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살인미수와 정당방위2021.12.25.
그녀의 말대로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죽었다. 부모란 무릇 먼저 간 자식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산다고 했다. 사무치는 그리움에 속앓이하다 눈물로 지새우는 날들이 늘어난다던데. 눈앞의 여자는 가슴에 묻기는커녕, 49재도 지나지 않은 자식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었다. 대신 돈독이 올라있었다. 세나는 죽어서도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남자가 불쌍해졌다.
“애지중지 키운 내 아들 잡아먹은 년 주제에 감히!! 난 그런 년 내 며느리로 인정한 적도 없고, 그 누구 새낀지도 모르는 씨를 배어놓고 돈을 요구해?? 어림도 없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분노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참아야 한다. 기세나.’
성질머리 같았으면, ‘여기가 어디라고, 그 뚫린 입으로 함부로 지껄이냐. 이 못 배워 먹은 여편네야!’ 하고 받아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오정자 씨. 지금부터 입조심 하세요.”
세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 석 자에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여자가 일순 멈칫거렸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 거로 생각지 못했는지 퍽 당황스러운 듯 보였다. 그러나 여자는 옆에 서 있는 남편을 힐끔이더니 다시 표독스러운 얼굴을 했다. 남편을 자신의 든든한 지원군이라도 된다고 여기는지 소매를 바짝 걷어붙였다. 세나는 오정자 너머의 남자를 보았다. 다년간의 노하우로 관상을 보건대 전형적인 노름꾼 스타일이었다. 거기다 피부가 검붉고 흰자위가 노르스름한 게 알코올 중독자임이 분명했다. 딱 보니 집안 살림 꽤나 날려 먹게 생겼네.
“후우…….”
세나는 목구멍 너머로 짜증을 꾹 눌러 삼킨 후 긴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검지를 곧게 세워 리셉션 천장에 달린 카메라를 가리켰다. CCTV 촬영 중을 확인시켜준 뒤 오정자 앞으로 제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무례한 언행이 고스란히 녹음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변호사는 결국 법으로 사람을 상대할 수밖에 없다. 상대가 아무리 넌덜머리 나는 진상이어도. 자신은 변호사이니까.
“뭘 어째요. 여기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변호사들이 모인 법무법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시는 모양인데, 지금부터 말조심하지 않으면, 형법 제 311조 모욕죄, 제 307조 명예훼손. 제 314조 업무방해죄로 노년에 법원 출석하시느라 매우 불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죠.”
허리를 곧게 세운 세나가 또박또박. 법 조항과 함께 상대가 받게 될 처벌까지 친히 알려주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죄명들을 줄줄이 읊어대자, 오정자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돈독이 오른 희번덕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상황 파악에 나섰다. 이 맛에 변호사 하는 거지. 자신이 도출해낸 결과에 만족한 세나가 이제라도 알아들었으면 조용히 사라져달라는 말을 꺼내려는 그때였다. 별안간 불벼락이 떨어졌다.
“이년이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네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어?! 뭐가 어쩌고 어째? 어디 눈을 똑바로 뜨고 어른한테 대들어?!”
만만하게 여겼던 상대는 생각보다 너무 강적이었다. 목소리가 크면 장땡인 줄 아는 철면피. 싸움의 방식이 너무 치졸하고 구차해, 세나는 잠시 공격력을 상실했다.
“와, 무식하면 법도 안 통한다더니. 염치도 없고, 양심도 없고. 정말.”
논리도 통하지 않는 상대는 무시가 답이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했다. 뻔뻔스럽고 부끄러움이라곤 모르는 행동에 기어이 세나의 입에서 비아냥거리는 어투가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뭐 무식? 이년 말하는 꼬라지 좀 보게. 오냐. 내가 콩밥을 먹더라도 네년 머리채를!!”
말이 통하지 않자, 이제는 폭력이었다. 오정자가 세나를 향해 손을 확, 휘둘렀다. 그래. 차라리 한 대 맞아주자. 그리고 법조계에 종사하는 자에게 손을 함부로 놀린 대가를 두고두고 후회하게 해주겠다는 심산으로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강현이 세나에게 달려드는 손을 단박에 낚아챘기 때문이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가 어수선하던 분위기를 일순간에 잠재웠다.
“여기 변호사가 몇 명인데, 이 꼴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겁니까?”
구경꾼들을 매섭게 몰아붙이는 눈동자는 억제된 분노로 이글거렸다. 강현의 일갈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눈빛에서부터 읽히는 기세가 어찌나 살벌한지, 안일한 태도로 관망하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떨구었다. 갑자기 등장한 남자에게 손목이 붙잡힌 오정자가 당황한 것도 잠시였다.
“이거 안 놔?! 넌 또 뭐야!!!”
오정자는 자신의 손목을 비틀어 쥔 악력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악다구니를 썼다. 그러나 그녀의 손을 높이 들어 붙들고 있는 강현은 단단한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발버둥 치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강현은 그녀와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 뜻인지 한심하다는 뜻인지. 아무튼, 그가 한껏 눈매를 찌푸리며 쯧, 혀를 차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오정자가 반대 손을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강현의 고개가 옆으로 휙 꺾였다. 깜짝 놀란 세나가 오정자의 어깨를 밀치고 소리를 질렀다.
“이 아줌마가 미치셨나?!! 당신 지금, 이거 단순 폭행 아니고 특수 폭행이야. 알아?!”
오정자가 강현에게 휘두른 손에는 키링이 주렁주렁 달린 가방이 들려 있었다.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솟은 세나는 서릿발이 선 얼굴로 보안팀을 노려보았다.
“보안팀은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이 사람들 도망 못 가게 붙잡아요! 그리고 경찰 불러요! 나 이거 절대 못 넘어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행패는 행패야?!”
그제야 보안팀 직원 두 명이 오정자의 팔을 각각 붙들어 잡았다. 그녀의 남편은 오정자를 붙잡는 보안팀을 저지했지만, 소용없었다. 폭행을 가한 순간, 보안팀에도 그들을 저지할 명분이 생겼다.
“놔! 놔!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저년이, 저년이, 갑자기 나타나서 다 망치려고 한 거잖아!! 아악!! 이거 안 놔?!!”
여전히 제 잘못을 모르고 악다구니를 쓰는 여자가 발버둥을 쳤다. 배까지 보이며 드러누우려는 여자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붙드는 동안, 소식을 듣고 올라온 다른 보안팀 직원까지 가세하자 눈치를 살피던 오정자가 돌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변호사라는 것들이 사람 잡네!! 억울해서 못 살겠네!!!”
악에 받친 울음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넌덜머리 나는 상황에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강현이 더 걱정이었다. 혹시나 눈을 맞았으면 어쩌나, 불안한 마음을 고스란히 내비치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선배, 괜찮아요? 어, 얼굴 좀 봐요……!”
욱신욱신한 통증에 강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손끝으로 맞은 곳을 훔치자 그의 손에 빨간 피가 묻어났다.
“아……. 어떻게 해. 피나잖아요!”
아니나 다를까. 광대 위 사선으로 그어진 상흔에서 핏물이 스멀스멀 배어나고 있었다. 피가 묻은 손끝을 확인한 강현이 골이 아픈지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눈꺼풀을 무겁게 감았다 떴다. 그마저도 시원치 않은지 머리를 가볍게 흔들자, 광대에 맺혔던 핏방울이 볼을 타고 뚝, 떨어졌다. 살짝 벌어진 상처는 그냥 봐도 깊어 보였다. 세나는 강현의 얼굴에 차마 손을 댈 수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많이 어지러워요? 괜찮아요??”
“……하아.”
묵직한 통증에 잇새로 나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세나의 격앙된 목소리가 뒤집혔다.
“119 불러야 해? 응급실 갈래요? 눈은? 눈은 잘 보여요? 나 잘 보여? 이거 몇 개예요? 뇌진탕인지 아닌지 확인 좀 하게 응? 내 눈 좀 봐봐요.”
눈앞에 손가락을 몇 개 세워 흔들다, 숙이고 있는 강현의 고개 아래로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마주치려 애를 썼다. 강현은 세나 때문에 더 정신이 없었다. 귀여워서. 아픈 것도 잊을 만큼. 그런 그의 마음을 모르는 세나는 토끼처럼 커다란 눈을 깜빡이다, 도저히 못 참겠는지 쌓았던 울분을 터트렸다.
“가만 안 둘 거야…….”
사람들 눈이고 뭐고 페이드아웃 된 것처럼 주위가 흐릿해지고, 머릿속에 차오른 화가 바글바글 끓어 넘쳤다. 얼굴이 최고의 장점인 남자에게 이런 상처를 입힌 노망난 여편네의 멱살이라도 잡지 않으면 이 화가 삭지 않을 것 같았다.
“아! 진짜! 저 미친 아줌마가!!! 우리 법무법인 간판 변호사를 건드려?!”
오정자는 자신에게 달려들려는 기세나를 보며 더욱 목청을 키웠다.
“그래 쳐라! 쳐! 아이고! 젊은 년이 늙은이를 잡네! 잡아!”
그녀가 보안팀에 붙잡혀있는 오정자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누군가 팔뚝을 잡았다. 세나는 날을 잔뜩 세운 낯으로 저를 붙든 사람을 돌아보았다.
“됐어. 그만해.”
“뭘 그만 해요? 선배 지금 자기 얼굴이 어떤지 몰라서 그래!”
“내가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기세나.”
“왜요?! 뭐?!”
“기세나 변호사.”
딱 떨어지는 목소리에 잔뜩 굳었던 세나의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그녀와 얼굴을 마주한 강현은 냉철한 태도로 주변 분위기를 인식하게 했다. 세나는 입술을 꾹 씹으며 씩씩거리는 호흡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들썩거리던 숨이 점차 차분해지자, 강현이 세나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마지막 토닥임에는 잘했다는 듯 꾹, 힘을 실어 누른 뒤 그녀의 너머에 있는 오정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세나의 곁을 지나친 강현이 저벅저벅, 구둣발 소리를 내며 오정자에게로 걸어갔다. 저에게로 다가온 시커먼 그림자로부터 위협을 느낀 건지 그녀는 가방 손잡이 부분을 꼭 쥐고 뒷걸음질을 쳤다.
“사고였어. 그러게 왜 남의 손목을 잡고 지랄이야……. 내가 그거 떼어내려고 휘두른 거야. 그래, 이거. 정당방위야!”
오정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더듬더듬 변명하다, 바로 앞에 강현이 멈춰서자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표정에서만큼은 어쩔 거냐, 너도 칠 거냐는 식의 독기를 내비쳤다. 강현은 저보다 한참 작은 몸집의 여자를 한껏 깔아보다, 짧게 실소했다.
“어르신.”
후우, 길게 숨을 내뱉은 그가 갑자기 손을 뻗어 오정자의 손에서 가방을 낚아챘다.
“정당방위는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강현이 제 손에 들린 가방을 무심한 눈으로 확인하곤 그녀의 머리 위로 높게 들어 올렸다. 오정자의 고개가 가방을 따라 들렸다. 자신의 앞에서 위압적인 포스를 풍기는 남자가 금방이라도 제 머리를 후려칠 것처럼 보였다. 겁에 질린 오정자가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공 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만 오정자가 힉힉 소리를 내며 부들부들 떨었다. 잠시 뒤 그녀의 옆으로 툭-, 가방이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오정자가 자지러지듯 비명을 질렀다.
“정당방위가 뭔지 몸소 알려드리고 싶지만, 차마 똑같이 행동할 수가 없어서 양해 좀 부탁드립니다. 명색이 변호사인데 천박하단 소리를 들을 수는 없으니.”
“…….”
“그리고 제가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한테, 마음이 많이 약해서.”
하고 운을 뗀 그가 입술을 비스듬히 틀어 올렸다.
“아까 저희 기세나 변호사한테 설명 들으신 거로 아는데, 3가지 죄목에 추가로 특수 폭행. 그리고 가방에 달린 날카로운 키링이 제 눈을 찔렀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찔했는데.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미수죄까지 추가해서 고소해드릴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