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먼저 안아준 게 누군데?2022.01.29.
“그래? 그럼 점심 누구랑 먹어?”
별다른 약속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데, 내선 전화가 울렸다. 세나는 채성민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데스크로 가 전화를 받았다. K 법무법인 계약 관리팀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변호사님. 지난번 가사전담팀이 수임한 사건 계약서 말인데요.”
“네. 어떤 거요?”
-“오웰 그룹 건이요.”
“아아. 네. 그게 왜요?”
-“계약서 아직 안 주셔서, 확인차 전화 드렸습니다.”
“제가 안 드렸어요? 아, 미안해요. 깜빡했나 봐요. 찾아서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첫 번째 서랍을 열어 개인 서류가 담긴 클리어 파일들을 꺼냈다. 그중 제일 마지막 파일에서 오웰 그룹 계약서를 발견한 세나가 콧잔등을 살짝 찌푸렸다. 찾은 파일을 손에 들고 책상에 꺼내놓은 파일들을 대충 정리해 서랍 속에 다시 넣었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채성민에게 다시 양해를 구했다.
“성민 선배. 나 잠깐 관리팀에 다녀와야겠어요. 이것만 넘기고 점심 같이 먹어요. 대신 밥은 제가 살게요.”
“괜찮아. 얌전히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다녀와.”
관리팀에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통에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 세나는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제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화장실이라도 간 걸까, 핸드폰을 확인하자 그로부터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미안. 갑자기 일정이 변경돼서 가봐야겠다. 점심은 다음에 하자.]
인사도 없이 서둘러 떠나야 할 만큼 급한 일이었을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다 ‘그래요. 다음에 봐요.’라는 짧은 답신만 보냈다.
*** 느지막한 오후 가사전담팀 회의실에서 세 명의 변호사가 머리를 맞댔다. 100억짜리 이혼 소송. 서로가 이혼하는 데는 합의했지만, 재산분할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평범한 집안의 남자가 재벌 2세인 여자를 만나 결혼까지 한 이례적인 케이스로 그는 ‘남자판 신데렐라’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다. 사람들은 부잣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그를 몹시도 부러워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상류층의 세계에 발을 들인 남자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백조들이 노는 호수의 미운 오리 새끼였다.
“한 변, 이 부분을 재산분할 대상으로 보긴 힘들지 않을까?”
“으음…….”
재산분할 전문가인 한여진은 골치가 아픈지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재벌의 이혼 소송이 힘든 이유는 투자자산이 많기 때문이었다. 고정자산이야 대부분 상속재산이기에 재산분할에 포함되지 않는다지만, 투자자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치가 상승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기여도를 가늠하기 몹시 까다로웠다. K 법무법인의 의뢰인은 재벌 2세인 아내 측이었다.
“유동자산은 혼인 기간에 비례해서 어느 정도 분할해줄 의향이 있는데, 아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바라는 건 욕심이지.”
“저쪽에서도 이게 재산분할이 가능할 거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런데도 자꾸만 걸고 넘어진다는 건 바라는 다른 게 있다는 것 같은데.”
세나가 남편 측 변호인이 보내온 합의제안서를 읽는 동안 이효원과 한여진이 대화를 나눴다.
“어느 쪽이든 유책 사유가 있으면 수월할 텐데, 그런 게 없네요?”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집안 반대 무릅쓰고 결혼했는데, 살다 보니 그게 아닌 거지. 그래서 옛말에 결혼은 집안끼리 격이 맞아야 하는 거라고 했어.”
“에이, 요즘 시대에 그런 말이 어딨어요?”
“어머. 얘 좀 봐. 당장 너만 해도 봐봐. 귀한 딸내미 공부시켜 변호사 만들어놨는데, 네가 어디서 변변찮은 놈 데려와서 결혼한다고 해봐. 부모님이 좋다고 허락해 주시겠다.”
“저희 부모님은 안 그래요. 성실하고 사람만 괜찮으면 다 괜찮다고 했어요.”
“아이고 효원아. 아직 세상 물정을 그렇게 몰라서 어쩌려고 그래. 성실한데 손대는 것마다 족족 망하고, 사람은 괜찮은데 너무 괜찮아서 허구한 날 뒤통수나 맞고 다니는 놈이면 사랑이고 뭐고 그냥 머리털 다 뽑고 싶어질 거다.”
한여진은 아직 결혼과 거리가 먼 이효원에게 현실은 시궁창이라며 잔소리를 해댔고, 이효원은 정말 사랑한다면 그깟 현실쯤은 이겨낼 수 있다는 철없는 소리로 답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듣던 세나가 합의제안서를 서류 파일에 넣으며 대화를 일축했다.
“자, 일단은 친권과 양육권은 아내 쪽이 갖는 거로 이미 합의가 끝났고, 면접교섭권도 남편이 원하는 만큼 양보해줬으니까, 재산분할 쪽은 한 변이 조금만 더 수고해줘. 맥시멈 금액 산정 다시 하고. 우리는 일단 그 금액의 65%만 제시할 거니까.”
“그럽시다. 기세나 팀장님.”
“그리고 이효원 변호사는 산출된 내용 정리 잊지 말고.”
“넵.”
*** 사건이 복잡할수록 벌어들이는 금액은 커졌지만, 그만큼 체력소모도 심했다. 때로는 하나의 사건이 시발점이 되어 과거의 일들까지 줄줄이 소환되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새로운 증거와 연관 관계를 재조사하거나 몇 년 전 자료들까지 검토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 걸 다 고려하고 보더라도 이번 사건의 경우 조금 독특한 사례였다. 명확한 증거. 그리고 증인. 클라이언트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도록 그물망이 촘촘해도 너무 촘촘했다. 류강현이 이 사건을 수임하기로 한 이유는 바로 그 점이었다. 모든 게 빈틈없이 완벽한 사건. 사건을 파면 팔수록 설계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해당 사건은 누군가의 제보로 검찰 직속 배정을 받았다. 한마디로 인지 사건이었다. 그것 말고도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또 있었다. 이 정도로 사안이 복잡하고 사이즈가 큰 경우에는 기소 검사가 공판까지 같이 가는데, 류강현이 2심을 맡고부터 공판 검사가 사건을 담당했다. 류강현은 장철호를 불러 아무도 모르게 이 사건을 처음 인지한 검사가 누구인지 조사를 부탁했다. 그리고 공판이 열리기 2주 전. 장철호에게서 설마 했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뒤에 누가 있나 했더니 이 양반 작품이었네.”
형사1부의 ‘고상한’ 부장검사. 이름에 어울리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신 남자로 류강현의 검사 시절 직속상관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강현은 변론 방향부터 자료조사, 상대 진영의 증인까지 전면 재검토를 했다. 그리고 오늘. 상대가 생각지도 못한 변수로 허를 찔렀다. 공판을 끝내고 K 로펌으로 돌아온 류강현에게 법원까지 함께 갔던 장철호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감탄사를 남발했다.
“우리 쪽에 내부고발자가 있다는 걸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검사 측이 너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증인도.”
사건을 파헤친 검사라면 그럴 수 있다 한다지만, 증인은 아니었다. 누군가 그에게 미리 정보를 넘겨주지 않은 이상, 절대 알 수 없는 일들까지 죄다 꿰고 있었다. 강현은 교묘하게 질문을 바꿔가며 검찰 측 증인을 심문했고, 그가 클라이언트의 회사에 입사하기 몇 년 전 자료들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고상한 부장검사의 문제는 일을 너무 완벽하게 처리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증인이 심문을 받는 동안 저희 쪽 피고인과 눈을 다섯 번이나 맞추더군요. 투수와 포수처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판에서 시간을 끄는 동안 장철호에게 증인의 다음 일정을 파악해달라 지시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재판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가장 중요한 증인이 당장 오늘 밤 출국하는 항공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도 편도로.”
피고석에 앉은 세 명의 남자 중 한 명과 상대측 증인 그리고 검사가 한편이었다.
“원래 적의 눈을 가리려면 아군의 눈부터 가리라고 했습니다.”
복도를 거니는 그의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재판 결과에 대한 브리핑은 장철호 실장에게 맡기고, 강현은 곧장 세나의 집무실을 찾았다. 세나는 가사전담팀 자료를 정리하다 말고, 그를 맞이했다. 반나절을 기다린 남자의 등장에 그녀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책상을 돌아 한달음에 튀어나왔다.
“재판 어떻게 됐어요? 이겼어요??”
숨 돌릴 틈도 없이 결과부터 묻는 그녀였다. 강현은 뭔가 잔뜩 기대하고 있는 세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얼굴 가운데 오묘한 갈색빛이 참 예쁘게 반짝거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도 함께 반짝이는 것 같았다.
“왜 말이 없어요? 내 십만 원 어떻게 됐냐니까?”
“…….”
강현이 ‘졌다, 이겼다’라는 말도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저만 쳐다보고 있자, 기대에 들뜬 그녀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하아…….”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그가 나직하게 숨을 뱉었다. 곧이어 강현의 고개가 세나의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피곤해.”
“…….”
까슬까슬한 목소리에 주춤하던 세나가 두 팔을 뻗어 둥글게 말린 그의 넓은 등판을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쓸어내리며 토닥이길 반복했다.
“괜찮아요. 질 수도 있지. 선배가 선배 입으로 말했잖아요. 이길 확률이 희박하다고. 몇 날 며칠 진짜 고생한 거 사람들이 다 알아. 잘 싸웠어……. 다음번엔 이기면 되지.”
“맞아. 잘 싸웠어.”
“아까워서 어떡해. 내가 다 속상하다.”
“……십만 원. 내가 대신 내줄까?”
“누가 그 돈이 아까워서 이러는 줄 알아요? 선배가 노력한 게 아까워서 그렇지.”
세나가 속상한 마음에 엉성하게 쥔 주먹으로 그의 등을 퍽퍽 때렸다. 강현이 그녀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비적거리다,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토요일. 한 시.”
“응?”
“데이트하자. 나랑.”
“…….”
“이겼어. 내가. 누가 십만 원이라는 거금을 거는 바람에.”
당했다. 또 당했다. 거기다 자신이 먼저 강현을 위로하고자 끌어안았다는 사실을 인지한 세나가 몸을 뒤로 확 빼며 그를 밀쳐냈다. 그러나 그녀가 물러난 만큼 강현이 양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다시 아까처럼 안아달라며 보채는 것 같기도 해 이상했다. 저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귀여워 보이다니.
“도대체 사람이 왜 그래요? 뭐 이런 장난을 치지?”
“먼저 안아준 게 누군데? 애고 어른이고, 사탕 신나게 물고 빨고 있다가 갑자기 뺏기면 징징대는 거 몰라? 왜 줬다 뺏어?”
“수작이 날로 발전하니까 제가 깜빡 속은 거죠! 와, 천하의 류강현이 이제 보니 완전 기회주의자였어!”
“그것까지 감당해야지. 천하의 류강현이 기세나에게 이렇게 매달리는데.”
제 마음을 감당하기도 벅찬데, 이 남자는 감당 불가였다. 그래서 속도 없이 그가 당기는 대로 끌려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 강현의 품에 안긴 세나는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몸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느슨하게 붙어 있던 몸이 바짝 당겨졌다. 세나는 강현의 가슴팍에 옆통수를 기대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숨을 들이켰다. 그의 슈트에 배어있는 청량한 향이 살랑살랑 코끝을 스치고, 마음에 봄이 왔음을 일깨웠다.
“이번만 봐주는 거예요. 이겼으니까.”
“이 정도 보상이면 조건부라도 감지덕지하지.”
그러고 보니 복도가 사람들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저렇게 소리가 큰데 왜 듣지 못했는지.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었는지는 뻔했다. 잘생긴 호랑말코한테 홀려서 옆방에서 터지는 환호성을 듣지 못했겠지. 세나는 저를 안은 채 피식피식 웃고 있는 그가 너무 얄미워 손날을 세워 옆구리를 퍽퍽 찔렀다. 조금이라도 아팠으면 해서 찔렀는데, 강현은 아무렇지 않은지 세나를 더욱 끌어당겨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