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하이에나의 충성심2021.12.14.
“응? 뭐라구요? 그보다 선배 괜찮아요?”
세나의 어조에는 걱정이 묻어있었다. 생동감이 넘치는 갈색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던 그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을이 사는 세상이 다 그렇지 뭐…….’ 하고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숱하게 봐온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낯설었다. 수심이 가득한 낯빛을 감추지 못하는 세나를 보며 채성민은 재차 괜찮다며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이만 올라가 봐야겠다. 다음에 내가 사무실로 갈게. 우리 세나 새 집무실 구경도 할 겸.”
***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채성민이 벽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했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욕설을 이제야 뱉으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하, 정말. 뭣 같네.”
세나에게 최대한 다정한 어투로 미안함을 전하느라 안면 근육이 잔뜩 뒤틀려있었다. 그러나 깊은 곳에서 차오른 독기까진 감출 수 없었다.
“지겨워.”
쿵. 3평 남짓한 작은 상자가 흔들릴 정도로 벽면에 뒤통수를 짓찧는 성민의 잇새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보안 카드로 법무팀 출입문을 열자, 한곳으로 모여들었던 시선이 눈에 띄게 흩어졌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등에 업은 적막함에 채성민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구둣발을 놀렸다. 짙은 회색 카펫 위를 내딛는 발걸음에 어찌나 힘이 들어갔는지, 저벅저벅한 소리가 울렸다. 불안한 시선이 뒤통수에 따라붙었다.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글로벌 경영에 나선 이래로 그 직속 법무팀은 기업의 재산관리나 수많은 계약을 검토하는 일만으로도 바빴다. 그러나 ‘대호’ 그룹의 법무팀은 다른 쪽으로 더 바빴다. 오너 일가의 방만한 경영으로 하루가 멀다고 터지는 사건 사고들에 대한 뒷수습과 ‘대호’의 최대 골칫덩어리 황유라가 그 중심에 있었다. 자신의 방문 앞을 서성이는 비서를 노려보자, 그녀의 불안한 눈동자가 손에 들고 있는 쟁반으로 향했다. 한 사람이 시켰을 게 분명한데, 잔이 여러 개다. 각기 다른 음료를 담고 있는 쟁반을 내려다본 채성민은 손짓만으로 비서를 물렸다. 돌아서는 비서를 확인한 그는 문을 확 열어젖히고 들어가 가벽이 다 뒤흔들릴 정도로 쾅, 거칠게 문을 닫았다.
“왔어?”
황유라는 가죽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 책상 위에 힐을 신은 채로 발을 올려두고 있었다. 교차한 발목 아래 오늘 아침 중요하게 검토하던 서류가 잔뜩 구겨진 채 뒹굴고 있었다.
“그래서 뭐 하는 여자야? 또 어디서 잡은 호구일까?”
“발 치워.”
“치. 워. 주. 세. 요.”
“…….”
“아까처럼 황 상무님 어쩐 일이세요, 하고 가식 떨어 봐. 아직 걔는 네 시커먼 속내는 모르는 것 같던데, 어찌나 웃기던지.”
황유라는 붉은 입술을 비스듬히 벌리고 교성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높은 음색이 귀를 찌르는 바늘 같았다. 채성민은 숨이 막히다 못해 질식할 것 같은 기분에 거칠게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힘이 잔뜩 들어간 주먹을 풀어 허리춤에 손을 얹고 헝클어진 날숨을 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앞에 있는 지긋지긋한 인연을 당장에라도 치워버리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바닥을 보고 심호흡을 하며 분노를 삭이는 것뿐. 그러나 이가 갈릴 정도로 턱에 힘을 주어도 불쑥불쑥 치솟는, 상대를 향한 적의는 감출 수가 없었다. 되도록 침착하게 상황을 마무리하고자 했건만, 그럴수록 더 질척하게 달라붙는다. 황유라는 그런 채성민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사사건건 그를 불러냈고, 응하지 않을 시엔 이렇게 불시에 찾아왔다. 그녀는 남들이 둘 사이를 어떻게 보는지, 안중에도 없었다.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지금.”
참다 참다 씹어뱉는 채성민의 음성엔 경멸이 가득했다.
“몰라서 묻는 거야?”
새삼스럽게 왜 그래. 황유라가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채성민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네가 자꾸 도망치려고 머리를 굴리니, 목줄을 제대로 쥐어야 할 것 같아서.”
집무실 안에 편히 앉을 곳이 뻔히 있는데, 그녀는 굳이 테이블 위에 자리한 채성민의 명패를 아무렇게나 치우고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 여자가 너 거둬준대? 족보도 없는 잡종 새끼를?”
“그럼 족보 있는 개새끼를 키워. 잡종 새끼한테 물리기 전에.”
“자그마치 칠 년인데. 넌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좀 부족해. 개새끼면 개새끼답게 굴어야지, 왜 자꾸 사람이 되고파 할까?”
“뼈대 있는 집안의 자제분께서 말 한번 더럽게 하시네. 아니, 집안 내력이 그런 거니 개중에 특출난다고 해야 하나.”
“있는 사실을 말하는데 왜 그렇게 기분 나빠 해? 네가 어디 가서 이만한 대접을 받을 수나 있겠어? 거지새끼 거둬서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
황유라는 저를 한껏 노려보는 채성민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씩, 웃어넘기더니 한 손을 눈앞으로 뻗었다. 그녀는 새파란 매니큐어를 칠한 제 손톱을 유심히 보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숍을 옮겨야겠네. 이따위로 칠해놓고 돈을 처받아?’ 중얼거리고선 채성민 앞으로 제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네가 봐도 별로지?’ 하고 되묻기까지 했다. 조금 전, 족보니 거지새끼니 운운했던 걸 까마득하게 잊은 사람처럼 자신이 내뱉은 말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어 보였다.
“네 말대로 칠 년이면 해 줄 만큼 해 준 거 아닌가?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자고. 너랑 말 섞는 것도, 널 보는 것조차 역겨우니까.”
“돈도 싫다, 차도 싫다, 자리도 싫다. 그럼 네가 뭘 원하는 걸까?”
“필요 없어. 여태껏 군말 없이 뒤치다꺼리해 줬으면 할 만큼 한 거 아냐? 너야말로 언제까지 그따위로 살 건데. 죽을 때가 돼야 철이 들 건가? 그럼 이제 난 빼줘. 난 이렇게 사는 거 신물이 난다.”
처음이자 마지막 진심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구정물에서 더는 놀고 싶지 않다는 말은. 이곳에서 더 가져봤자, 어차피 다 발목을 채우는 족쇄고, 제 목을 옥죄는 목줄일 뿐이니까. 모두 버리고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개새끼를 키우는 줄 알았는데, 돼지 새끼를 키웠네. 돼지들이 그런다더라. 배가 부른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처먹어대는 거, 그거 다 욕심이야. 안 그래? 끝도 없는 욕심.”
“…….”
“네가 한 말이 왜 이렇게 같잖게 느껴지는지 알아?”
이토록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면서도 내쳐버리고 싶은 채성민과 다르게 황유라는 채성민의 본질을 꿰뚫어 봤다. 태생이 부족하게 태어난 채성민과 가진 건 많았지만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황유라. 아무리 가져도 채워지지 않았다. 돈은 넘치도록 많은데,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 욕심의 끝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 허무함은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인 집착을 만들었다. 그래서 한 번 손아귀에 들어온 것은 자신이 버리기 전까진 절대 놓칠 수 없었다.
“넌 주제 파악을 못 해. 손에 쥔 건 고작 쥐뿔도 없는 자존심 하나인데, 욕망이 득실득실. 네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지 모르겠어? 가르쳐 줄까?”
황유라가 채성민과 눈을 마주쳐왔다. 붉게 칠한 입술을 혀로 슬쩍 핥더니 곧게 세운 검지로 자신의 발밑을 콕, 찍어 가리켰다.
“여기야.”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는 걸 알았음에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편이 제게 도움이 될 테니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제 손으로 만든 결과물이 고작 이따위인 것을.
뉴욕 브루클린. 늦은 저녁, 채성민은 고단한 몸을 이끌고 낡은 아파트로 돌아왔다. 변호사 시험에 합격 후 1년 간의 인턴 생활을 해야 했다. 인턴 생활이 그렇듯 실무보단 잡무가 많았고, 하루하루 주어지는 업무의 양은 24시간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정도로 많았다. 오늘도 이틀 만에 하는 퇴근이었다.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누이자, 스프링이 삐걱대며 푹 꺼졌다. 그러나 잠을 자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거라도 어딘가. 비싼 집값을 자랑하는 맨해튼과 다리 하나로 연결된 곳에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이보다 더한 집에서도 살았는데. 졸음이 가득한 눈이 가물가물.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것 같았던 순간,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나 손 하나 까닥할 힘이 없었다. 업무적인 연락은 아닐 것이다. 사무실에 아무도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퇴근했으니까. 이 시간에 울리는 전화는 뻔하다. 그에게 가난이란 벗어나기 힘든 대물림이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공부해서 법대에 들어갔다.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받을 처지도 못 됐기에 죽기 살기로 노력했다. 고3 수험생활 끝에 제 부모에게 대학 합격증을 내밀던 순간을 채성민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저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혼자서도 열심히 노력한 자식에 대한 대견함이 아닌, 돈 나올 구멍쯤으로 여기는 그 어떤 것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제 부모가 더는 불쌍하지 않았다. 그저 제 등에 올라타 하나라도 더 빨아내려는 거머리일 뿐. 차라리 없는 게 나을 것 같은 부모와 하나뿐인 동생은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어김없이 ‘성공이 보장된 장남’을 찾았다. 밑 빠진 독은 아무리 물을 쏟아부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도 지긋지긋했다. 미안하면 더는 부탁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자신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도 모르고, 당장의 일이 해결되면 다인 줄 아는 그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한 사람들. 채성민은 재차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나 집요한 울림은 먹먹해지기는커녕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놓았다. 끊어지기 무섭게 다시 울리는 핸드폰은 전원을 끄지 않는 이상 밤새도록 울릴 기세였다. 집세와 각종 공과금을 내고 나면 얼마가 남을지 모를 통장 잔고를 떠올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 화면에 뜬 상대를 확인한 채성민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몇 번의 만남의 대가로 마지막 학기의 학비와 생활비를 흔쾌히 던져주었던 황유라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인 건지. 술에 취해 흥청망청 놀다 그것도 질려서 심심풀이로 전화를 한 것일까.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날카로운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터졌다. 뭐에 또 이렇게 화가 났을까, 저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사용하는 그녀에게 이골이 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사소한 것 하나부터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는 그녀였다. 조금만 성에 안 차도 큰일이라도 난 양 온갖 패악을 부리기에 뭣 때문에 이러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채성민, 흐, 여기로 좀 와줘…….”
황유라는 잔뜩 취해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어눌한 발음은 척척하게 젖어있기까지 했다. 그럼 그렇지. 성민은 자조 어린 한숨을 뱉으며 그녀를 달랬다.
“지금이 몇 신데, 유라야. 나 내일도 출근해야 해.”
-“그거 몇 푼 번다고. 때려치우면 그만이잖아?! 돈 때문에 그러는 거면 내가 줄게. 달라는 대로 줄 테니까 당장 여기로 오라고!”
“하아……. 돈 때문이 아니라 국제 변호사로 일하려면 이곳 회사의 경력이 필요-.”
-“XX, 그까짓 로펌 내가 차려줄 수도 있어! 아니 그냥, 우리 아빠 회사에 한자리 줄 테니까! 그냥 좀 오라면 오라고!!!”