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라면 먹고 갈래요?2022.01.22.
“강현 선배도 안 오시고, 성민 선배까지 안 오시면 오늘 진짜 술이나 진탕 먹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잘란다.”
“정희야. 넌 매번 술을 진탕 마셨어. 동문회비가 다 네 술값으로 나가는 거 사람들 다 알아.”
‘그래?’ 하며 멋쩍게 웃는 정희의 앞엔 비워진 와인이 벌써 두 병이나 되었다.
“그래도 체면이 있어서 병나발 안 부는 거야. 옜다 한잔 받아라.”
시원하게 코르크 마개를 오픈한 정희가 세나에게 잔을 권했다. 지문 하나 없는 깨끗한 와인 잔에 콸콸콸, 붉은 과실주를 쏟아붓듯 따라주더니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렸다.
“첫 잔은 원샷. 알지?”
국선이라는 직업보다 ‘주당 박정희 선생’이라 더 익숙하게 불리는 그녀였다. 세나는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곤 못 말리겠다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오늘 ‘류강현을 데려오지 못한 네 죄를 알렷다’, 마음먹은 정희를 상대하려면 이 한잔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시간이 얼추 흘러 모두가 자리에 앉았을 무렵, 세나는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 이야기꽃을 한창 피우고 있었다. 일찌감치 결혼한 친구들은 결혼생활에 대한 괴로움을 토했고, 아직 싱글인 친구들은 맞선 시장에서 자신의 가치가 어디쯤인지, 상대는 어떤지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했다. 이도 저도 아닌 세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만 있었다. 그들의 고민에 맞장구를 치는 역할은 정희만으로 충분했다.
“이야아, 기세나 너 여기 있었구나.”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세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옆자리를 꿰찼다. 한 손에는 반쯤 찬 술잔을 든 이는 H대 법학과에서 그렇게 후배들을 괴롭히던 한 학년 위 선배였다. 고작 한 살 차이면서 대단한 세월을 먼저 보낸 양 하나부터 열까지 트집을 잡았고, 별거 아닌 걸로 후배들을 집합시켜 기합을 줬다. 거기에 정말 꼴 보기 싫었던 점은 자기의 마음에 든 여후배는 열외 시켜, 보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던 인간이었다. 그의 등장으로 세나네 테이블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졸업할 때도 학점이 모자라 교수님들께 매달렸다던 그는 사법고시를 세 번쯤 낙방한 이후로 법률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래도 선배랍시고 세나는 예를 차려 먼저 인사를 건넸다.
“우리 법학과의 꽃이 여기만 있으면 어떻게 해? 다른 자리도 돌면서 방긋방긋 웃어주고, 술도 따라주고 해야 선배들이 예뻐하지.”
어깨를 꾹 잡고 제 쪽으로 잡아끄는 힘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맨살에 닿았다면, 꺅 비명을 내지르고 싶을 정도로 추저분한 의도가 다분한 지분거림이었다.
“선배님 술 많이 드셨어요?”
세나는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남자의 손목을 잡아 어깨에서 멀찍이 떼어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정색했고, 행동으로도 명백히 닿지 말라는 의사를 표했다.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는 그런 그녀의 의사를 무시하고 다시 어깨동무를 해왔다. 이번에는 아예 어깨에 자신의 가슴을 밀착시켰다.
“아니. 이제 두 잔째지. 한 잔 따라줄래? 세나가 따라주는 술이라면 더 맛이 좋겠지?”
이 새끼가. 악다문 턱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앞에 앉은 동기들도 일제히 눈살을 찌푸렸다. 세나는 자신의 앞으로 잔을 내미는 선배 놈을 어떻게 엿 먹일까 궁리를 하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병이 별안간 허공에 들렸다. 주르르르륵-.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와 같은 소리가 연회장을 적셨다. 세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던 남자가 황당한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허우적대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와인 줄기 아래로 잔을 들이밀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눈길이 와인을 들이붓고 있는 사람을 향했다. 그중 세나의 눈이 제일 커다랗게 떠졌다.
오랜만에 보는 H대 법학과의 피하고픈 맹견, 류강현이었다.
“하늘 같은 선배님이 따라주는 술을 바닥에 질질 흘리다니, 기본이 안 돼 있네.”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다만 낮게 깔린 목소리와 어투가 사나운 맹수의 꾸짖음 같았다.
“……어……, 어……. 아…….”
“잔 채워줬으니 그만 꺼져. 맛은 네가 알아서 음미하고.”
‘탕!’ 소리가 나도록 빈 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그의 포스에 눌린 남자는 차마 덤벼들 엄두도 못 내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다 자신의 무리 속에 몸을 숨겼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세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강현이 한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코웃음을 쳤다. 그 웃음엔 복잡미묘한 짜증이 다분히 섞여 있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설명하기 귀찮아.”
“일은 어쩌고요?”
“알아서 되겠지. 붙들고 있어 봐야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불친절한 대답임에도 꼬박꼬박 답을 하는 게 기특한 건지, 여기서 그를 본 게 반가운 건지 잔뜩 굳었던 세나의 낯빛이 한순간에 밝아졌다. 류강현의 등장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그가 완전히 자리를 잡자 앞에 앉아있던 세나의 동기들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 앞다투어 인사를 건넸다.
“어머 어머! 선배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겠어요?”
“잘 지내시죠? 검사에서 변호사로 이직하셨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도통 선배님과 연락이 닿는 사람들이 없어서. 세나랑 같이 일하세요? 언제 한번 K 로펌에 가도 돼요?”
동시에 쏟아지는 환대가 어리둥절한 강현이 세나에게 귓속말로 ‘근데 박정희가 누구야?’라고 물었다. 세나는 ‘여기서 제일 술이 세 보이는 사람이요.’라 답했다. 강현은 자신의 앞쪽에 앉은 세 명의 여자를 바라보다 도무지 누가 누구인지 분간이 안 돼 어정쩡한 위치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세나가 그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 정희의 앞으로 옮겨주었다. 정희를 필두로 세 명 모두와 악수를 나눈 강현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뭐라 제대로 대꾸도 하기 전에 한가득 채워진 술잔을 연거푸 마셔야 했다. 피로와 수면 부족에 시달리던 강현은 정희가 퍼붓는 술 공세를 이기지 못했다. 동문회의 1차가 마무리될 때쯤, 강현은 눈을 감고 세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잠이 들어버렸다. 모두가 질려서 떠나버린 테이블엔 정희와 세나, 그리고 강현만이 남아있었다.
“세상에. 류강현 선배님 의외로 인간미가 있었네.”
취기 하나 없는 정희가 턱을 괴고 강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말했잖아. 요즘 진짜 잠잘 시간도 없었다고.”
“그러게 여기 왜 오셨지? 안 오신다고 했다며?”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그가 이곳에 등장할 거란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얼떨떨한 건 세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류강현이 제 옆에만 붙어 있어서 내심 뿌듯했다. 누구도 길들이지 못한 맹수를 길들인 조련사가 된 기분이라 콧대도 한껏 솟았다.
“흐음.”
테이블에 남은 술은 제 잔에 탈탈 털어낸 정희가 그것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발사했다.
“나는 왜인지 알 것 같은데?”
“응?”
“2차는 안 갈 거지?”
동문회를 할 때마다 2차는 무조건, 컨디션이 좋을 때는 3차까지 달리는 기세나였다.
“아무래도 선배를 집까지 바래다줘야 할 것 같아. 차 안 가져왔대.”
어깨에 기대어 꾸벅꾸벅 조는 강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추어올리는 세나를 정희가 목소리를 낮춰 불렀다.
“부케는 내가 받을게.”
“뭐??”
“뭘 모른 척이야. 대리나 불러 이것아.”
“야, 선배랑 나 그런 사이 아니야!”
얼굴은 수줍게 물들인 채로 기겁을 하는 세나를 보며 정희가 깔깔 웃었다. ‘웃기시네. 부뚜막의 앙큼한 고양이 같으니라고.’ 하고 짓궂은 핀잔은 덤이었다. 쉽게 볼 수 없는 강현이 1차를 끝으로 귀가를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아쉬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피곤에 찌든 사람을 억지로 깨워 2차를 가자 할 수도 없었다. 동문회에 첫 등장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으니, 다음번에 채성민과 류강현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세나가 강현 대신 작별을 고했다. 잠이든 그와 함께 뒷좌석에 앉은 세나가 대리기사님께 목적지를 알려주려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깨달았다. 늘 기세나를 집까지 바래다준 사람은 류강현이었다. 그가 어디쯤 사는지 대충 위치만 알고 있을 뿐 정확한 주소를 몰랐다.
“선배. 집 주소 좀 불러주세요.”
난감한 상황에 세나가 그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그러나 강현은 눈을 감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어떡하지. 목적지 설정을 기다리는 대리기사님이 자꾸만 시간을 체크하자, 세나는 어쩔 수 없이 내비게이션에 등록된 제 오피스텔 주소를 클릭했다. 오피스텔 주차장에 도착한 뒤 대리기사님은 다음 콜이 잡혔다며 미련 없이 떠나버렸다. 주차장에 홀로 남은 세나는 저보다 덩치가 두 배는 더 큰 남자를 어떻게 집까지 끌고 가야 할지 몰라 고민에 잠겼다.
“선배. 좀 일어나 보세요.”
조금만 정신을 차리면 부축해서 데리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박정희 이 망할 것. 왜 이렇게 술을 먹인 거야. 말술이 괜히 말술이 아니었다. 소주병으로 따지면 대략 아홉 병은 족히 마시는 정희가 오늘 만나서 반갑다고 류강현에게 먹인 술 양은, 웬만한 사람의 두세 배는 되는 양이었다.
“그러니까 주는 족족 받아먹긴 왜 받아먹어요. 일어나세요. 용사여. 제발.”
“…….”
“아, 내가 어떻게 선배를 혼자 옮겨. 호랑말코 씨! 눈 좀 떠보시라고요. 아저씨,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야, 류강현! 일어나라고!”
“…….”
그를 칭할 수 있는 갖가지 호칭으로 불러가며 어깨를 흔들어봤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냥 여기다 버리고 갈까?”
세나는 그 고민이 진지해지기 전에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강현을 차에 내버려 두고 혼자 집으로 올라가 버릴 수도 있지만, 그건 너무 인정머리 없는 짓이었다. 세나가 다시 한번 강현의 어깨를 잡고 고개가 끄떡일 정도로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이 정도로 곯아떨어졌으면 실랑이를 해봐야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와, 이 오빠 진상이네.”
그녀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뒷좌석 문 옆에 풀썩 쭈그려 앉았다.
“그 호칭이 제일 마음에 들긴 해.”
“엑?!!”
바닥으로 떨어졌던 고개를 번쩍 쳐들자, 강현이 삐뚜름한 입매로 웃고 있었다.
“뭐야?? 언제 깼어요??”
“애초에 잠들지도 않았어.”
“그럼 뭐야? 술 취한 척한 거예요? 왜??”
“안 그랬으면 박정희인가 뭔가가 날 죽일 기세였거든. 그리고 목적도 달성했고.”
그가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쭉 켰다. 세나는 태연자약한 강현의 모습에 할 말을 잃고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기를 수 초. 심장이 다시금 콩닥거리려는 찰나,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질문은 사양할게. 너무 진부해.”
강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스러워 숨이 덜컥 멎었다.
“……뭐라고요???”
누가 라면을 끓여주긴 한대? 집에 라면도 없다고 반박을 해야 하는데,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순간 멍해졌다.
“들어가. 이만 가볼 테니까.”
그는 조금 전 자신이 던진 말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듯 무표정한 얼굴로 소매를 걷어 시계를 확인하더니 쯧, 혀를 찼다.
“집으로 가는 거예요?”
“아니, 사무실. 아직 할 일이 남았거든.”
“헐……. 그러게 도대체 거긴 왜 온 거예요?”
“기세나 집에 얌전히 보내려고. 너 술 취하면 아무 남자 붙잡고 한잔 더하자고 하니까.”
“제가 언제요?!”
강현은 버럭대는 세나의 정수리에 큼직한 손바닥을 가볍게 톡, 얹으며 얄궂은 얼굴로 웃었다.
“잘 생각해 봐. 언제인지.”
사무실로 간다는 말은 진심이었는지, 그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세나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얼이 빠진 제 모습을 빤히 보며 강현이 한 말이 무슨 말인지 되새겨보았다. 그러다 뭔가 떠오르지는 않지만, 왠지 모를 기시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