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윈윈하는 장사2022.01.04.
“조그만 게 뭘 안다고.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너도 가. 속 시끄러워.”
“누나. 정신 차려. 남자는 남자가 봐야 알아. 지금 누나가 매달려도 한참 모자랄 판인데, 뭘 밀어내고 있는 거야? 양심이 있으면 거울 좀 봐. 여기 마침 거울도 큰 게 있네.”
“우리 기세후니, 오랜만에 누나랑 타작 놀이 한번 할까?”
세나가 두 손을 겹쳐 잡고는 손가락 관절 마디를 뚝뚝 꺾자, 기세훈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나는 너무 폭력적이야. 법을 다루는 사람이 법보다 주먹이라니. 우리 형님은 누나 이런 모습은 아신대?”
“누가 우리 형님이라는 거야?!”
“그럼 자형(姉兄)이라고 불러?”
“야!!!”
잘 웃지도 않는 녀석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굴자, 세나는 또 한 번 제 이마를 짚었다. 세상엔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도 없었다. 피를 나눈 형제가 적이 될 줄은 몰랐지만.
“밥은? 아빠랑 약속 있어서 온 거야?”
“아니. 누나 보러 온 거야.”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용돈 필요해?”
“진짜 누나 보러 온 거야. 왜 안 믿지?”
“너 같으면 믿겠니? 왜? 갖고 싶은 게 많이 비싸? 카드 줄까?”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명품을 사달라 부모의 등골을 브레이킹 한다는데, 기세훈이라고 갖고 싶은 게 없을까. 야간자율학습도 마다하고 제 누나를 직접 찾아온 걸 보니 학생 신분으로 무리인 가격대인 듯싶었다. 평소라면 ‘학생은 학생답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하고 쫓아내 버릴 기세나였지만, 곧 있으면 세훈의 귀빠진 날이기도 하니 선심 좋게 카드 한 장 쥐여주고 내보낼 생각에 지갑을 꺼내 들었다.
“누나. 나 진짜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냐. 그날 이후 집에도 안 오고, 그냥 보고 싶어서 온 거야.”
“…….”
세나가 가볍게 몸을 떨며 팔뚝을 쓸어내렸다. 같은 유전자를 공유한 사람끼리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말인가. 물론 아주 어릴 적, 이제 갓 걸음마를 뗀 꼬꼬마 기세훈이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제 누나를 엄마로 착각해 졸졸졸 따라다니던 때도 있었다. 어느 정도 말문이 트인 후 샛노란 유아원 모자를 쓰고 ‘누나, 사랑해요, 세후니가 마니 보고 시포써요. 사탕 사쥬세요.’ 이랬던 적도 있지만,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훌쩍 키가 크고, 턱에 수염이 난 뒤로 제 누나를 ‘용돈 머신기’ 이상으로 거들떠보지도 않던 놈이었다. 그런 놈의 입에서 ‘보고 싶어서’라니. 사춘기가 오고 나서 애정 표현이라든가 희로애락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동생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닭살이 다 돋았다. 서로 살갑게 굴지 않는 현실 남매였으나, 제 동생은 또래답지 않게 어른스러웠다. 어떤 땐 저보다 더 어른 같기도 했고. 그렇기에 큰 걱정을 해본 적 없는 터라 세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세훈아 너. 사고 크게 쳤구나. 변호사 필요해? 누구 때렸어?”
“나 그냥 갈까?”
“아니야. 일단 앉자. 그게 뭐든 누나가 해결해 줄게.”
짧게 한숨을 쉰 기세훈은 조금 전까지 강현이 앉아있던 자리로 가 가방을 벗고 앉았다.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야?”
기세훈은 제 눈치를 살피며 재차 물어오는 누나에게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 가방을 열어 편의점에서 사 온 이온 음료 두 병을 꺼냈다. 그중 한 병의 뚜껑을 따 세나에게 내밀었다. 안 그래도 목이 말랐던 터라, 받아든 이온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다 입가로 조금 흘렸다. 그러자 기세훈은 테이블 위에 있던 휴지를 두어 장 뽑아 세나에게 건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조그만 놈이 벌써 다 컸네.
“너 학교에서 인기 많겠다.”
“응. 많아. 그래서 귀찮아. 여자애들은 신경 써 줘야 하는 게 너무 많아. 잘 웃고, 잘 울고.”
“공부만 하지 말고, 좋아하는 여자 만나서 마음도 아파보고 그래야 어른이 되지.”
“누나는 어른이라서 그런 거야?”
“……응?”
“어른들은 키스는 해도 사귀지는 않는 거야? 우리는 손만 잡아도 썸인데, 어른들은 키스해도 썸은 아닌가??”
“……너……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데?”
기세훈은 고등수학 문제를 풀듯 집중하는 모습으로 손가락을 허공에 까닥까닥 계산기를 두드렸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가느다랗게 좁혀진 눈매가 자못 진지했다. 이윽고 계산이 다 끝났는지 세나의 손에 들린 지갑을 보며 입을 열었다.
“누나가 키싱구라미가 돼서 외간 남자 무릎 위에 있을 때?”
“…….”
세나의 지갑이 일말의 저항도 없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노란색 지폐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술은 퉁퉁 부어서 얼빠진 표정으로 멍 때릴 때부터였나?”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이내 한 장을 더 꺼냈다.
“아니다. 괜한 자존심 부리며 데이트 허락했을 때부턴가? 할 거 다 해놓고. 그 형님 인내심을 존경할 뻔했잖아.”
“……요즘 어머니가 용돈 안 주시니? 기 대표님 돈 많이 버실 텐데…….”
“그래서 내기가 뭔데? 설마 유치하게 막 누가 먼저 사랑하네, 마네, 말하는 건 아니지? 설마. 다 큰 어른들이?”
입술을 질끈 씹으며 두 장을 추가했다. 총 이십 만 원이었다. 기세훈은 두 손을 공손히 세나의 앞으로 내밀며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 아무것도 못 봤어. 아까 그 형님 얼굴만 기억나. 잘생기셨더라.”
돈을 챙긴 기세훈이 그녀를 향해 순진무구한 눈을 반짝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데, 세상 영악한 놈이 여기 있구나 싶었다. ‘용돈 필요 없다. 누나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귀여운 제 동생은 꿈에서 만났었나. 순식간에 지갑 속 현금이 동이 났다. 거기에 눈 뜨고 코가 베이는 좌절감까지 맛보았다.
“너 진짜 왜 왔어?”
“누나 별일 없지?”
“네가 나의 별일이야.”
“그럼 됐어.”
그렇게 말한 기세훈은 제 누나를 다시 한번 살핀 뒤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뭐야, 진짜.”
“누나 얼굴 보러 온 거 맞아. 할 말이 있었는데, 안 해도 되겠다 싶어서.”
“할 말이 뭐였는데? 하고 가. 돈도 뜯겼는데 잠도 못 자게 만들지 말고.”
“누나. 나, 누나 동생 맞지?”
“그게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네가 내 동생이지 그럼 누구 동생이야?”
기세훈이 어떤 의미로 말하는지 세나는 잘 알고 있었다. 배다른 형제. 열다섯의 나이 차이. 사춘기 시절 겪었던 세간의 눈초리. 그러나 그건 제 동생 탓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결정이었지. 기세훈은 어느 순간부터 기장수 대표를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늘 ‘아버지’라 부르며 어리광을 부리지 않고 거리를 두었다. 그게 저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후 속상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기세나에게 기세훈은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그럼 내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
“일단 들어보고.”
“내가 정말 싫다고 하면 안 할 수 있어?”
“그게 뭔데?”
“그때 돼서 말해줄게. 약속해.”
“그래. 알았어. 약속할게.”
보기 드물게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었다. 뭐냐고 끈질기게 물어도 절대 대답하지 않을 놈이란 걸 잘 알기에 세나는 그냥 알겠다고 답을 했다.
“아. 맞다. 누나. 아까 그 형님 말이야. 누나 진짜 좋아하는 것 같던데 어지간하면 그만 튕기고 받아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잖아. 근데 내가 봐도 그 형님이 더 아까워.”
“그런 거 아니다 했다.”
“아버지랑 약속한 것도 있잖아. 누난 머리가 좋은데 가끔 이상한 곳에서 멍청하게 굴더라. 복이 절로 굴러들어 왔는데 왜 모르지? 하여튼 이상해.”
“야. 너 내가 준 돈 도로 내놔. 이 새끼가.”
“소인 이만 물러가옵니다.”
기세훈까지 사라지고 나자 비로소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진이 빠졌다. 오늘 하루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세나는 터덜터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가죽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제 동생이 마지막에 남기고 간 말을 떠올렸다. 아버지와의 약속.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약이었다. 손만 뻗어 집무실 테이블 첫 번째 칸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관리하는 계약서들이 담겨있는 서랍이었다. 그중 제일 아래에 깔린 클리어 파일을 꺼내 들었다. ‘계약의 목적은 남녀관계에 있고 그 관계는 연인을 뜻한다.’고 명시된 계약서를 천천히 읽어가며, 그 아래로 줄줄이 달린 조항과 새로 수정한 부분들을 보았다. 이 계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 파트너 변호사의 자리. 기장수 대표의 지분 일부. 그리고 가사전담팀의 존폐 여부. 만약 기세나가 파트너 변호사가 된다면 자신이 이끄는 팀 전체에 대한 지원이 더 커질 것이다. 절대 일어날 일이 없다고 생각한 일이 일어났다. 천하의 류강현이 제 입으로 좋아한다, 제게 고백까지 하다니. 세나는 비어있는 손으로 제 가슴 언저리를 가만히 눌러 보았다. 안정을 찾은 심장은 아까처럼 세차게 날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를 생각하면 콩닥콩닥 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 인간은 도대체 나를 왜 좋아하지? 내가 막, 아무것도 안 해도 사랑에 빠질 정도로 매력 있나?”
류강현은 기세나에게 예쁘다고 했다.
“하긴 내가 좀 예쁘긴 하지. 능력도 있고. 게다가 똑똑하기까지 해.”
마음이 예쁘다. 얼굴은 취향이 아니라고 했던 그의 말은 오래전 세나의 머릿속에서 왜곡된 방향으로 편집되어 있었다. 원래 인간의 뇌는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대로 저장하니까.
“그럼 좀 받아줄까? 어차피 나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니까. 서로 윈윈하는 거지.”
그러나 쉽게 받아줄 마음은 없었다. 어쨌건 그간의 설움도 있었고, 실컷 그의 마음을 애타게 굴리다 결정적인 순간, 딱! 마음을 받아줄 계획을 세웠다. 매번 얼굴이 빨개지고 당황하는 건 저였는데. 그 순간 냉철함이 무너진 류강현의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세나는 계약서에 얼굴을 묻고는 행복한 회로를 돌리며 킥킥, 웃었다. *** 드르륵, 드르륵. 손바닥만 한 기계가 열한 자리 숫자를 띄우며 쉼 없이 진동했다. 테이블 위에서 경박하게 춤을 추는 핸드폰을 지켜보는 채성민의 눈이 사납기 짝이 없었다. 지끈지끈 두통이 관자놀이를 쿡쿡 쑤셨다.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마사지를 했지만,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이제는 송곳이 되어 눈두덩과 머리 전체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견디기 힘든 통증에 모니터 옆에 놓인 하얀 약병을 집어 들고 물도 없이 삼켰다. 이젠 진통제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의자에 기대어 약효가 돌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핸드폰의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어디에서부터 걸려 오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유명인의 가십이라면 그 사람의 죽음까지도 팔아먹는 열정을 가진 모 일간지 기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