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피할 수 있는 기회는 한 번2021.12.28.
“사, 살인미수??”
“죄가 되는 건 다 갖다 붙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서.”
오정자를 향해 내렸던 허리를 세운 뒤 한 발짝 물러난 강현은 새파랗게 질린 채 저를 바라보는 여자에게 더없이 잔인하고 차가운 웃음으로 응수했다.
“이제라도 여기가, 어딘지나, 알고 설치셨으면, 하는 인도주의적 차원에 제가 선심을 써드리죠.”
*** 아침까지만 해도 운빨이니, 행운의 여신이니, 재잘재잘 떠들던 입술에서 한숨이 터졌다.
“꿰매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새살이 돋아난다는 유백색 크림을 검지에 듬뿍 묻힌 그녀가 광대에 길쭉이 나 있는 상처 위를 살살 문질렀다.
“어우, 속상하다 진짜. 이거 흉 지면 어떡해요? 아 진짜 잘생긴 거 말고는 볼 거 없는 남자인데…….”
“그래. 이거 하나 믿고 사는데 큰일이네.”
“농담이 나와요? 가만히 좀 있어 봐요.”
크림이 투명하게 녹도록 톡톡톡 주변을 두드리던 세나의 입에서 또다시 무거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러게 왜 맞아줬어요?”
“……한숨도 못 자서 막을 힘이 없었거든.”
“그럼 끼어들지 말든가.”
“…….”
“한 대 맞아주고 치우려고 했더니. 괜히 일이 더 커졌잖아요.”
이번에는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나서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알아서 대처할 수 있는 일에 어쭙잖게 끼어들어 해결했다면, 자존심이 강한 그녀에게 또 다른 굴욕감을 줄 거라 여기기도 했고.
“그런 것처럼 보여서 끼어든 거야.”
초연해지는 세나의 얼굴을 본 순간 머리보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그 여자의 손이 세나를 향해 날을 세우는 순간 눈이 돌아갈 뻔했다. 만약 자신이 조금이라도 늦어 그 여자의 손바닥이 세나의 뺨을 스치기만 했어도, 이렇게 단순히 고소로 끝나지 않았을 터였다. 법은 잘 알수록 이용하기 쉬웠고, 그 법을 제멋대로 가지고 놀던 강현이 정당방위의 무서움을 정말로 알려줄 뻔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세나는 알지 못했다.
“뺨 한 대 맞아주고 경찰 부르는 게 낫지. 그리고 혹시 또 모르죠. 고소 취하하는 조건으로 제가 담당한 사건이 쉽게 풀릴 수 있을지.”
“그거 공갈·협박이야.”
“언제는 이기는 게 변호사라며?”
커다란 눈에는 걱정을 한가득 담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투덜투덜하는 세나가 못마땅한 눈초리로 강현을 쏘아보았다.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건 좋은데, 그게 기세나가 누군가에게 맞아야 하는 거라면 차라리 지고 말지. 강현은 상처 주변을 문지르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왜요? 아파요?”
“어. 아파.”
“병원 가자니까.”
“아니. 거기 말고.”
“그럼? 머리?? 이거 눈탱이 밤탱이 될 것 같은데. 머리라고 괜찮겠어요? 그 여편네 가방에 뭐가 들었대요? 벽돌이라도 들었던 거 아니야?”
호들갑을 떠는 그녀가 왜 이렇게 귀여운 건지. 진짜 머리가 잘못된 게 아닐까 잠시 의심을 해봤지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강현이 들릴 듯 말 듯 한 옅은 웃음을 흘리며 제 손에 가만히 잡혀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손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손이 작은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다. 강현이 엄지의 평평한 면으로 세나의 손바닥을 뭉근하게 문지르자 파닥거림이 뚝 멎었다.
“기다려주는 건 기다려주는 거고.”
오늘 아침, 활짝 웃는 기세나를 보며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제대로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뭐……. 뭐를요?”
분위기만 잡으려고 하면 금세 말을 더듬는 그녀였다. 이런 모습까지 사랑스러운 여자라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강현이 세나의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제 입술을 꾹, 찍어 눌렀다. 입술이 손바닥 중앙에 닿자, 불에 덴 듯한 열기가 온몸으로 스멀스멀 번졌다.
“좋아해. 기세나.”
강현은 기분을 나른하게 만드는 열기를 만끽하며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채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둥글게 솟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밤 갈색 눈동자가 갑작스레 불어닥친 풍랑에 일렁거리듯 흔들렸다. 입술을 떼어낸 강현이 그녀의 손을 제 뺨으로 가져갔다. 기분 좋은 따스함은 그대로였다. 강현이 살며시 눈을 감았다 뜨며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 속으로 그녀를 가득 담았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재판, 이길 확률이 희박해. 그런데도 이기고 싶어.”
“…….”
“이 재판에서 이기면, 나랑 데이트하자.”
분명 들릴 리가 없는 소리였다. 철렁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는. 그런데도 그 소리가 세나의 가슴속에서 분명 들렸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불꽃인지 모르겠으나, 갑자기 세를 부풀려 확 들이닥친 화염 속에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장난이 아니었다. 무슨 말을 듣더라도 언제나 빠져나갈 수 있는 빈틈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방이 꽉꽉 막혀 마음을 숨길 작은 구멍조차 보이지 않았다. 세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여태껏 자신을 엄청나게 봐주고 있었다는 것을. 그 틈조차도 자신이 아니라, 강현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이거, 이거, 바, 반칙이에요.”
“네가 말했잖아. 사람 꾀어내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단단히 걸어 잠근 줄 알았던 자물쇠가 맞지도 않은 열쇠에 철커덕 열려버렸다. 무장해제가 되어버린 세나의 마음에 온갖 감정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문밖에서 기다리던 남자는 이제 없다.
“……나, 나는. 나…….”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데, 상반되는 감정이 각자의 주장을 펼쳐대는 통에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강현이 손을 뻗어 세나의 뒷덜미를 슬며시 감쌌다. 목덜미에 닿은 온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윽고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끌려갔다. 코끝과 코끝이 스치고, 입술이 닿을락 말락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멈추었다. 입술 위를 스치는 숨결이 아찔해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세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눈을 감았다. 고요한 방 안, 째깍째깍 손목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만 울린다. 흐르는 시간을 가늠하며 숨을 참았다. 한참이 흘러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슬며시 눈을 떴다. 잠깐 사이에 시간이 멎기라도 한 걸까, 선이 뚜렷한 입술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미쳤나 봐…….”
“그러니까 대답해. 이왕 미쳤다는 소리 들은 김에 더한 짓을 하기 전에.”
호랑이 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확률은 얼마나 될까? 사지 멀쩡히 살아 돌아온 인간이 있기는 하고? 다리 한쪽이나, 팔 한쪽이 너덜너덜해지지 않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 호랑이는 왜 인간을 살려 보내줬을까?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인간이 불쌍해서? 아니면 언제라도 잡아먹을 수 있기 때문일까……. 사면초가인 상황에서 세나의 신경 줄이 정전기가 일어난 머리카락처럼 빠짝 일어섰다. 집중하자. 기세나.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늘 이렇게 말한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그럼 그 떡은 뭘까. 류강현이 호랑이라면, 이 호랑이가 바라는 떡은……. 쪽. 새털처럼 가벼운 키스가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
기습적인 접촉에 화들짝 놀란 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는 여전히 류강현의 커다란 손아귀에 단단히 붙들려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안 통해.”
“잠깐만, 선배 일단 이것 좀 놓고…….”
“빠져나가려고 머리 굴리는 게 다 보이는데 내가 또 봐줘야 해?”
“봐주긴 뭘 봐, 읍.”
끌려간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연달아 붙었다 떨어지는 짧은 입맞춤에 살갗이 파르르,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남자와 키스를 하는 게 처음은 아닌데. 특히 이딴 유치원생들이 하는 버드 키스에 농락당할 나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숱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처음 겪은 생경한 통증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심장이 없는 게 차라리 덜 고통스러울 정도로 그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쾅쾅쾅, 방망이로 뚜드려 맞는 것 같았다. 세나는 저의 정신까지 침범하는 행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고 이리저리 고개를 비틀었다. 강현의 입술이 세나의 턱과 볼 여기저기로 내려앉았다. 그러다 나직한 탄식과 함께 덜컥, 턱이 잡혔다.
“시간 초과야.”
그는 한 손에 잡힌 조그만 턱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실어 제 입술과 바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고정했다. 느른하게 내리깐 눈꺼풀 아래 어떤 욕망을 담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숨결엔 원하는 바가 명확했다.
“그러니까 밀어내지 마.”
엄지손가락이 세나의 입술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다물린 입술을 벌렸다. 곧이어 촉촉함을 머금은 열기가 입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치열을 부드럽게 훑고 뻣뻣하게 굳은 살덩이를 살살 간질이는 놀림은 숨이 막힐 정도로 집요했다. 더 깊이 맞물릴수록 견디기 버거웠다. 농밀해진 숨결이 서로의 입속을 오가고 점차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는 어디라고 할 거 없이 온몸으로 번졌다. 겹쳐진 부위에서 피어오른 아찔함에 흠뻑 취한 세나가 강현의 품으로 무너졌다. 강현의 한쪽 허벅다리에 걸터앉게 된 세나의 상체가 뒤쪽으로 넘어가려 하자, 넓게 편 손바닥이 안정적으로 그녀의 등을 감싸고,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맞물렸다. 세나는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것 같은 키스가 이어지는 동안,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왜, 고작 키스일 뿐인데. 이렇게 좋은 걸까. 더, 더 가까이 닿았으면. 어디가 어떻게 닿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어 그저 손이 가는 대로 뻗었고, 닿는 모든 것을 움켜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이대로 영원히 이 야릇한 감각에 매몰되어 버릴 것 같아서. 엉망으로 헝클어진 호흡이 강현의 입안으로 먹힐수록 머리는 어지럽고 몽롱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제 제 입술에 매달렸던 열기 어린 감촉은 사라졌는데, 머릿속에 가득 찼던 기운은 아직 빠져나가질 못해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멍했다.
“아…….”
빛을 받아 반짝여야 하는 눈동자가 흐리멍덩한 게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긴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여보았다. 몇 번 더 깜빡거리자, 그제야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넓은 어깨를 차양처럼 벌리고 소파의 양쪽 팔걸이를 지지대 삼아 받친 채 그늘을 만들고 있는 류강현은 마치 자신의 품 안에 기세나를 가두고 있는 모양새였다. 조금 전까지 그가 앉아있던 소파에 왜 자신이 앉아있는 것인지. 분명 그가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왜 그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지. 미묘한 침묵 속에서도 째깍째깍. 시간은 흐른다. 갑자기 얼굴이 터질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미친!
“아아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새빨갛게 물든 얼굴이 두 손 아래 숨었다.
“나가요! 당장!”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