16551861962921.jpg“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어?”

세나는 몇 시간 전 그가 제 방을 나서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16551861962921.jpg“저녁에 회식할 것 같은데, 같이 갈까?”

1655186196293.jpg“안 피곤해요?”

16551861962921.jpg“피곤하긴 한데 그래도 날이 날이니까.”

1655186196293.jpg“봐서요. 내가 끼긴 좀 그렇지 않아요?”

16551861962921.jpg“내가 이긴다에 십만 원이나 건 누군가를 빼놓을 수 없지.”

1655186196293.jpg“일단 상황 좀 보고요. 빨리 가봐요. 팀원들이 주인공 기다리느라 목 빠지겠네.”

  그와 동시에 그의 품에 안겨 심장이 콩닥콩닥했다 상황도 떠올랐다. 얼굴에 열이 살짝 올라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별거도 아닌 서류를 들여다보며 바쁜 척 마우스의 휠을 굴렸다.

1655186196293.jpg“나 조금 바쁜데…….”

16551861962921.jpg“안 가면 후회할 텐데?”

1655186196293.jpg“메뉴가 뭔데요?”

세나가 관심 없는 척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16551861962921.jpg“고기 애호가인 기세나가 가장 선호하는 한우.”

무심함을 가장한 것이 우습게도 한우라는 말에 세나는 입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강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입꼬리를 올렸다. 회식이니 먼 장소는 아니겠지 싶어 근처 고깃집을 머릿속으로 검색하다 한 집을 떠올렸다.

1655186196293.jpg“회사 뒤편 횡성한우 집은 아니죠?”

화로에 한 점씩 구워 트러플 소금에 톡, 입 안에 넣는 순간 사르륵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는 전설의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당일 예약 불가에 워낙 값이 비싼 터라 회식으로는 가지 않는 곳이지만, 오늘은 그저 단순히 친목을 도모하는 회식은 아니기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16551861962921.jpg“박 변호사가 한 달 전부터 예약했다고 하더군.”

1655186196293.jpg“아, 안 돼! 나 무조건 참석! 근데, 한 삼십 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먼저 가 계세요.”

16551861962921.jpg“기다려 줘?”

1655186196293.jpg“아뇨. 선배는 거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16551861962921.jpg“……?”

1655186196293.jpg“제 몫의 고기를 사수하고 계세요. 특히 박 변호사로부터. 고기 앞에 유일한 제 숙적이에요.”

특명을 내리는 사령관이 된 세나가 곧장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타다다다닥. 타자를 두드리는 그녀의 손가락이 확연하게 빨라졌다.

16551861962921.jpg“고기가 라이벌이 될 줄은 몰랐는데…….”

그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 세나는 결의에 찬 모습으로 노트북 화면에 집중했다. 강현은 더는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져 주었다. 정확히 30분 후. 세나가 컨트롤 키와 S 키를 함께 누른 뒤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배 속에서도 한우를 대령하라, 꼬르륵 아우성이었다. 세나가 겉옷을 껴입고 자신의 배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1655186196293.jpg“조금만 참아. 내가 오늘 호강시켜줄게.”

오늘은 그냥 호강이 아니라, 진수성찬이 될 거란다. 모든 고기가 모두 옳다지만, 제 돈 내고 먹는 고기보다는 남이 사주는 고기가 더욱 맛있는 법이었다. 그것이 미국산이 아니고 국내산 한우라면 더더욱. 실실 풀린 입꼬리를 감출 생각도 못 하고 방을 나서던 세나가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스터드가 촘촘히 박혀 있는 보라색 스틸레토 힐이었다.

1655186196293.jpg“음…….”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니 술이 빠질 리는 없을 테고, 입안 가득 번지는 육즙에 술이 꿀떡꿀떡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1655186196293.jpg“갈아신고 가야겠다.”

세나는 1층 로비가 아닌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 트렁크를 열었다. 스포츠카의 작은 트렁크 안엔 여벌의 블라우스와 슈트, 그리고 신발이 들어있었다. 뭘 신을까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하얀색 캔버스로 갈아신고 한결 편안해진 발바닥으로 아스팔트를 디디며 로비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시야의 끄트머리에 일렁이는 형체가 걸렸다.

16551862017862.jpg“세나야.”

퍽 오래전에 저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알았다. 십몇 년쯤 전이었나…….

16551862017862.jpg“오랜만이네.”

그리워한 적 없는 목소리인데도, 어째서 잊히지도 않는 건지. 고작 이름을 한번 불린 것에 발이 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 멈춰 섰고, 들떴던 기분이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하게 식었다.

16551862017862.jpg“엄마야.”

누군가에겐 뭉클한 그 이름은 세나의 입가에 만연했던 미소마저 앗아갔다.

1655186196293.jpg“하……. 엄마…….”

버석거리는 웃음이 입술을 뚫고 새어 나왔다. 뻣뻣하게 굳은 혀를 굴려 ‘엄마’라는 단어를 읊조렸다. 어찌나 어색한지, 형체도 없는 소리는 가시가 되어 목구멍에 턱 걸렸다. 먹먹한 게 아니었다. 짜증이었다. 세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억지로 발을 놀렸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위층으로 올라간 엘리베이터가 다시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오는 동안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16551862017862.jpg“세나야. 엄마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도 안 하니?”

1655186196293.jpg“…….”

16551862017862.jpg“엄마 못 알아보겠어? 엄마는 세나 한눈에 알아보겠는데. 많이 예뻐졌네.”

1655186196293.jpg“…….”

16551862017862.jpg“엄마랑 잠깐 얘기 좀 하자.”

엄마, 엄마, 엄마. 예고도 없이 나타난 여자는 세나에게 자꾸만 엄마라는 단어를 상기시켰다. 마치 그 단어가 가진 힘을 과시하는 듯. 그 단어의 무게는 세나의 마음에도 똑같이 쌓였다. 세나는 저를 찾아온 여자에게 어떤 반응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보고도 못 본 척, 들리지 않는 척, 초조한 마음으로 계기판을 응시했다. 그러나 10층에 멈춰 선 엘리베이터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나는 자꾸만 일그러지는 표정을 지우기 위해 주먹을 말아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러는 사이 엄마라는 여자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슬쩍 잡았다. 화들짝 놀란 세나가 탁, 여자의 손을 쳐냈다.

1655186196293.jpg“무슨 짓이에요?”

날카롭게 휘어진 눈썹이 가감 없이 제 기분을 드러냈다. 여자와 닿았던 부위를 재킷에 스윽 닦아내며 한 발짝 물러섰다. 세나는 그 어떤 호칭으로도 그 여자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저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게 흘러가지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잊히지 않는 목소리처럼, 그 여자의 이름 역시 태어날 때부터 머리에 박혀 잊히질 않았다.

1655186196293.jpg“이연화 씨.”

이름을 불린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 역시 자신의 딸이 반갑게 맞아줄 거라 여기진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날을 세울지는 몰랐던 터였다. 세나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불쾌한 감정이 실렸다.

1655186196293.jpg“엄마라뇨. 저 엄마 없어요.”

16551862017862.jpg“엄마가 없긴 왜 없어? 네 그 예쁜 얼굴 누구한테 물려받았는데?”

5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여자는 여전히 예쁘고 젊어 보였다. 다만 짙은 화장으로 감춰둔 얼굴 너머의 이면을 세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독하리만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던 여자.

1655186196293.jpg“아, 어릴 적 여자로서의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다고 젊은 남자 손 잡고 떠났던 한 여자는 알죠.”

세나의 냉랭한 반응이 이어졌다. 그러자 오랜만에 제 딸을 찾아온 여자가 연출하던 애틋하고 아련한 분위기는 깡그리 모습을 감췄다.

16551862017862.jpg“엄마한테 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

1655186196293.jpg“그 사람은 엄마라 불리는 것에 넌덜머리 쳤는데, 이제 와서 엄마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네요.”

16551862017862.jpg“그땐 엄마도 어렸잖니? 널 낳고, 키우는데 내 시간을 다 쏟아붓는 게 아깝다고 생각했어. 아직 젊고 창창한데, 집구석에 박혀서 대화도 통하지 않는 애만 키운다는 게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지 네가 알 리도 없었겠지.”

1655186196293.jpg“말은 바로 하셔야죠. 집구석에 처박혀 있던 적. 있긴 해요?”

16551862017862.jpg“내가 못 해준 건 또 뭐가 있니? 넌 내가 없었으면 태어나지도 못했어. 부잣집 딸로 예쁘게 낳아줬잖아. 다른 사람보다 더 잘난 인생 살게 해줬으면 된 거 아니니?”

그래. 맞는 말이다. 엄마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16551862017862.jpg“나로서 해야 할 도리는 다했어. 그리고 내가 내 인생 찾아 떠나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한 일인 거니? 오랜만에 만난 딸한테 비난을 받아야 할 만큼?”

1655186196293.jpg“십억.”

16551862017862.jpg“뭐?”

1655186196293.jpg“아버지에게 양육권, 친권 싹 다 넘기는 조건으로 받은 돈이라죠? 날 낳아준 대가로 돈 받았고 팔아치웠으면 ‘엄마’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면 안 되지. 당신 스스로가 버린 거잖아! 그 이름!”

16551862017862.jpg“네가 그걸 어떻게-.”

세나의 일침에 여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땡,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16551862017862.jpg“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디든 가서 얘기 좀 하자. 엄마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줄게. 네게 할 말이 있어 온 거야.”

차가운 숨이 코웃음이 되어 짧게 터졌다.

1655186196293.jpg“난 없는데.”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탄 세나가 양쪽으로 팔을 뻗어 개방된 문을 막아섰다. 뒤따라 올라타려던 여자가 무슨 짓이냐 눈을 치켜떴다.

1655186196293.jpg“꺼져요. 행여라도 다시 찾아올 생각 꿈도 꾸지 말고. 당신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던 적도, 당신 얼굴 그리워한 적도 없어. 당신이란 사람, 내 인생에서 아웃된 지 아주 오래니까.”

세나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맞물릴 때까지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로비 층에 내려 회전문을 통과한 다음에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새빨개진 눈시울이 바들바들 떨렸다. 한참을 부릅뜨고 있던 눈이 시렸는지 기다란 속눈썹에 물기가 맺혔다. 슬퍼서도, 화가 나서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감정이 소모됐을 리도 없다. 이것은 그저 눈물샘이 어떠한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받아 나타나는 생리적인 현상일 뿐이다. 세나가 손끝으로 가볍게 눈가를 닦아내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지하 주차장에 있는 동안 강현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16551861962921.jpg[왜 안 와? 아직 일이 많이 남았나?]

신호가 몇 번 울리기도 전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너머는 들뜸이 가득한 목소리들로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세나의 귀엔 오로지 강현의 목소리만 들렸다.

1655186196293.jpg“선배.”

16551861962921.jpg-“응.”

제 부름에 ‘응.’하고 짧게 대꾸하는 대답에, 왜 이렇게 안심이 되는 것일까. 낮은 울림이 선선한 바람 소리를 닮았다. 찐득찐득 달라붙던 불순물들이 삽시간에 바람에 쓸려 사라졌다.

1655186196293.jpg“선배…….”

16551861962921.jpg-“응. 듣고 있어. 말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마치 토라진 아이를 달래듯 다정하기까지 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았다. 잔뜩 구겨졌던 마음이 다림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펴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신기했다.

1655186196293.jpg“나 오늘 술 엄청 많이 마실 거예요.”

진흙을 잔뜩 묻힌 신발처럼 무겁기만 하던 발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타닥타닥, 보도블록을 딛는 걸음에 흥이 올랐다.

1655186196293.jpg“잔뜩 먹고, 마시고, 완전히 취해서 길거리에서 춤도 출 거야.”

16551861962921.jpg-“재밌는 구경 하겠네. 기념 영상이라도 남겨줘?”

놀리는 듯한 어조에 달라붙은 다정한 웃음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의 나직한 웃음소리를, 감미로운 음악처럼 자꾸만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재잘거림을 멈출 수 없었다.

1655186196293.jpg“그래요. 영상도 찍고 맘껏 웃어요. 술 취한 사람한테 누가 뭐라 그러겠어. 내가 취할 정도면 거기 있는 사람도 다 취했을 거야. 그럼 다 같이 추는 거지 뭐.”

16551861962921.jpg-“수치심은 내 몫이다. 이거지? 그 전에 도망가야겠는데.”

1655186196293.jpg“안 돼. 끝까지 함께 해야 해. 그리고 마지막엔 선배가 나 집까지 좀 바래다줘요.”

16551861962921.jpg-“…….”

1655186196293.jpg“왜 말이 없어요? 내가 길거리에서 진짜 막춤이라도 출까 봐? 벌써 창피한 거예요?”

16551861962921.jpg-“기세나.”

1655186196293.jpg“그럼 살짝만 흔들게요. 클럽에 온 것처럼. 부비부비하자고 안 할 테니까 걱정 마요.”

코너를 돌자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가게 앞에 나와 전화를 받고 있는 강현도. 반가움에 큰소리로 그를 부르려 한 손을 드는데 조용하던 수화음 너머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파고들었다.

16551861962921.jpg-“너 무슨 일 있지?”

발걸음과 함께 숨이 털컥 멎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평소와 다르지 않게 행동했다 생각했는데.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에 울컥, 감정이 솟구쳤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듯 멀리서 보이는 강현의 얼굴에 걱정이 어려있었다. 상대로부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가 귓가에 댄 핸드폰을 고쳐잡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세나는 그에게 들킬세라 길목에 주차된 차 뒤에 몸을 숨겼다.

16551861962921.jpg-“지금 어디야? 내가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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