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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주제 파악 (57/120)

57화. 주제 파악2022.01.15.

16551861038362.jpg“안 될 것 같아.”

세나가 입술에 힘을 주며 오므렸다. 상상을 해 봤지만, 역시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녀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며 끙, 앓았다

16551861038367.jpg-“야, 너는 정말 친구 소원이라는데도 안 들어준다고?”

박정희가 실망이 가득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주 금요일에 잡힌 동문회의 참석 여부를 확인하던 차에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말을 하는 그녀는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다, ‘아 맞다!’라는 추임새를 넣는 동시에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게 류강현의 소식을 물었다.

16551861038362.jpg“그게 아니라 진짜 바쁘다니까. 잠잘 시간도 없어.”

16551861038367.jpg-“얼굴만 비추고 가라고 하라고!”

16551861038362.jpg“얼굴을 비출 시간도 없을걸. 당장 재판이 다음 주 월요일인데, 금요일에 시간이 있겠니?”

16551861038367.jpg-“네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뭐 비서라도 돼? 네 방 바로 앞이라며. 지금 가서 물어만 보기라도 해 봐. 나랑 통화하는 김에.”

16551861038362.jpg“성민 선배는 온다고 했다며.”

16551861038367.jpg-“그러니까 더 난리지. 우 성민 좌 강현. 이번 동문회가 역대급이 될 찬스를 이렇게 발로 차버릴 수는 없잖아! 사이가 껄끄러워서 정 묻기 뭐하면, 내가 물어볼 테니 선배 번호 좀 줘봐. 아니면 너희 로펌에 전화해서 연결해달라고 할까?”

더는 껄끄러운 사이가 아니었지만, 정희에게 그 소식을 전달하면 지금보다 더 들들 볶일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로 시작해서, 이제 사이가 좋아졌으니 자신을 인사시킬 수 있지 않냐까지. 그녀의 다음 말들이 너무나 예상 가능해 입을 꾹 다물었다.

16551861038362.jpg“……일단 문자 넣어볼게.”

16551861038367.jpg-“뭘 문자를 넣어. 십 초면 방문을 두드릴 수 있는 거리면서!”

16551861038362.jpg“거절할 게 뻔한데 바쁜 사람 시간을 뺏을 건 없잖아. 지금도 아마 회의 중일 거야.”

세나는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스피커로 바꾸었다. 그리고 문자창을 열어 강현에게 메시지를 입력했다.

16551861038362.jpg[혹시 이번 주 금요일에 동문회 하는 거 알아요?]

16551861038367.jpg-“뭐래, 뭐래?”

박정희는 세나가 메시지를 보낸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재촉부터 해댔다. 아직 그가 읽지도 않은 상태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들뜬 목소리에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류강현이 그런 자리에 참석할 리가 없었다.

16551861038362.jpg“정희야, 그냥 마음을 비우면 편안해져. 어차피 학과 활동에 참석하지도 않았던 사람이잖아. 강현 선배는 법조인 모임에도 안 나가. 그런데 이깟 동문회를 생각이나 하겠니?”

16551861038367.jpg-“전에야 그 선배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랬지만, 지금은 동문회 100% 출석률을 자랑하는 너랑 같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혹시 알아? 옛 친구들이 그리워서 나올지?”

16551861038362.jpg“선배가 친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기는 할까?”

의미 없는 수다가 이어지는 도중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정희의 말을 듣다 보니 그녀의 말도 그럴듯해서 내심 그의 답이 기대됐다.

16551861038362.jpg“정희야. 꿈 깨야겠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답은 단출했지만, 거절의 의사가 명확히 담겨있었다.

16551861038367.jpg-“뭐라는데??”

16551861038362.jpg“굳이 알고 싶지 않으시단다.”

16551861038367.jpg-“와, 냉정하네.”

16551861038362.jpg“내가 말했잖아. 사람 성격 쉽게 안 변해. 나는 매일 봐도 진짜 어쩜 저렇게 뚝심이 깊을까 신기할 정도라니까.”

16551861038367.jpg-“뭐, 이번엔 바쁘시다니까 넘어가는데, 언젠가 류강현 선배님을 꼭 동문회에 모시고 만다. 이건 일종의 동문회를 총괄하는 나에게 내려진 사명 같은 거야. 그러니 너도 잘해. 학생 때처럼 굴지 말고 사근사근하게 굴라고. 잘하면서 왜 선배한테만 그래? 내가 전에 누차 말했지? 그 선배가 유일하게 예뻐하던 후배가-.”

16551861038362.jpg“정희야. 너 안 바쁘니? 내가 아는 국선들은 엄청 바쁘던데?”

16551861038367.jpg-“안 그래도 구치소 가는 길이야. 암튼 말 돌리지 말고. 기세나, 강현 선배랑 친하게…….”

16551861038362.jpg“난 상담 있어서 전화 끊어야겠다. 금요일에 보자.”

세나는 융단폭격 같은 잔소리가 고막에 생채기를 내기 전에 빨간색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한동안은 핸드폰을 쳐다보기도 싫어 구석에 밀어두고,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사건 파일을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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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가 한 장, 한 장, 옆으로 넘어갈 때마다, 스치는 소리가 칼날 같았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장철호 실장은 자신이 건넨 자료에 무서우리만치 집중하는 그의 얼굴을 슬쩍 보다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보고서의 마지막 장까지 모두 훑어본 강현이 탁자 위에 서류를 내려두고 목을 느슨하게 풀었다. 살짝 찌푸린 눈가에 피로가 묻어있었다. 잠시 뒤 그가 두 손을 맞잡아 턱을 짚었다. 꽤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에 장철호도 덩달아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165518610955.jpg“확실한 겁니까?”

16551861095506.jpg“네. 출입국 기록을 확인한 결과 2년 정도 그곳에 머무른 거로 확인됐습니다.”

165518610955.jpg“뭐 예상했던 거라 놀랍지는 않은데…….”

강현이 검지 끝으로 한 장의 서류를 장철호에게 죽 내밀었다. 영문이 가득한 서류는 맨해튼에 있는 재활병원 기록이었다. 주로 약물중독 관련 환자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하는 병원으로 철저하게 비밀이 보장되는, 하루에 입원비가 몇천 달러에 달하는 병원이었다. 그런 병원에 황유라가 두 달을 넘게 신분을 숨기고 입원해 있었다.

16551861095506.jpg“그런데 갑자기 왜 그분을 조사하라 하신 건지. 여기 친구분 있는 회사 아닌가요? 검사 때 종종 찾아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대호 그룹 법무팀, 채성민 변호사.”

165518610955.jpg“필요한 일이 생길 것 같아서요. 마침 거슬리던 참이고.”

16551861095506.jpg“그럼 채성민 변호사에 대해서도 따로 조사할까요?”

165518610955.jpg“아뇨. 그 사람을 따로 조사할 필요는 없고. 일단 여기를 더 파보죠. 국내에서 함부로 건들 수 없는 기업의 자제분인데 이런 곳에서 재활 치료를 받았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겁니다. 단순히 중독 치료가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도피처가 필요했던 건지.”

강현은 장철호에게 일을 부탁하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저 감이었다. 대기업 법무팀에서 출세의 가도를 달리던 채성민이 갑자기 기세나에게 눈을 돌린 사유. 황유라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거나, 심경의 변화가 있을 만한 일이 생겼거나.

16551861095506.jpg“혹시 대호 그룹이랑 무슨 일 있으셨나요?”

165518610955.jpg“아직은 없습니다. 곧 있을 수도 있죠.”

류강현은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서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별다른 이유 없이 제게 이런 일을 맡길 리 없다고 여긴 장철호는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165518610955.jpg“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늘 그랬듯이 이 일은 저랑 장 실장님만 아는 거로.”

16551861095506.jpg“네. 새로운 정보가 업데이트될 때마다 따로 올리겠습니다.”

허공에서 부딪힌 두 사람의 시선이 의미심장하게 가라앉았다. ***

16551861119502.jpg-“언제까지 이 촌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하냐고!!”

16551861119506.jpg“…….”

황유라의 사전에 자숙이란 단어는 없었다. 무료한 삶에 유일한 낙이라 할 수 있는 광란의 파티가 끝이 났고, 주변 상황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황유라는 자신을 마치 모두가 떠난 바위섬에 갇힌 가련한 갈매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쾌락에 취해, 제멋대로 날뛴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16551861119502.jpg-“그때 경찰 새끼들이 나 막 잡아끌 때 손톱도 다 깨졌다고. 이 흉한 걸 달고 밥이 넘어가겠어?! 머리는 또 어떻고! 관리가 안 되니까 벌써 푸석푸석하단 말이야!”

손톱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16551861119502.jpg-“아, 맞다. 그 새끼들 다 잘라. 파출소 새끼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안 그럼 성추행으로 다 고소할 거야.”

그 하룻밤을 수습하는 데 든 비용은 어림잡아 서울 변두리의 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돈을 먹여야 하는 놈이 줄을 세워 수십 명. 거기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기자 한 놈. 대호 그룹이 비자금 목적으로 만든 페이퍼 컴퍼니에서 자금을 빼내기 위해 머리를 굴린 사람의 몫은 어디에도 없었다.

16551861119502.jpg-“내 말 듣고 있어?? 하, 좋아. 그럼 얌전히 있을 테니까 나랑 놀아줄 애 하나 좀 보내봐. 왜, 요즘 걔, 우리 계열사 제품 CF 찍은 애. 아,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웃는 게 귀여워서 내가 좀 키워보게.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괜찮겠더라, 데리고 놀기.”

돈으로 사람을 가지고 놀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황유라가 콕 찍어 말한 사람은 3년 차 아이돌 그룹의 리더였다. 순수하게 생긴 청년으로 예의가 바르고, 평소 봉사활동을 자주 하는 것으로 유명해 얼마 전 대호 그룹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모델로 선정했다. 불법 약물 소지로 하루하루 마음 졸이는 일 따위는 황유라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과연 소지일 뿐일까. 정신이 나가도 한참을 엇나가버린 재벌 2세는 아예 유통까지 하고 있었다. 뭐가 모자라서. 뭐가 더 필요해서. 돈이라면 먹고 죽을 때까지 펑펑 써도 남을 텐데 왜. 도대체 왜! 그간 쌓였던 업을 꾹꾹 짓이기고 악다문 잇새로 겨우 한마디 뱉었다.

16551861119506.jpg“황유라.”

16551861119502.jpg-“이야, 이제야 대답하네. 난 또 하도 왈왈 짖어대던 놈이 숨소리도 안 내길래 어디 아픈가 했네. 그래서 나 얼마나 여기 더 있어야 해? 걔 보내면 한 일주일 정도 있어 줄게.”

해야 할 말도, 하고픈 말도 이미 다 휘발되어 버렸다. 뭘 더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황유라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줘 버리면 이 업이 끝이 날까. 아니. 그 답은 채성민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열한 욕망은 단순한 더하기가 아니었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 둘이 되면 넷을 원하고, 넷이 되면 여덟을 원하게 되는 배수였다.

16551861119506.jpg“차라리 미국으로 갈래?”

차라리 사고를 치더라도 이렇게 기레기들이 판을 치고 보는 눈이 있는 곳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16551861119502.jpg-“미국? 갑자기 미국으로 가라고? 왜 이제 눈앞에서 치워버리게? 채성민. 머리 좋은 줄 알았는데, 가끔 보면 너 좀 모자란 것 같아. 내가 미국 가면. 너는? 아빠가 너 한국에 둘 것 같아? 미국지사로 발령 내버릴걸?”

깔깔깔 높이 터지는 웃음이 뾰족하게 갈린 바늘이 되어 고막을 찔렀다. 호흡을 따라 웃음이 끊기는 마디마다, 관자놀이 부근의 맥박이 함께 움찔거렸다. 그 움직임은 고스란히 통증이 되어 뇌를 꽉 쥐어짰다.

16551861119502.jpg-“네가 누구 덕에 그 자리에 명패에 이름 새기고 있는 건데, 주제 파악 좀 하라고 몇 번 말해?”

애당초 대호 그룹 법무팀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황유라의 입김 덕이었다. 고작 1년짜리 국제 변호사 경력을 가지고 대기업 법무팀이라니, 금줄로 만든 낙하산을 타고 온 변호사라는 소문이 괜한 소문이 아니었다. 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한번 낙하산은 영원한 낙하산이다. 꼬리표를 떼지도 못하고 대호 그룹 일가의 뒤처리를 도맡아 하면서도 언젠가 이 끝에 낙원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던 어리석은 시절.

16551861119506.jpg“이번 건만 해결하면 사직서 낼 거야. 더는 너든 대호 그룹이든 엮이고 싶지 않아.”

16551861119502.jpg-“또 그 소리야. 지겹다. 레퍼토리 좀 바꿔.”

16551861119506.jpg“약물 검사는 어떻게든 무마시켰으니까, 제발 한동안 얌전히 숨어있어. 기자들도 냄새를 맡아서 여기저기 캐고 다녀서 골치도 아프고. 이건 황 회장님의 지시기도 해. 마지막 충고야.”

16551861119502.jpg-“충고? 풋. 웃기고 있네. 기자들 그러는 거 하루 이틀 아니고, 나 지랄발광하는 거 하루 이틀 아냐. 인제 와서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싫다면 네가 어쩔 건데?”

16551861119506.jpg“내가 대호 그룹에서 마지막으로 처리할 일이 널 금치산자로 만드는 일이 아니길 바라야겠지.”

16551861119502.jpg-“뭐?? 금치산자? 하, 채성민 이 미친 새끼! 너-.”

핸드폰 너머 황유라의 음성이 잔뜩 갈라졌다. 상스러운 욕을 폭포수처럼 쏟아붓는 그녀를 무시한 채 채성민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16551861119506.jpg“기르던 개한테 물리기 싫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는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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