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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넌 나만 신경 써 (49/120)

49화. 넌 나만 신경 써2021.12.18.

1655185907885.jpg“하아……. 유라야, 나도 내 생활이 있어.”

에둘러 거절해도 막무가내였다. 늘 있던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평소 취한 것과는 달랐다. 목소리 끝이 떨리고 뭔가를 긁어대는 것인지 주변 소리가 산만했다. 성민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잠시 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1655185907885.jpg“……너 왜 그래?”

1655185907886.jpg-“오빠. 성민 오빠. 나 무서워서 그래……. 제발. 응?”

제 기분 내킬 때나 재미 삼아 ‘오빠’라 부르곤 했지, 이렇게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오빠라 부른 적은 처음이었다.

1655185907886.jpg-“지금, 나 도와줄 사람, 오빠밖에 없어.”

그녀답지 않게 절실함까지 뚝뚝 묻어났다.

1655185907885.jpg“알았어. 어디로 가면 돼?”

뭐라도 되는 양 건방을 떨고 안하무인인 재벌 2세라지만, 그래 봐야 그녀의 나이 고작 스물다섯이었다. 황유라가 묵고 있는 객실 문은 두드리기가 무섭게 벌컥 열렸다. 그녀의 퀭한 얼굴과 동공 반응을 확인한 채성민의 낯이 잔뜩 구겨졌다. 술만 마신 게 아니었다. 피곤한 기색을 지우지도 못하고 얼른 안으로 들어섰다. 일단 불안에 떠는 황유라에게 물부터 먹이고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보려던 그가 목격한 풍경은 불시에 습격당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탁자 위 고가의 술병들 사이로 보이는 수상한 가루와 형형색색의 둥근 조각들. 쓰러진 채 깜빡대는 스탠드와 깨진 유리 조각들로 쾌락의 정점을 찍은 일탈을 엿볼 수 있었다. 하루에 몇백 불 하는 고급 스위트룸이 다 쓰러져가는 채성민의 아파트보다 더 엉망진창이었다.

1655185907885.jpg“놀 거면 곱게 놀아야지. 뭘 어떻게 해달라고 날 부른 거야? 이거 치워달라고 부른 건 아니지? 차라리 페널티 물고 방을 옮겨.”

거실을 둘러보던 채성민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문을 발견하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파에 목을 꺾은채 의식이 없는 한 남자와 그리고 바닥에 엎드린 채 누워있는 한 남자를 보고는 혀를 쯧 찼다. 그러나 카펫에 붉게 번지고 있는 얼룩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누가 봐도 피였다. 엎드린 남자의 옆엔 혈흔이 묻은 잭나이프가 뒹굴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다. 아연실색한 얼굴로 얼어 붙어버린 채성민의 뒤로 황유라가 겁에 질린 채 달라붙었다.

1655185907886.jpg“난 몰라. 나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 기억 안 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녀의 손은 새빨간 색으로 물들어있었고, 걸치고 있는 커다란 호텔 가운도 붉게 젖어있었다.

1655185907886.jpg“나 어떡해? 나, 난 그냥 재미 좀 보려고 한 거야, 오빠, 오빠 뭐라고 말 좀 해봐. 변호사잖아. 아빠가 알면 나 정신병원에 처넣을지도 몰라.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응?”

1655185907885.jpg“…….”

1655185907886.jpg“쟤 죽은 거 아니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채성민은 제 팔에 매달려 바들바들 떠는 황유라를 힘겹게 떼어내고 엎드려 있는 남자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굳이 확인 사살을 하지 않아도, 들썩이지 않는 등판으로 보아 이미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 언저리에 손을 가져댔다. 아니나 다를까, 희미한 맥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채성민은 입술을 질끈 씹어 뱉었다. 사고를 치다 못해 이 난장판에 저를 끌어들인 황유라를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붓고 싶었다. 어차피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신고부터 해야 한다. 채성민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자, 황유라가 다급히 그의 손을 잡아챘다.

1655185907886.jpg“신고하려고? 그럼 나 어떻게 되는 거야??”

1655185907885.jpg“황유라. 이거 단순한 사고가 아니야.”

1655185907886.jpg“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널 불렀지! 경찰이 오면! 뭐가 달라져?”

1655185907885.jpg“일단 경찰이 오면 조사를 하겠지. 뉴욕에서 제일 입김이 센 변호사부터 찾아. 그럼 심신미약이든, 우발적인 범죄든.”

1655185907886.jpg“미쳤어?!! 차라리 정신병원에 갇히는 게 낫지. 감옥은 안 돼!”

1655185907885.jpg“미국은 한국이랑 다르니까, 보석금만 내면 금방 나올 수 있을 거야.”

1655185907886.jpg“싫어! 나보고 그 더러운 곳에 가서 어떻게 살라는 거야? 이것만 어떻게든 처리해주면 내가 제대로 보답할게. 응? 오빠. 필요한 거 다 말해. 응? 성공하고 싶어 했잖아? 나 황유라야. 대호 그룹 황유라!”

성공에 목이 마른 채성민에게 대호 그룹이라는 이름과 뭐든 해주겠다는 그녀의 말은 악마의 속삭임이 되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것 또한 기회라고 여겨졌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날 기회. 채성민은 비상한 머리를 굴리며 방 안을 천천히 살폈다. 두 명의 남자. 한 명은 죽었고, 한 명은 의식이 없었다. 그리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돈 많은 여자. 채성민은 어느 때보다 냉정한 표정으로 황유라의 양쪽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1655185907885.jpg“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황유라는 또박또박 제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정처 없이 흔들리던 그녀의 눈에서 흐르던 악어의 눈물이 어느새 뚝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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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담일지의 마지막 장을 넘긴 세나가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책상 한쪽엔 자료보강이 필요한 케이스를 따로 정리해 두었고, 퇴근길에 비서실에 넘겨줄 다음 주 스케줄표도 따로 빼놓았다. 가사전담팀 블로그 상담은 집에 가서도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이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감기 기운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한동안은 쉬엄쉬엄. 무리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옷걸이에 걸어둔 트렌치코트를 챙겨 들고 문을 나서다, 흰 불빛이 쏟아져 나오는 창문에 시선이 걸렸다.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 한산한 복도에 불이 켜진 곳은 류강현의 집무실 하나였다. 세나는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그의 집무실 앞으로 다가갔다. 복도 쪽으로 난 유리창을 살피자 집무실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회의용 테이블에 둘러앉은 변호사들과 상석에 앉아 진두지휘하는 류강현은 빡빡한 일정과 몇 날 며칠 강행군으로 지쳐있었다. 팔뚝까지 걷어 올린 셔츠와 반쯤 풀어 헤쳐진 넥타이, 말끔하게 뒤로 넘겼던 머리칼이 눈가로 늘어져, 여간해서는 보기 힘든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서류를 쥔 손등에 굵다래한 핏줄이 불거지더니 강현의 사나운 눈매가 어김없이 구겨졌다.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막막했다. 검사 진영에서 새로 확보한 증거가 아직 제 손에는 없었다. 강현이 한 손으로 미간 사이와 관자놀이를 짚으며 길게 심호흡했다. 어미의 동향을 쫓는 새끼 사자 같은 눈들이 다닥다닥 그의 입술 끝에 매달렸다.

16551859110582.jpg“요즘 재판에도 쇼맨십이 필요하다지만, 결정적 증거랍시고 이렇게 꽁꽁 감춰두니 저희도 답답합니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김 변호사가 우물쭈물 말을 붙였다.

16551859136764.jpg“그러니까. 그 쇼맨십을 검사만 하란 법이 없지 않습니까?”

강현이 서류에서 손을 떼고 책상 위를 툭툭 두드렸다. 두드림이 점차 빨라지자, 그의 입술에 가 있던 시선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16551859136764.jpg“배심원들의 판결이 아직까진 참고하는 정도의 수준에 그친다지만, 우리도 그들의 시선을 끌 한방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김 변호사와 박 변호사가 앞다투어 몇 가지 방안을 제시했지만, 와닿지 않았다. 강현은 목덜미를 느릿하게 주무르며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그의 잇새를 통해 빠져나온 신음을 닮은 탄식이 변호사들의 가슴에 쿠욱, 묵직하게 박혔다. 가히 풍기는 분위기만으로 상대의 기를 죽이는 남자다웠다. 젖혔던 고개가 천천히 테이블 위로 떨어지는 찰나, 창문 너머에 서 있는 기세나와 눈이 마주쳤다.

16551859136764.jpg“잠시 쉬었다 하시죠.”

16551859110582.jpg“갑자기요?”

16551859136764.jpg“몇 시간째 회의하느라 머리가 굳은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이 상태로 더 진행했다가 오늘 내로 퇴근이나 하겠습니까?”

점심때부터 시작한 회의는 저녁 여덟 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맞대고 있어봤자, 부싯돌로도 쓰지 못할 만큼 다들 지쳐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현이 성큼성큼 걸어와 방문을 열었다.

16551859136764.jpg“퇴근?”

16551859136787.jpg“요즘 얼굴 보기 힘드네요.”

16551859136764.jpg“보다시피. 남의 돈 벌어먹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

강현이 수천 장의 서류가 산처럼 쌓여있는 테이블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쓰게 웃었다.

16551859136787.jpg“밥은 먹고 회의하는 거예요?”

16551859136764.jpg“아, 밥 먹을 시간도 없어.”

16551859136787.jpg“제가 뭣 좀 사다 줄까요?”

강현이 한쪽 눈썹을 들추며 세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 못할 소리라도 했나, 세나가 왜 그렇게 보냐고 입술을 소리 없이 움직였다.

16551859136764.jpg“지금 시간 괜찮아?”

16551859136787.jpg“네. 뭐 사다 줄까요? 샌드위치? 아니면 도시락?”

16551859136764.jpg“잠깐만.”

고개만 살짝 틀어 방 안을 확인한 강현이 세나의 손목을 덥석 잡고 계단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이끌었다. 주변의 인기척을 살핀 뒤 그가 몇 분 전 불이 꺼진 집무실 문고리를 잡고는 ‘실례 좀 하자.’ 허락을 구했다. 얼떨결에 그에게 손목이 잡혀 끌려온 세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은 강현이 그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16551859136787.jpg“선배, 어제도 잠 못 잤어요? 되게 피곤해 보인다.”

16551859136764.jpg“…….”

16551859136787.jpg“편의점에서 도시락으로 사다 주는 게 낫겠죠? 사는 김에 자양강장제도 사다 줘요?”

16551859136764.jpg“그거 왜 사주는 건데?”

세나의 손목을 놓은 강현이 자신의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우고 삐딱하게 내려다보았다. 살짝 찌푸려진 눈매 사이로 의구심이 가득한 검은 눈동자가 속셈을 파악하려는 듯 기민하게 움직였다. ‘아니, 사다 준다고 해도 난리야.’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16551859136787.jpg“맨날 수박 주스 얻어먹으니까 보답 차원에서 해주겠다는 거죠.”

16551859136764.jpg“그러니까 왜?”

16551859136787.jpg“아니, 뭐가 왜예요? 받은 게 있으니 주는 것도 있어야죠. 사람이 받아먹기만 하고 입을 싹 닦아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강현이 허공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그가 돌연히 상체를 확 숙이더니 세나와 동등한 높이에서 얼굴을 마주 보았다.

16551859136764.jpg“계산법이 독특하네.”

어두컴컴하게 불이 꺼진 방 안에 한껏 가라앉은 중저음이 나직하게 울렸다. 창문을 통해 넘어온 달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기에 육안으로 표정을 읽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피곤의 색이 짙었던 그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지는 것을.

16551859136764.jpg“수박 주스를 사다 바치는 건 난데, 왜 다른 놈들이 함께 보답을 받냐고.”

목표 의식이 확고한 눈빛에 세나의 심장은 주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철렁 내려앉았다. 붙박이처럼 달라붙는 시선을 피할 길이 없다. 툭, 벌어진 입술 사이로 폐로 넘어갔던 숨이 맥없이 흘러나왔다.

16551859136764.jpg“정 보답하고 싶으면 다른 거로 해. 나한테만.”

강현이 다시 세나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 하고 놀라, 몸을 물릴 새도 없이 그의 이마가 세나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그가 자신의 이마를 그녀의 목덜미에 뭉근하게 비볐다. 그것은 낯설고도 익숙한 감정이었다. 세나는 넓은 품 안에 어설프게 갇힌 채로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16551859136764.jpg“하아……. 이제야 좀 피로가 풀리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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