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고작 키스일 뿐2022.01.01.
“좀. 제발. 지금 제가 정신이, 없으니 선배가 나가. 게다가 여긴 내 방이잖아요!”
손바닥에 입술이 가려져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지만, 제 위로 드리운 기척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친 거야. 이건 미친 짓이야. 아니. 왜. 왜. 왜. 왜. 왜에에에에에-.”
음절이 끊어지는 부분마다 세나의 머리가 양쪽으로 팽팽 세차게 돌아갔다. 남자와 연애할 때 갑의 위치에 있었던 건 늘 저였다. 저 혼자 속앓이를 하더라도 어쨌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도도하고, 당당했으며,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 남자들은 그런 세나에게 휘둘렸고, 마음을 졸였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지금 조바심을 내야 하는 건 류강현인데, 그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그의 말 한마디에, 그의 모든 행동에 휘둘리는 건 왜 저인지. 세나는 몹시도 억울했다. 이것은 필시 호랑말코의 저주였다. 십 년을 이어온 저주는 이번 대에서도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입으로는 싫다, 안 된다, 거부하면서도 이 미천하고 유혹에 약한 몸뚱어리는 좋다고 넙죽 받아들이다니. 받아들이기만 했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급물살을 타고 달리던 욕망이 종착지에 다다라서는 아쉽다고 오히려 더 달려들었다. 이런 식으로 언행 불일치를 몸소 실천할 줄은 정말 몰랐다. 자괴감이 산사태로 무너진 흙더미처럼 세나를 와르르 덮쳤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내가 그랬을 리 없잖아.”
얼굴에서 손을 뗀 세나가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강현을 쳐다보았다.
“자꾸 그렇게 귀엽게 반응을 보이니까 괴롭혀주고 싶어지잖아.”
이 잘생긴 호랑말코는 제 맘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휘두르겠다고 선전포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눈은 그를 향한 원망과 상황에 대한 후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키스가 싫지 않았다고, 아니 너무 좋아서 황홀했다고 느끼는 해괴망측한 제 본능에 대한 실망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뺨이라도 한 대 후려칠 줄 알았는데.”
“지금이라도 후려쳐줘요? 반대쪽 뺨도 똑같이 만들어줘?!”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가 순순히 반대 뺨을 세나에게 내밀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 이런 기분이구나. 웃는 얼굴에 속아 넙죽 받은 선물이 빅엿이라니.
“치워요. 진짜 쳐버리기 전에.”
불과 몇 분 전. 제게 황홀함을 선사했던 입술이 보기 좋게 휘었다.
“그러게 그 행운을 왜 나한테 넘겨서, 나 좋은 일 시켜줬어?”
“…….”
“이제라도 다시 돌려줘?”
“헐…….”
쓸 만큼 다 썼으면서, 인심 좋게 돌려주겠다고 말하는 강현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뭐라고 받아칠 수 없는 이유는 처음 시작점이 그였다고 하나, 받아주고 거기에 양념을 버무린 건 저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악! 약 올라!!”
세나는 홧홧하게 열 오른 얼굴 위로 손부채질을 했다. 이놈의 망할 심장은 왜 저 혼자 널을 뛰는 건지. 진정 좀 해라. 부채질하던 손으로 제 가슴 언저리를 쿵쿵 내려쳤다. 그러나 이미 추진력을 얻은 심장은 쿵쾅쿵쾅 속도를 더해 갈 뿐이었다.
“하아……. 우리 얘기 좀 해요.”
“얘기해.”
“이 자세로 무슨 얘기요?”
도망치다 막다른 골목길에 갇힌 사람처럼 사방이 꽉 막혀있는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해. 제 앞을 막아선 강현의 어깨를 밀어낸 세나가 반대편 소파를 가리켰다.
“나한테서 떨어져요. 그리고 여기서 쫓겨나기 싫으면 저기 가서 앉아요!”
“나 아픈데.”
“……류강현 씨.”
밀어내는 힘에 꿋꿋이 버티며 강현은 불쌍한 척 최대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안 통하니까 수작 그만 부리고! 얼른!”
세나의 단호한 모습에 다시 한번 배짱을 부리며 버텨봤지만 더는 통하지 않았다. 강현은 아쉬운 듯 짧게 탄식하더니 맞은편 소파로 가 앉았다.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강현이 자리를 잡고 앉자, 세나가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우리 규칙이 필요한 것 같아요.”
“무슨 규칙?”
“첫 번째. 허락 없이 나 막 함부로 끌어안거나, 막, 키, 스 같은 거 하지 마요. 스킨십 금지야!”
“…….”
“두 번째. 지난번처럼 막 약한 척, 나랑 놀고 싶다는 둥, 남들이 오해 살 만한 발언 자제해요. 그리고 오늘처럼 나 대신 일에 끼어들었다가 다쳤다고 내 탓하지 말고.”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세워가며 철부지 아이에게 세상 사는 법을 가르치듯 엄포를 놓았다.
“죄책감을 무기로 사용하는 거 너무 비겁해요. 정정당당. 그때도 말했잖아요!”
그러는 동안 강현은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세 번째 손가락이 펴졌을 때, 강현을 노려보던 세나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표정이 왜 그래요? 내 말 듣고 있어요?”
“아 미안, 제대로 안 들었어. 마음이 이미 콩밭에 가 있어서.”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닌데……?”
“나도 장난치는 거 아닌데?”
“지금도 봐! 말장난 치잖아!”
어르고 달래보려던 세나가 또 강현의 수에 말려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강현은 풀어졌던 입꼬리를 재정비하고 차분히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러다가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기세나’ 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쳐다도 보고 싶지 않은데, 그의 목소리에 자석처럼 이끌려 눈이 마주쳤다. 강현의 눈동자가 세나의 얼굴 위를 여유롭게 배회하다, 어느 순간에선가 진지하게 한곳을 직시했다. 군데군데 묻어나던 장난기는 더는 없었다.
“첫 번째. 난 네가 넘어올 때까지 기다려 준다고 했지,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는 안 했어. 두 번째. 이상한 오해를 살 만한 말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거 오해 아니고 진심. 나 너랑 놀고 싶어. 세 번째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말을 멈춘 그가 입안에서 혀를 굴리다, 길고 유려한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좋아하는 여자를 꼬시는데, 페어플레이하는 머저리는 없어.”
“…….”
“그런 머저리가 이상형이라고 말한다면, 지금 말해. 연습 좀 해보게. 아마 안 될 것 같지만.”
그런 머저리가 이상형일 리가. 얼굴이 김수현급이면 한 번쯤 생각해보겠지만, 만남이 길어지면 복장이 터지겠지. 맞는 말이긴 한데, 왜 이렇게 인정하기 싫을까. 상대가 류강현이라서 그런가 싶었다.
“키스 한번 했다고 내기에서 이긴 척 굴지 말아요! 나 아직 넘어간 거 아니니까.”
“넘어왔을 거라 생각도 안 했어.”
“암튼 쉬운 여자 취급하면 선배고 뭐고 그날부로 우린 지옥에서 만나게 될 거예요. 만약 내가 죽으면 유언을 남길 거야. 내 관 위에 선배 묻어달라고. 그것도 ‘산’ 채로.”
그녀의 살벌한 경고에 강현은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꾹 눌러 참았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죽어서도 함께 하려 하다니. 그렇게 내가 좋냐고 물으려다, 그랬다간 쫓겨나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 간신히 참았다.
“기세나. 어떤 미친놈이 너보고 쉽대? 넌 내가 아는 여자 중에 제일 어려워.”
그가 아까와 달리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자, 세나 또한 잔뜩 날을 세웠던 기세를 점차 누그러트렸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
“뭐가요?”
“너답지 않아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쳐다보자 강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뭔가 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싫다, 안 된다고 하는 거 말이야. 그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별론가?”
“누가 별로래? 선배가 어디가 어때……서.”
“…….”
“……아, 짜증 나.”
강현이 소파 팔걸이를 턱, 짚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기다랗게 쭉 뻗은 키가 천장에 닿을 듯 의기양양했다. 대답이 몹시 흡족하다는 듯 눈가엔 빙긋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세나는 그에게 보이지 않게,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 망할 놈의 입은 입이 아니고 주둥이였다. 그것도 학습 능력이 몹시 뒤떨어지는. 강현을 따라 몸을 일으켜 세운 세나가 바닥을 보고 길게 한탄 어린 숨을 뱉더니,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이게 만약 재판이었다면, 2심의 세 번째 공판쯤 됐을까. 그쯤 되면 서로가 어느 정도 패를 다 까고 있기 때문에 회심의 한방이 없는 이상 서로의 입장만 주장하는 팽팽한 싸움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덮어놓고 피하는 건 그의 말대로 저답지 않았다. 정정당당을 운운하며 승부를 피하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다니.
“아까 말한 그 재판 꼭 이겨요.”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 공사판이다. 의외라는 듯 쳐다보는 그에게 세나가 콧대를 세웠다.
“데이트가 문제가 아니라,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지는 선배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철없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어린 소녀도 아니고, 이것저것 따지고 볼 수도 있는 경험도 있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전세를 역전 시켜야 한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내기 아직 끝난 거 아니에요. 선배 말대로 피하지 않는다는 말이니까.”
“아무렴 어련하실까.”
강현이 ‘그래. 이래야 기세나지.’하고 기특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으려 하는 그때였다.
“나 이제 들어가도 돼?”
문 근처에서 불쑥 웬 남학생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세나였다.
“기세훈?”
단정한 교복 차림의 기세훈이 방문 앞에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브르가 새로운 곤충을 관찰하듯 그가 강현을 찬찬히 훑어내렸다. 똘똘하게 생긴 남학생의 얼굴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누구?”
“제 동생이요. 네가 여기 왜 있어? 야자는?”
세나의 물음엔 답하지도 않고 강현 앞으로 걸어온 세훈이 갑자기 두 손을 배 위로 공손히 모아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기세나 변호사님의 동생 기세훈이라고 합니다. 류강현 파트너 변호사님이시지요?”
고등학생답지 않은 깍듯한 예의였다.
“청학동에서 학교 다녀??”
“쟤 태교를 사극으로 해서 가끔 저래요.”
“아아.”
“누님과 볼일이 끝나셨으면 제가 좀 끼어들어도 될까요?”
“그래요. 기세훈 군. 다음에 언제 누나랑 같이 밥 한 끼 하죠.”
“예. 그럼 조만간 시간을 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강현은 앳된 얼굴로 저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는 기세훈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동그란 눈이 그녀를 똑 닮아있었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인 것도 신기했다. 손을 놓아줘야 한다는 생각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자, 세나가 끼어들어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놓았다. 강현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내보낸 세나가 방문을 닫고 기세훈을 돌아보았다.
“너 진짜 학교는 어쩌고 여기 왔어?”
“쨌어.”
“그럼 친구들이랑 놀지, 왜 여기로 와? 혹시 사고 쳤니?”
“없어. 아무 일도. 내가 누난 줄 알아? 그건 그렇고 저 남자 맞지? 아버지가 데려오라고 한 그 변호사.”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라고 물으려다, 윤모연 여사님 생신날 난리를 친 게 떠올라 제 이마를 짚었다.
“난 무조건 찬성. 합격이야. 10점 만점에 100점. 저 정도 급은 돼야 형님으로 모실 맛이 나지. 아버지가 사람 하나 진짜 잘 보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