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네 방 침대2022.01.18.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악에 받친 고성을 더는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황유라와의 통화를 매몰차게 끊은 채성민은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갑갑했다. 몸을 돌려 창가로 걸어갔다. 높은 고층에서 바라본 전경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뿌옇게 낀 먹구름이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하늘을 가득 메웠다. 우글우글한 먹색 구름이 꿈틀꿈틀, 시커먼 때가 묻은 제 욕망을 닮아 있었다. 잠시 뒤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던 빗방울이 삽시간에 거센소리를 내며 유리창에 부닥쳐왔다.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기분 참 뭣 같네.”
차라리 과거의 일들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깨끗이 씻겨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 거울 앞에 선 세나는 다시 한번 자신의 스타일을 점검했다. 짙은 코발트블루의 랩 스타일 재킷을 사선으로 잠그고 허리를 바짝 조여 리본을 묶었다.
“흐음…….”
일부러 비스듬히 매듭진 리본의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풀었다가 묶었다. 네 번의 시도 끝에 완벽한 대칭을 이루자 뒷모습과 옆모습을 재차 확인했다.
“좋아.”
잘록한 허리선이 돋보이는 이 정장은 얼마 전 백화점에서 오늘을 위해 샀다. 일자로 쭉 뻗은 바지선은 에나멜 하이힐 앞코를 살짝 드러내며 찰랑거렸다.
“완벽해.”
화려한 디자인의 정장이니 귀걸이는 최대한 심플한 걸로. 세나는 자신의 귀에 걸린 드롭 귀걸이를 빼고 진주알 귀걸이를 끼운 후 손가락으로 톡톡 튕겼다.
“여기에 목걸이까지 하면 투머치지. 머리는 묶을까, 아니면 그냥 풀까?”
굵은 컬이 들어간 머리칼을 두 손으로 모아 정수리 부근까지 올렸다가 풀었다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과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사슴처럼 긴 목이 더욱 돋보이려면 묶는 게 나을 듯 보였다. 마지막으로 붉은빛이 도는 코랄 립스틱을 입술에 꼼꼼히 바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 같군. 아주 좋아. 만족해. 기세나. 너 오늘 예뻐. 네가 최고야.”
일 년에 한 번. 가까운 기수에 졸업한 선후배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세나는 제 방을 나서기 전까지 철저하게 점검을 마쳤다. 사무실 불을 끄고 나와 류강현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란 소리에 문을 조금 열고 얼굴만 들이밀어 인사를 건넸다.
“선배. 나 먼저 퇴근이요.”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던 강현이 고개를 들고 세나를 보았다. 그의 눈매가 안경 너머에서 일그러졌다.
“어디 가는데?”
“오늘 동문회 있다고 했잖아요. 선배가 관심 없다며.”
“그러고 간다고?”
“왜요? 이상해요? 나름 힘 좀 줬는데?”
분명 완벽했는데. 세나가 방문을 활짝 열고 제 모습을 전부 보였다. 그러자 강현이 상체를 의자에 기대고 뚫어질 듯 그녀를 관찰했다. 그러던 강현의 눈매가 살짝 찡그려졌다.
‘다 좋은데. 저 목선은 어떻게 안 되나?’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칼 때문에 그녀의 길고 곧은 목선이 훤히 드러나 기분이 복잡해졌다.
“동문회가 아니라 맞선보러 가는 건가?”
“에이 맞선은 이렇게 안 가지. 어때요? 완전 능력 있는 변호사 같죠?”
“……머리. 묶는 것보다 푸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그래요??”
묶는 게 예쁘긴 한데, 너무 예뻐서 문제지. 동문회에서 술이 빠질 리도 없고, 저렇게 무방비 상태로 목을 드러내놓고 있다가 술 취한 미친놈이 그 목선에 헐떡거리며 달려들지나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남자 새끼들의 마음이 동하는 것은 별거 없다. 저 가녀린 목선에 입을 맞추고 싶지 않는다면 그건 남자 새끼가 아니다.
“아, 지금 풀면 머리에 자국 남는데…….”
“푸는 게 나아.”
“웬일이래. 이런 거 볼 줄도 모르는 사람이.”
세나가 예쁜 입술을 삐쭉거리며 높게 묶었던 머리칼을 풀었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사이로 빗으며 다시 물었다.
“이게 낫다고?”
“그래. 훨씬 낫네.”
그나마 낫다는 거지. 도대체 동문회가 뭔데 저렇게 예쁘게 꾸미고 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서 만나봐야 도움 될 것들이 하나 없을 텐데. 그 시간에 새로운 판례나 찾아보고 법률 지식을 하나라도 더 쌓는 게 알찰 텐데 말이다. 강현은 못마땅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세나에게로 걸어왔다.
“우산은?”
“차에 있어요.”
“몇 시까지 가야 하는데?”
“지금 가면 정각에 도착할 거예요.”
“밥은?”
“만나면 밥 먹겠죠. 연회장을 빌렸으니 뷔페로.”
“차 가지고 가게? 술 마실 건데?”
“그게 무슨 상관? 대한민국의 대리기사님이 오지 못할 곳이 있어요?”
더는 그녀를 붙잡을 말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잘 다녀오라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아 멀뚱히 서 있는데, 그녀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좁히며 강현을 흘겨보았다.
“뭐지? 이 질척한 반응은? 어차피 동문회엔 관심도 없으면서 왜요? 나 혼자 좋은 데 가니까 질투해요? 그럼 같이 가든가. 하긴 저 서류들 보니까 오늘도 꼼짝없이 밤새우게 생겼네.”
세나가 일부러 더 얄밉게 생글거리며 강현을 놀려댔다. 그녀가 던진 도전장은 받아주는 게 도리였다.
“좋은 곳이 별거인가. 난 거기가 제일 좋던데.”
“어디요?”
“네 방 침대.”
나직하게 뚝 떨어진 목소리에 기분 좋게 생글거리던 세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대신 강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혹시 돌으셨어요……?”
“보다시피. 지극히 이성적이고 냉정한 상태지.”
“갈게요. 밤을 새우든지, 말든지. 밥을 굶든지 말든지.”
몸을 휙 돌려 나가는 세나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쿵쿵 울렸다. 강현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쿡쿡 웃었다. 말간 뺨 위로 수채화 물감을 콕 찍어 바른 듯 홍조가 번진 얼굴이 귀여웠다.
“아……. 진짜 자꾸 괴롭히게 되네. 유치하게.”
세나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그가 옅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것도 중독이 되는 건지……. 아쉬운 마음에 눈을 돌려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포츠카의 엔진음이 지하 주차장에 묵직하게 울렸다. 핸들을 꽉 잡은 세나가 그 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불시에 던진 승부는 저의 패배로 단발에 끝이 났다.
“망할 놈의 호랑말코. 거기서 그 말이 왜 나와?!”
당황한 세나는 제 얼굴을 감추기 위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별일 없이 나란히만 누워있었는데,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야릇하게 내뱉어진 그의 음성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세나는 자신의 차량 앞쪽에 주차된 강현의 까만 세단을 노려보며 분에 겨운 투지를 불태웠다.
“자꾸 이런 식이면 나도 쉽게 안 받아줄 거야. 바짝바짝 애태울 거야! 두고 봐!”
손잡는 데 한 달, 키스하는 데 석 달, 잠자리를 가지는 데 일 년. 아주 애가 닳아 없어지도록 만들어주겠다, 다짐하며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었다. 부드럽게 주차장을 돌아 나오는 길. 출입구에 다다르자 빗줄기가 무섭게 차창을 두드렸다. 와이퍼를 작동하자 시야를 가리던 물 폭탄이 사라졌다가, 다시 채워졌다. 운전하기 힘들 날씨였다. 세나의 차량이 도로에 합류하기 위해 천천히 이동하는 그때였다. 차 옆으로 흐릿한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 뭐야?!”
깜짝 놀란 세나가 얼른 브레이크를 밟았다. 다행히 부딪히진 않았다. 떨어지는 빗줄기 사이로 새빨간 우산을 쓴 한 사람 하나가 그녀의 차량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볍게 클랙슨을 ‘빵-’ 울리자, 그제야 우산을 쓴 사람이 비켜섰다.
“아주머니, 차가 나오는데 비켜주셔야죠. 오늘 같은 날은 더 조심해야 한답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전방에 다른 문제가 없는지 주시했다.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한 그녀가 핸들을 우로 꺾으며, 우산을 쓴 사람과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사이드미러를 체크했다. 작은 거울에 비친 여자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눈에 밟혔다. 그러나 이내 도로에 합류한 세나의 차는 회사로부터 금세 멀어졌다. *** 압구정에 위치한 클럽하우스를 대관하여 열린 동문회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평소 20~30명 내외가 모이는데 오늘따라 어림잡아도 대략 50명은 넘어 보였다. 입구에서 명단을 작성하며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마침 앞을 지나는 정희를 불러세웠다. 그녀의 눈에 반가운 기색이 살짝 서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세나가 혼자였기 때문이었다. 대놓고 실망을 표하는 정희에게 세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혼자 오냐, 투덜대는 그녀를 달래려 팔짱을 끼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데,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이렇게 참석률이 높아?”
“교수님 왔잖아.”
“무슨 교수님?”
“법조 윤리 강재문 교수님.”
세나가 의외라는 기색을 비추자, 정희가 사람들 눈치를 살피며 그녀의 귀에 속닥거렸다.
“이번에 청와대 법제처에 한 자리 받으실 건가 보더라. 그래서 혹시나 하는 것들이 얼굴 비치려고 기웃거리는 거지. 괜히 학교 다닐 때 꼰대로 유명한 교수님이 오신다고 안 오던 동문회를 나오겠니?”
어쩐지. 유독 한 곳에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북적북적했다. 어쨌든 교수님이 직접 오셨으니 인사는 해야겠다 싶어 그곳으로 다가갔다.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자, 의자에 앉아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왜소한 몸집의 남자가 보였다. 그는 여전히 염색과는 거리가 먼지 희끗희끗한 흰머리를 멋스럽게 유지하고 있었다. 10년이 지나도 이맛살에 주름이 더 깊어진 것 말고는 변함이 없었다. 대학 생활 때 나름 그에게 예쁨을 받았던 세나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교수님. 저도 왔어요.”
세나의 등장에 꼬장꼬장하던 교수의 표정이 사르륵 녹았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기세나 변호사 아냐?”
강재문 교수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세나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세나 역시 애교가 가득한 눈웃음을 지으며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기 대표는 잘 계시지?”
“너무 잘 계셔서 문제예요.”
“언제 한번 식사를 했으면 좋겠는데. 의논할 것도 있고.”
강재문 교수와 기장수 대표는 같은 대학 선후배 사이였고, 총학생회 간부 출신으로 군사정권 시절 독재 타도를 함께한 전우 사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그땐 그랬지’ 하고 험난했던 학생 시절을 안주 삼아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시절엔 목숨을 건 투쟁이었고, 항쟁이었다. 졸업하고 나서야 그들의 친분을 알게 되었지만, 법조 윤리학을 재밌게 들었던 세나는 다른 의미에서 강재문 교수를 존경했다.
“교수님이 전화하시면 열 일 마다하고 나오실 거예요.”
“아, 참. 류강현 검사, 아니지. 이제 변호사지. 같이 일한다면서? 오늘 안 오는 건가?”
이젠 여기저기서 강현을 찾는 사람들이 그의 안부를 세나에게 묻기 시작했다. 예전이었다면 그조차 못마땅하게 여겼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세나가 빙긋하게 웃으며 예의를 차렸다.
“교수님께까지 소문이 났어요? 저희 로펌이 유명한 건지, 강현 선배가 유명한 건지 모르겠네요.”
“그때 다 같이 밥 한번 먹지.”
“네. 언제든지요. 강현 선배한테도 언질해 둘게요. 요즘 무척 바쁘신 분이라. 그럼 전 더 눈치가 보이기 전에 교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해야겠네요.”
세나는 등 뒤에서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사람들을 위해 서둘러 인사를 마무리했다. 사람들 틈을 빠져나오자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정희가 손을 흔들었다. 그녀에게로 걸어가는 동안에 만나는 사람마다 세나를 붙잡고 허례허식 같은 인사말을 건네었다. 입가가 경련할 정도로 방긋방긋 미소를 띠고 있던 세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양손으로 턱 아래를 꾹꾹 누르며 마사지를 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사람이 있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민 선배는 아직 안 왔어?”
“좀 늦으시나? 애들 완전 기대하고 있던데. 대호 그룹 법무팀 팀장이라며? 대단하다. 거기 들어가기 진짜 힘든데.”
정희의 말에 드라마에서 추구하는 ‘악녀’ 이미지에 완벽하게 부합되던 여자가 떠올랐다. 대호 그룹 황유라 상무. 동문회에 같이 가자고 말했던 채성민은 그날 이후 연락이 없었다. 안 그래도 걱정이 되던 차에 세나는 클러치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채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가 한참이 가도록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안 받네……. 바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