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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운수 좋은 날 (50/120)

50화. 운수 좋은 날2021.12.21.

귓가에 닿는 물기 어린 숨결에 세나가 바르작 몸을 떨자, 강현의 두 팔이 세나의 허리 뒤로 넘어왔다. 강현은 그녀가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 살며시 끌어안았다.

16551859265038.jpg“아. 일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기세나랑 놀고 싶다.”

느른한 숨과 함께 뱉어진 그의 속내엔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뭐 하는 짓이냐고, 당장에 어깨를 밀고 몸을 빼내야 하는 게 정상인데. 세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리광이 가득한 목소리가 올가미가 되어 제 몸을 꽁꽁 묶어둔 것 같았다. 큰일이다. 넘어가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왜 자꾸, 손끝이 간지럽고, 움찔움찔하는 것인지. 왜 제 어깨에 기대어 있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어지고, 둥글게 말린 남자의 등을 별안간 무슨 이유로 토닥토닥해 주고 싶은 건지. 세나는 어찌할 줄 몰라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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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 날이 있다. 왜인지 오늘 하루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갈 것 같은. 일 년에 한두 번.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저절로 눈이 번쩍 떠졌다. 찌푸린 얼굴로 침대 시트를 돌돌 말고, 잠기운을 이겨내려 꼼지락꼼지락할 필요도 없는 아침이었다. 생소한 개운함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커다란 창가를 가렸던 커튼을 열어젖히자, 새벽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봄비가 뚝 멎고, 미세 먼지 하나 없는 맑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보기 힘든 쾌청하고 푸르른 풍경에 감탄 어린 탄성이 터진다. 발걸음도 가볍게 욕실로 향한 세나는 미지근한 물에 몸을 맡겼다. 콧노래를 흥얼흥얼, 샴푸를 하고 새로 산 자몽 향 바디워시로 몸을 씻어냈다. 싱그럽고 새콤한 향에 어울리게 인디 핑크의 투 버튼 슈트를 입고, 흰 블라우스의 목깃 아래 화사한 브로치로 장식한 코디까지. 거울 속에 비치는 모습은 완벽했다. 오늘따라 머리칼이 어찌나 탐스럽게 말리는지, 미용실 언니의 손길 저리가라였다. 빨간색 스포츠카는 곧장 가정법원으로 내달렸다. 출근 시간대라 차가 막힐 줄 알았는데, 파란불 신호가 연달아 이어지며 예상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고, 들어서자마자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주차 자리가 떡 하니 비어있었다. 핸들을 부드럽게 조작해 한방에 주차를 마친 세나는 흡족한 얼굴로 시간을 확인했다.

16551859265047.jpg“오오오. 오늘 내 생일이야, 뭐야.”

의뢰인을 기다리는 동안 평소 듣지 않던 라디오를 켰다. 귀에 익은 노래가 타이밍 좋게 도입부부터 흘러나왔다.

16551859265047.jpg“오랜만에 듣네. 되게 좋아했던 노랜데.”

깨끗한 음색과 밝은 멜로디는 금세 흥얼흥얼 따라부를 수 있을 만큼 익숙한 노래였다. 세나는 기억에 남아있는 추억을 닮은 노래를 따라부르며 핸들 위에 올려둔 손으로 박자를 탔다. 이 행운이 재판 판결에도 영향을 끼쳤으면 좋겠다. 삼십 분 뒤 세나는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싹 지우고 긴장한 낯으로 의뢰인과 함께 원고석에 앉았다. 오늘은 재산분할의 합의점을 찾지 못해 몇 달째 질질 끌어왔던 이혼 재판의 최종 결론이 나오는 날이었다. 피고인 남편은 대단한 효자였다. 결혼 생활 도중 갑자기 쓰러진 시어머니. 남편은 모르는 사람 손에 제 부모를 모시게 할 수 없다며 직장에 잘 다니고 있던 아내를 졸지에 간병인으로 만들었다. 아내는 제 부모를 모시는 마음으로 아픈 시어머니와 집안의 온갖 궂은일과 대소사를 챙기며 몇 년을 살았다. 그러나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편은 돌변했다. 시부모가 남겨준 유산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었다. 시부모의 유산이기에 남편에게 유리할 거로 생각했지만, 재판부는 아내의 손을 들어주었다. 본 자식보다 더 알뜰살뜰하게 시어머니를 모신 것을 인정받아, 이례적인 판결이 내려졌다.

16551859265055.jpg“……피고는 원고에게 위자료 5천만 원과 재산의 50% 해당하는 금액 12억 8천만 원을 지급한다.”

재판부의 판결에 세나도 놀랐다. 그간의 고생을 금전으로나마 보상받은 의뢰인은 세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눈물을 흘렸다.

16551859265047.jpg“30%만 받아도 잘 받은 거라 여겼는데, 무려 50%라니! 대박이야!!”

의뢰인과 작별 후 차로 돌아온 세나는 두 손을 불끈, 허공에 주먹을 내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클랙슨을 빵빵 울리며 요란하게 자축하고 싶었지만, 장소가 장소다 보니 차장을 꼭 닫아두고 소리를 꺅, 내지르는 거로 대신했다. 행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법원에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좋은 소식이 줄줄이 이어졌다. 도토리 남편의 숨겨진 재산도 찾아냈고, 그의 내연녀가 멍청하게도 불륜을 인정하는 증거를 흘렸다. 거기에 플러스로 가사전담팀은 몇백억 원대의 재벌가 이혼 소송을 맡게 되었다.

16551859265047.jpg“웬일이니 웬일이야, 나 오늘 로또 사야 하는 거 아니니?”

차창 밖으로 보이는 양재천엔 벚꽃이 지고 있었다. 흩날리는 벚꽃잎이 살랑살랑, 더없이 완벽할 기세나의 오늘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껏 들뜬 기분으로 출근을 한 세나는 리드미컬한 하이힐 소리에 맞춰 긴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K 법무법인 직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녀의 화사한 미소에 마주치는 사람들이 손바닥을 내밀며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아침부터 변호사가 기분 좋은 일이 뭐가 있겠는가. 고군분투했던 재판에서 행운의 여신의 손을 빌려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설명은 표정만으로 충분했다. 룰루랄라, 홉핑 스텝을 밟으며 계단을 오른 세나가 강현을 발견했다. 그가 자신의 집무실 문틀에 기대서서 세나를 보고 있었다.

16551859265047.jpg“선배!”

16551859265038.jpg“아침부터 신났네.”

16551859265047.jpg“그러는 선배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해 보이네요.”

16551859265038.jpg“알다시피 고전 중이지. 누구와는 다르게.”

16551859265047.jpg“오늘 내 운빨 끝장! 장난 아님! 손 줘봐요!”

강현이 이맛살을 살짝 들추며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세나가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세게 손뼉을 부딪쳤다. 짝 소리가 경쾌하게 복도를 울렸다.

16551859265047.jpg“이건 선배만 주는 거. 수박 주스 셔틀 값.”

16551859265038.jpg“셔트을?”

16551859265047.jpg“비싼 거예요. 내 행운을 선배한테 넘겨준 거니까.”

16551859265038.jpg“얼마나 비싼 건데?”

강현의 고개가 삐뚜름히 기울자 세나는 속는 셈 치고 믿어보라며 상술 가득한 장사치처럼 말했다.

16551859265047.jpg“앞으로 한 한 달은 더 셔틀 해도 될 만큼.”

말도 안 되는 셈보다 하늘 같은 선배를 셔틀이라 부르는 그녀의 용기가 가상해 기가 찼다. 강현이 헛웃음을 흘리자, 세나가 헤실헤실 웃으며 한 술을 더 떴다.

16551859265047.jpg“그래서 어딨어요? 내 수박 주스?”

방 안을 기웃대는 그녀를 막아선 강현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16551859265038.jpg“네가 원하는 게 셔틀이야, 수박 주스야?”

16551859265047.jpg“뭐 그런 질문을 하지? 새삼스럽게.”

16551859265038.jpg“갑자기 궁금해서.”

16551859265047.jpg“당연히-.”

수박 주스라고 대답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질문을 던져놓고 답을 안다는 듯 무덤덤하게 구는 강현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괜히 허를 찌르는 답을 하고 싶어졌다. 세나가 히죽거리다 눈을 샐쭉 접었다.

16551859265047.jpg“수박 주스 사다 주는 잘생긴 남자?”

까만 붓으로 그린듯한 강현의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그에 반해 반응을 살피는 초롱초롱한 눈이 기대감으로 들떠있었다.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아주 예뻐 죽겠다. 그러니 기대에 걸맞은 보상을 줘야지. 지금 그녀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아마도. 강현이 두 손바닥을 넓게 펴 어깨 위로 들고 항복 자세를 취했다.

16551859265038.jpg“졌다, 졌어.”

16551859265047.jpg“앗싸!!”

원하는 대답을 들은 그녀는 대단한 승리를 거머쥔 것처럼 활짝 웃었다. 탐스러운 앵두같이 반짝거리는 입술이 강현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침부터 혼을 쏙 빼놓는 그녀를 당장에라도 끌어안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강현은 충동을 억누르며 바지 주머니 속으로 제 손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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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이 지날 무렵 뜻밖의 문자를 받았다. 김주희였다. ‘혹시 이런 것도 도움이 될까 봐서요…….’하고 한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을 확인한 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외에서 작성한 혼인신고서였다. 결혼식을 올리기 한참 전 뉴질랜드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는 두 사람은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한인 주례사를 찾았고, 이 서약서를 만들었다. 다만, 뉴질랜드 정부 공식의 결혼 증명서는 아니었다. 만약, 그 주례사가 투철한 직업정신을 발휘해 이 신고서를 뉴질랜드 정부에 등록했다면, 두 사람은 해외에서 법적 부부임을 인정받았을 터였다. 초조한 기다림 끝에, 뉴질랜드 공식 결혼 증명서를 메일로 받을 수 있었다. 이제 해외에서 발급받은 증명서를 가지고 우리나라에서 인정받은 사례들을 찾아야 한다. 몇 시간 뒤. 오매불망 기다렸던 장철호 실장이 자신의 솜씨가 가득 담긴 자료를 건네왔다. 그 자료를 훑던 세나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16551859265047.jpg“와, 장난 아니다. 역시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라니까.”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자료는 한번 보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깔끔한 보고서 끝엔 국내 판결사례뿐 아니라, 해외 판결문들이 간략하게 첨부돼 있었다. 이 결혼 증명서를 법적으로 인정만 받으면, 상속인 1순위는 배 속의 아이도, 남자의 부모도 아닌 김주희가 될 수 있었다. 화르르. 열정을 불태우며 집중을 하고 있는데, 내선 전화가 걸려왔다.

16551859265047.jpg“네. 기세나입니다.”

16551859265055.jpg-“변호사님. 지금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좀 내려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16551859265047.jpg“무슨 일인데요?”

16551859265055.jpg-그게요……. 아! 저기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거든요?!

이유를 말하다 말고 누군가를 향해 언성을 높이는 여직원의 목소리와 수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함이 동시에 터졌다. 세나가 귓가에 대고 있던 전화기를 멀리 떨어트리며 인상을 구겼다. 시장통을 방불케 한 소란 속에 제 이름이 들려왔다.

16551859265047.jpg“지금 내려갈게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세나가 방문을 나섰다. 아래층으로 내려옴과 동시에 노기가 잔뜩 서린 욕설이 귀를 찔렀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호출을 받고 올라온 보안팀 직원과 방문객을 맞이하는 리셉션 직원 둘. 이 소란이 뭔가 싶어 구경나온 K 법무법인의 직원들이 웅성웅성, 모여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쳐 앞으로 나서자 부부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가 삿대질하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비켜라.’, ‘그년 데려와라.’, ‘기세나가 누구냐.’며 고성을 지르는 그들을 보안팀이 제지하자, 아예 드러눕겠다는 식으로 막무가내였다. 함부로 터치할 수도 없어 보안팀은 진땀을 흘렸고, 리셉션 직원은 발만 동동 굴렸다.

16551859265047.jpg“제가 기세나인데, 누구시죠?”

세나가 사람들 앞으로 나서자, 독이 잔뜩 오른 중년의 여성이 가자미처럼 눈을 치켜뜨며, 보란 듯이 목청을 키웠다.

16551859265055.jpg“너야? 네가 그 정신머리 없는 변호사 년이야??”

16551859265047.jpg“욕은 하지 마시고요. 어떻게 찾아오셨나요?”

16551859265055.jpg“어디 할 짓이 없어서!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어 감 놔라 배 놔라야?! 내가! 엄마로서 우리 아들이 남긴 돈을 받겠다는데! 네년이 뭔데, 주라 말라야?!”

다짜고짜 쏟아내는 말들 사이로 이 진상 여인이 누군지를 파악한 세나의 낯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졌다. 김주희의 시부모 되는 사람들이었다.

16551859265055.jpg“당장 보험사에 전화해서 없던 일로 해! 안 그러면 너 고소할 거야! 같지도 않은 게 변호사? 웃기고 있네!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의 목숨값이니 당연히 내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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