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쉬운 용서는 없다2022.01.25.
따뜻한 봄볕이 비치는 집무실 안. 타닥타닥, 쉴 새 없이 울리는 노트북 자판 소리가 바쁜 아침을 함께 맞이했다. 세나는 스크롤을 끝까지 내려 자신이 작성한 합의서를 확인했다. 빠트린 문장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 후 엔터키를 눌러 프린트를 뽑았다. 마지막으로 한번 인쇄된 합의서를 살핀 뒤 소가죽으로 만든 바인더에 넣고 닫았다. 그녀가 시니어 변호사가 된 날, 기장수 대표에게 선물 받은 바인더였다. 그때 이후로 중요한 계약을 성사시켜야 할 때면, 세나는 자신의 첫 사건을 함께했던 이 바인더만 사용했다. 일종의 루틴이었다. 세나는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해 손끝으로 바인더 표면을 톡톡 두드리며 그 촉감을 즐겼다. 오래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질이 부드러워지고 색이 짙어지는 소가죽 특유의 멋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 바인더 안에는 두 달 전 맡았던 사건의 합의서가 들어있었다.
“후우……. 잘할 수 있어.”
상대로부터 합의 관련 연락을 받았을 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답을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그녀와의 만남이 저답지 않게 떨렸다. 세나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만나기로 한 시각까지 오 분 남짓 남아있었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엮어 깍지를 끼고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려두었다. 하이힐을 신은 발을 꼼지락꼼지락하다 참지 못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을 돌아 나와 방 안을 서성이는 그때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세나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신주은이었다. 그녀는 변호사도 없이 혼자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기세나 변호사님.”
신주은은 귀부인처럼 우아한 자태로 한 손을 앞으로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네. 어서 오세요.”
세나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으며 예의 미소로 화답했다. 어디로 안내할까, 잠깐 고민하던 세나는 그녀를 상담을 위해 마련한 일인용 소파로 안내했다. 데스크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기엔 너무 거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방이 참 아늑하고 포근하네요. 변호사 사무실 같지 않아요.”
“아무래도 마음이 복잡하신 분들이 많이 찾으시니까, 편안한 분위기를 내려고 일부러 이렇게 꾸며봤어요.”
“맞아요. 삭막하고 차가운 곳에선 입 한번 떼기가 쉽지 않죠.”
세나는 빈티지 숍에서 직접 고른 로열 앨버트 꽃무늬 찻잔에 커피 대신 불쾌감을 완화시켜주는 페퍼민트 차를 내어왔다.
“잔도 예쁘네요.”
신주은이 찻잔을 들며 감탄했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준비한 향긋한 차를 20원짜리 종이컵에 내주는 건, 정성껏 준비한 요리를 양푼에 담아 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 방에 있는 장식품과 사물 중 허투루 고른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세나는 그것을 알아봐 준 그녀에게 내심 감동을 받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차 맛을 음미했다. 페퍼민트의 향긋하고 상쾌한 맛이 목구멍을 넘어 위로 들어가자, 속이 따뜻해지며 불안감을 넘어 메스꺼웠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신주은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게 풀렸다.
“기세나 변호사님은 참 좋은 변호사님 같아요.”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문을 열었다.
“사실 기대도 안 했어요. 제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실 거라고. 다들 저에게 미쳤다, 그냥 이혼하면 그만인 것을 왜 그렇게 악독하게 구느냐 손가락질만 했으니까. 그만하면 됐으니 내려놔라. 죽은 사람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 거냐. 용서 그거 별거 아니다…….”
신주은이 결혼생활 동안 사람들로부터 지긋지긋할 만큼 들어온 말이었다.
“사람들은 참 쉽게 말을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건 정말 저를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자기들이 보기 불편하니까 제게 포기를 강요하는 말이었죠.”
누군가의 잘못을 덮어준다는 건 그만큼 관용을 베푸는 일이었다. 관용은 너그러운 마음을 기반으로 한다. 그 당시 신주은은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상태였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녀의 마음엔 여유조차 없었다. 숨을 쉬면 그 숨이 제 폐부를 갈가리 찢는 것 같았고, 눈을 뜨고 있는 동안 머리는 원치도 않는 괴로운 기억을 상기시켰다. 그녀가 한쪽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용서가 어떻게 별거가 아닐 수 있나요. 상대가 뭐를 잘못한 건지, 그 잘못이 나라는 한 사람을 어디까지 내몰았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그 용서가 누굴 위한 건가요? 용서라는 건 또 하나의 나를 갉아먹는 일이죠. 그래서 저에겐 차라리 욕을 하는 게 더 쉬운 일이었어요.”
신주은의 말을 듣기만 하던 세나가 자신의 생각을 입에 담았다.
“용서가 쉬운 일일 수 없죠. 나는 아직 억울하고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겠어요. 용서하는 데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죠.”
용서에도 프로세스가 있다. 나를 짓누르는 분노가 어디서 오는지,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을 마주하고, 나에게 잘못한 상대는 왜 그랬는지, 그의 상황을 이해하려 마음을 열고……, 는 전부 개소리다. 용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이다. 내가 받은 피해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용서? 가당치도 않다. 그 보상이 물질이 될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될지는 누구도 대신 정답을 알려줄 수 없다. 그건 오로지 본인만이 결정할 수 있고, 그것이 해갈됐을 때 비로소 나를 얽매는 증오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고마워요. 변호사님.”
“아니에요. 저는 그저 뭉친 매듭의 끝이 어딘지만 살짝 알려드렸을 뿐인걸요.”
세나가 김택주 대표에게 전한 말은 별거 아니었다. 아내를 이해하고 싶다는 남자에게 진정 아내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려준 것뿐이었다. 모든 걸 태워 없애버리기 전까지 절대 꺼지지 않는 산불이 되어버린 그녀가 가장 원했던 것.
“아프면 아프다 소리 지르고 악쓰고 싶으면 악쓰고, 밀치면 같이 밀쳐서 그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라고 했다고 들었어요. 겪어보지 못하면 그 사람의 울분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신주은이 허리를 곧게 세웠다. 그리고 세나를 직시했다. 갤러리에서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며 아픔이 가득했던 눈동자가 아니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그리듯 기대감에 들뜬 총명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그날 집 안에 있는 전자제품이 다 망가졌어요. 저처럼. 그리고 그 사람처럼. 비싼 거였는데.”
덧붙인 말은 아깝다기보다 후련한 느낌이었다. 밝아진 그녀의 표정이 보기 좋았다. 인형처럼 감정 없던 얼굴이었는데, 지금 보니 생기가 있었다. 신주은과 김택주는 이혼을 선택했다. 이혼 조정신청으로 두 사람의 이혼 사유는 비밀리에 부쳐질 것이다. 그 대신 신주은은 제주도 별장을 넘겨받았다. 재산분할은 6:4, 그녀가 가진 바이오제약의 주식은 모두 김택주에게로 양도했다. 합의서에 서명을 마친 신주은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나의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치형 창문 사이 기둥을 콕 찍어 가리켰다.
“저기 저곳에 그림이 하나 걸리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래요? 어떤 그림이 좋을까요?”
“기세나 변호사님만 괜찮다면, 제가 그림 하나 선물할게요. 지금 말고. 제가 진짜 용서라는 이름으로 그린, 제대로 된 그림으로요.”
세나는 기다리고 있겠다, 답했고 신주은은 수줍은 소녀를 떠올리게 하는 제비꽃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서명을 마친 합의서가 든 바인더를 품에 안고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사건을 해결했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상처를 이겨내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도약하는 신주은을 만난 것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예스!!”
세나가 어깨에 힘을 빡 주고,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아, 진짜. 기분 좋다.
류강현에게 빨리 오늘 일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가 저를 믿고 맡긴 사건이었고, 제 생각이 맞아떨어졌기에 더욱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그러다 잘했다고 칭찬해줄 강현을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몇 시지? 아. 한창 재판 중이겠네.”
오늘 재판의 승패에 따라 십만 원의 행방이 결정된다. 그리고 데이트도. 어떤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복도 앞을 서성거려봤지만, 강현의 집무실엔 주인도 없이 장렬히 전사한 변호사들만 남아있었다. 김 변호사는 회의 테이블에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박 변호사는 소파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단잠을 자고 있었다.
“선배도 엄청 피곤할 텐데……. 아침에 조금 일찍 출근해서 얼굴이라도 볼걸.”
가끔 빈정이 상할 만큼 오만했지만, 자신감이 가득 찬 얼굴이 그리웠다. 방으로 돌아온 세나는 테이블에서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발견하고 얼른 집어 들었다. 혹시 류강현일까 했는데, 채성민이었다. 동문회에 참석하기로 한 뒤로 연락이 뚝 끊겼던 그가 반갑게 느껴져 얼른 전화를 받았다.
“성민 선배!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잖아요!”
-“우리 세나가 내 걱정을 다 해주고 기쁘네. 갑작스레 일 때문에 출장을 다녀왔어. 동문회는 잘 다녀왔어?”
다정한 어투는 지난번 만났을 때 그대로였다.
“다들 얼마나 목이 빠지게 기다린 줄 알아요? 선배 안 와서 엄청 서운해했다니까요.”
-“하하, 너는? 너도 나 기다렸어?”
의외의 인물이 등장한 이후로 성민의 부재가 까마득해졌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이죠. 그래서 일은 잘 끝났어요?”
-“응. 잘 끝나야지. 그건 그렇고 지금 시간 괜찮아?”
“지금요? 왜요?”
-“외근 나왔다가 시간이 애매하게 떴는데, 마침 서초동이라 우리 세나 얼굴 좀 보러 갈까 해서.”
“시간 괜찮아요, 오세요.”
전화를 끊고 나서야 채성민이 자신을 꼬박꼬박 ‘우리 세나’라고 부르는 것이 거슬렸다. ‘우리’라는 의미는 주로 친밀한 관계에서 쓰는 일종의 전치사였다.
“……하긴. 성민 선배가 원래 되게 다정하고 아무하고나 허물없이 지내긴 하지.”
채성민은 디저트 카페로 유명한 곳에서 포장해온 캐리어를 들고 세나를 찾아왔다.
“아메리카노 좋아하지?”
“아……. 네.”
“치즈 케이크도 사 왔어. 아메리카노와 치즈 케이크. 여자들이 좋아하는 조합이잖아.”
세나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는 갸또 쇼콜라 케이크였다. 치즈 케이크처럼 느끼하고 질척한 타입은 딱 질색이었다. 그러나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고, 사 온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 맛있게 먹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모닝 수박 주스가 이렇게 간절할 줄이야. 그러고 보면 은근히 사람 잘 챙긴다니까. 외골수라 그렇지. 좋아한다고 했더니 주야장천 그것만 사다 바치는 것도 웃겨.
“무슨 생각해?”
저도 모르게 떠오른 류강현 때문에 실없는 웃음을 흘리자, 채성민이 핑거스냅을 날려 세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 별거 아니에요.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 뭐 이런 생각?”
“곰이 누군데? 설마 나?”
“에이. 설마요.”
“그런데 류강현은 자리에 없나 봐? 지나면서 보니까 방에 실신한 사람들이 보이던데.”
“주말 내내 시달린 사람들의 말로죠. 강현 선배는 아침부터 중요한 재판이 있어서 법원 갔어요.”
모처럼 방해꾼이 없다는 소리에 채성민의 눈빛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