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류강현의 법정 대리인2022.01.11.
“저는 일단 류 변호사님이 이긴다는 데 만 원 걸었습니다.”
“고작 만 원이요?”
가끔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사건을 맡았을 때,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 일시적인 오락 삼아 팀원들끼리 내기를 하곤 했다. 물론 이기든 지든 그 돈을 딴 사람이 밥을 사거나, 술을 사거나로 마무리되는 아주 건전한 도박이었다.
“저도 끼워 줘요.”
“기 변호사님은 어느 쪽에 걸 건가요?”
“저는 류 변호사님이 이긴다, 에 십만 원 빵.”
“이야, 기세나 변호사님 보이는 대로 성격 화끈하시네.”
세나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씩 웃자, 장철호도 껄껄 호탕하게 따라 웃었다. 그러다 목소리가 너무 컸다 느꼈는지 입을 쓱 가렸다.
“기 변호사님 지금 시간 괜찮으시면 부탁 좀 하나 드려도 될까요?”
“제가 받은 게 있는데, 장 실장님 부탁쯤이야 얼마든지 들어 드려야죠.”
세나가 뭐든 말해보라며 흔쾌히 수락하자, 장철호가 검지로 류강현의 집무실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막 잠드셨는데, 30분 후에 깨워달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제가 외부 일정이 잡혀서 30분 내로 돌아오긴 힘들 것 같습니다.”
“진짜 피곤하긴 한가 보다. 선배가 근무시간에 쪽잠을 잔다니 믿기지가 않네.”
“요즘 거의 하루에 두어 시간 자면 많이 주무시는 겁니다.”
장철호는 핸드폰 화면의 시간을 확인한 후 말을 이었다.
“정확히. 다섯 시 사십오 분에 저 대신 좀 깨워주세요.”
이것 또한 그가 말한 류강현의 치밀한 성격 중 하나이겠거니. 그 시간을 넘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장철호를 보며 세나가 풋 하고 웃어버렸다.
“다섯 시 오십 분 아니고 다섯 시, 사십, 오 분. 오케이.”
기밀 정보를 교환하는 사람처럼 장철호와 세나가 서로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장철호는 다시 한번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계단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핸드폰에 알람을 설정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 했던 세나가 우뚝 멈춰 섰다. 잠이 든 류강현이라. 얼마 전 자신이 흉하게 잠든 모습을 찍어 저를 약 올렸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의 치욕을 갚아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놓칠 수 없지.’
세나는 비쭉한 웃음을 입가에 걸고 집무실 문고리를 잡았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연 뒤 방 안으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간 그녀는 장철호가 했던 것과 똑같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도둑고양이처럼 기민한 움직임으로 강현이 잠들어 있을 거라 추정되는 곳부터 재빨리 살폈다. 그러나 몸을 쭉 뻗을 수 있는 삼 인용 가죽 소파는 텅 비어있었다. 실망감에 눈살을 찡긋거리며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집무실 테이블 너머로 의자에 몸을 깊게 묻고 있는 강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뒤로 살짝 젖혀진 의자에 몸을 싣고, 가슴팍 위로 팔짱을 끼운 채 눈을 감고 있는 강현은 잠이 들었다기보다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세나가 홀린 듯 강현에게로 다가갔다. 부서지는 햇살 아래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수려한 외모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오뚝하게 솟은 콧대를 따라 내려가니 보이는 선이 깔끔한 도톰한 입술. 매끈한 턱선 아래 불룩하게 솟아있는 목젖에서는 강인한 남자다움이 엿보였다. 세나는 한참을 넋을 빼고 바라보다 그의 눈썹이 꿈틀하자 정신을 차렸다.
‘자는 모습까지 완벽하네……. 되게 비현실적이잖아. 자기가 무슨 순정만화 주인공이야 뭐야.’
달뜨는 속내를 감추기 위해 투덜투덜, 자신도 모르게 느꼈던 감정을 애써 지워냈다. 그러고는 유리창에서 쏟아지는 빛 때문에 그가 잠에서 깰까, 창가 쪽 블라인드를 조용히 내렸다. 복수의 기회는 없었다. 이딴 사진 찍어봐야, ‘나는 잘 때조차 류강현이다.’ 하는 걸 인정해 주는 꼴이었다. 어둑해진 방 안으로 고요함이 스며들었다. 강현의 넓은 가슴이 규칙적으로 부풀었다 꺼질 때마다 세나의 가슴도 함께 움직였다. 그의 리듬과 세나의 리듬이 어느새 같아졌다. 세나는 잠든 강현을 마주 보며 테이블에 살짝 몸을 기댔다. 언제라도 손만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거리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그러나 이 설렘을 만끽하기 위해 세나는 손이 아닌 눈으로 마음껏 강현의 얼굴을 매만지는 상상을 했다. 잠이 든 류강현은 낮은 바람이 부는 호수에 잔잔하게 이는 물결 같았다. 누군가 돌멩이를 던져도 그 순간만 살짝 흔들릴 뿐, 금세 고요해지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어 하염없이 쳐다보면 어느새 홀려 발을 담그고 마는 아름다운 초록빛이 반짝이는 호수. 테이블에 올려진 하얀색 종이 탑과 몸을 가리고 있는 질 좋은 슈트만 아니었다면, 어디 휴양지에 놀러 와 나른한 오후를 만끽하고 있는 거라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 볼 어귀에 붙어있는 켈로이드 밴드가 눈에 거슬렸다. 상처는 깊었다. 눈 바로 아래에 사선으로 그어진 상처라 안 그래도 사납게 생겼는데, 그의 포스가 한층 더 날을 세웠다. 평소 안경으로 가리고 다니지만, 일할 때 빼고는 잘 쓰지도 않는 안경을 일부러 끼고 다녀야 하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 여편네 진짜 감방 처넣어야 하는데…….”
몇 번을 곱씹어봐도 제정신이 아닌 여자였다. 인간이기에 당장엔 슬퍼도, 돈 앞에선 장사 없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한들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그 여자처럼 떵떵거리며 사람들 앞에 나서지는 않는다. 잠을 잘 시간도 부족한 강현이 약은 꼬박꼬박 잘 바르는지, 저러다 흉이라도 지면 어쩌나. 괜찮다고 해도 진작에 병원으로 데려가 의사에게 상처를 보여줘야 했던 거 아닌가. 세나는 상처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고개를 강현의 얼굴 가까이 내렸다. 그때였다. 눈꺼풀이 천천히 열리며 그 안에 잠들어 있던 까만 동공과 눈이 마주친 것은.
“엄마야!”
세나가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펄쩍 뛰었다. 그러다 책상 모서리에 엉덩이를 부딪쳐 옆으로 고꾸라지려는 순간, 손목이 홱 당겨졌다. 그녀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끌려와 강현의 품에 안겼다.
“…….”
세나는 갑작스럽게 변한 시야에 멀뚱멀뚱 눈을 깜빡였다. 넘어질 줄 알았는데, 책상 모서리에 부딪힌 엉덩이 말고는 아픈 곳도 없었다. 그저 손바닥 아래 불끈거리는 무언가가 의아했다. 탄탄하다. 안정적이고. 만지기 딱 좋은 모양새였다. 저도 모르게 그곳을 더듬거리자 귓가에 한껏 가라앉은 숨소리가 흘러들었다. 그제야 자신이 더듬고 있던 것이 한 남자의 가슴이었고, 그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은 세나의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다급히 손을 치우고 벌떡 일어나려는데 가슴의 주인이 세나의 허리를 확 잡아채더니 제자리에 도로 앉혔다. 졸지에 그의 허벅지를 깔고 앉아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다정함이 연출되었다. 강현은 제 허벅지에 앉은 세나가 무겁지도 않은지 품 안으로 더욱 끌어당겼다. 세나의 양팔이 그의 이두근에 갇혀 꼼짝할 수도 없게 결박되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버둥대기를 포기하자, 강현은 느슨하게 팔을 풀고 그녀를 안은 채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두 사람분의 무게로 의자의 각도가 조금 더 뒤로 젖혀졌고, 그 덕에 맞닿는 부위가 전에 없이 밀접해졌다. 그의 가슴팍에 닿은 볼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두근두근 뛰기 시작하는 제 심장의 울림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놔주세요.”
류강현은 세나를 놓아주는 대신, 그녀의 정수리에 볼을 기댔다.
“졸려.”
“다 깬 것 같은데…….”
“……몇 시야?”
“몰라요. 이렇게 안고 있는데 시계를 어떻게 확인해.”
“그럼 잠 깰 때까지 이러고 있자.”
“불편한데…….”
“엉덩이는 괜찮아? 멍들 것 같던데.”
“…….”
“얼굴이 보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몰래 훔쳐보지 말고.”
“……그 입 안 다물면 두 번 다시 못 걸어 다니게 만들어 줄 거예요.”
강현은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긴 숨을 뱉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그에게 안겨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세나는 그저 입술을 질끈 씹었다. 그의 목 언저리에서 나는 청량한 향이 시원해서. 나른함에 잠긴 그의 목소리가 너무 근사해서. 이렇게 기대고 있는 그의 품이 생각보다 너무 따스해서.
댈 수 있는 온갖 핑계를 덧붙여 미칠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리고 정확히 5시 45분 알람이 울리자, 강현이 세나를 의자에서 내려주었다. 잠깐의 휴식으로 생기를 되찾은 강현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 중 하나를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고소장”
명예훼손, 업무방해, 특수폭행죄가 명시된 고소장이었다. 피고소인은 오정자였다. 법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의 경우 경찰서 민원실을 통해서 고소장을 제출하겠지만, 굳이 경찰서를 방문하는 것보다 경찰청이든, 검찰청이든 관할청 담당자에게 우편으로 직접 접수를 하게 되면 반려 없이 사건번호를 부여받게 된다.
“네가 원한다면 이대로 고소장을 송달할 거야.”
“해요. 당장. 그 여자는 이렇게 해도 정신 못 차릴 사람이에요.”
“잘 생각해. 기세나. 뭐가 옳은 건지. 지금 당장 화가 난다고 사건의 본질을 흐리지 말고.”
“좋게 좋게 넘어가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에요. 가만히 있으면 호구로 본다니까. 자신이 함부로 행동한 대가는 치러봐야 법 무서운지 알지.”
“그래.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너한테 맡길게.”
“응? 나한테요?”
“오늘부터 네가 내 법정 대리인이야.”
서류를 자세히 보자, 법정 대리인과 고소 대리인에 ‘변호사 기세나’라고 명시되어있었다. 이상했다. 숱하게 들었던 법정 대리인이란 단어가 이렇게 섹시하게 들리다니. 시니어 변호사가 되고 처음으로 사건을 수임했을 때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 변호사가 됐구나, 하는 성취감에 벅찼던 거였지 지금처럼 가슴 언저리가 간지럽지는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은 묘하게 쑥스럽기까지 했다. 세나의 고개가 푹 숙어졌다. 긴 머리칼이 앞으로 쏠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귓불을 가려주었다.
“그걸로 협박하든, 협의하든 전적으로 너에게 맡길게.”
“……선배는 나를 얼마나 믿어요?”
“흐음……. 네게 점수를 딸 좋은 기회인 것 같은데……. 뭔가 멋들어진 답이 안 떠오르네. 아직 잠이 덜 깼나?”
능청스럽게 대답하지만,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흔들림 없는 까만 눈동자는 누구보다 그녀를 믿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세나는 총격전이 오가는 전장에서 강현이 등을 맡길 수 있는 전우가 된 기분이었다.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류강현 한 사람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몹시도 기뻤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류강현과 이런 사이가 될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그저 오래 쌓였던 앙금을 풀고, 밥이나 몇 번 같이 먹고, 얼굴 보고 일을 하다 보면 으레 생기는 동료애로 관계를 개선한 다음. 신뢰를 바탕으로 파트너십을 맺는 것만이 K 법무법인과 저의 찬란한 미래를 위한 최선이다 여겼다. 참 아둔하고 어리석었구나. 세상의 이치는 어제, 오늘, 깨닫는다고 끝이 아니었다. 내일도, 모레도, 새로운 날을 맞이할 때마다 또다시 깨달을 수 있다는 걸 배운다.
“선배. 데이트, 뭐 하고 싶어요?”
“적극적인 자세는 좋은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질문의 의도가 파악이 안 되는데.”
“저 선배가 이긴다에 십만 원 걸었어요.”
눈썹을 들추면서까지 표정에 물음표를 새겼던 강현이 입가로 스멀스멀 번지는 웃음을 손안에 감췄다.
“영화 보러 가요.”
“그래.”
“그러니까 꼭 이겨야 해요. 저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거 잘 알죠?”
알다마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세나와 승부욕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만큼 남들보다 몇 배로 노력한다는 사실도. 신신당부하며 밖으로 나가는 세나를 보며 강현이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이 순간, 어쩌면 그녀가 저의 첫사랑이 아닐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